문화도시부평과 함께하는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중가수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인터뷰 운영은 국내 최대 사이트 PLSong.com의 운영자 ‘단풍’이 참여했다.

1회는 ‘노래선언’으로 활동한 최도은님이 참여해주셨다.

Q. 인천과의 인연에 대해 말씀 부탁드려요.
A. 나기는 전북 옥구에서 나서 한 살이 되기 전에 서울 은평구쪽에서 살았어요. 인천에 처음 내려온 것이 1988년이에요. 대학을 졸업하고 노동자들에게 노래를 지도하러 왔다가 8년쯤 살았어요. 백운 일대에 벌집이라고, 화장실 하나에 방이 8~10개씩 있는 그런 곳에 살기도 했고, 산곡동 한양아파트 뒤편 군부대가 하나 있었는데, 그 군부대 옆으로 쭉 올라가면 노랑다리라는 곳에 살기도 했어요. 노랑다리는 전기가 늘 나가가지고, 난방을 하지 못하니까 전기장판을 깔고 자다가 전기가 나가면, 산곡동에 ‘청산골’이라고 봉제노동자들이 만든 공간까지 밤마다 걸어가서 자기도 하고 그랬어요.

Q. 특별히 인천이었던 이유가 있나요?
A. 인천에는 민중교회운동이 활발했는데, 민중교회에서 공부하고 토론하면서 이 사회에서 노동자가 정당한 대접을 받으려면 투쟁을 조직해야 한다는 그런 각성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아마 다들 1987년에 일어난 6월항쟁은 잘 알거에요. 인천에서는 이미 1985년에 대우자동차에서 민주화투쟁이 있었고 1986년엔 5.3항쟁이 일어났죠. 5.3항쟁은 많은 사람들이 시위에 참가해서 전두환 정권의 간담이 서늘하게 만든 투쟁이라고들 해요. 이런게 87년 6월항쟁이 지나고 87년 7월부터 9월까지 일어난 노동자 대투쟁에서 인천이 굉장히 그 중심적인 역할을 해요. 인천은 그렇게 노동자투쟁이 굉장히 활발한 지역이었어요.

Q. 인천이 노동자투쟁이 활발해서 내려오신거라구요?
A. 그 당시에 부평에서 제일 투쟁을 많이 하는 코스모스전자나 명성전자 농성장에 가서 노래 공연도 하고, 사실 공연이라기보다 가서 노래도 가르쳐 주고 율동이랑 구호도 가르쳐주고 그랬어요. 노조를 만드니까 회사가 문을 닫고 가버려요. 그러면 노동자들은 농성장을 만들었어요. 거기 다니던 대부분의 여성 노동자들이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졸업장 때문에 거길 떠나지를 못하는 거에요. 고등학교를 졸업해서 사무직으로 전환하고 싶어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회사를 떠날 수가 없는 거죠.

당시 현장 노동자들은 노래를 많이 몰랐기 때문에 '임을 위한 행진곡'부터 ‘불길도 헤치고 물속을 헤엄치고’, '모두들 여기 모였구나' 같은 노래들을 가르쳐 줬어요. 거기에서 그 친구들하고 같이 살고 같이 고민을 얘기하고 그러고 살았죠. 어차피 나도 살 곳도 없고 하니까 거기서 먹고 자고 하면서 살 수 있었어요.

Q. 대학시절부터 소위 운동권이셨나봐요.
A. 원래 운동권은 아니었어요. 음대생이다보니까 사실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냥 노래 부르고 집, 노래 부르고 집.. 이런식으로 살았기 때문에 사회에 대한 이해를 전혀하지 못했죠. 제가 84학번인데 입학 무렵 학교에서 시위가 자주 있었어요. 시위라고 해봐야 한 3~40명이 모여서 구호를 외치고 임을 위한 행진곡 한곡을 다 부르기도 전에 잡혀가는데, 아스팔트 위로 끌러가는 그 광경이 너무 잔인하고 그래서 그냥 피하고 싶었어요. 주로 학교 시계탑 근처에서 시위를 했는데, 우리 음대가 바로 그 시계탑에서 거리로 30미터쯤 되다 보니, 그 시위 광경을 수업하다가 다 보였어요. 그러다 2학년 때 과대표가 됐고, 3학년 때는 부학회장이 됐어요. 1986년 학생회 모임에서 이제 그런 공부를 해야 된다고 해서 한 첫 번째 세미나가 광주항쟁 관련된 인쇄물을 보고 하는 세미나였는데 너무 문화적인 충격이었어요. 그런 일이 있었다니...

그러다, 1987년 1월 14일, 탁 하고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는 그 박종철이 죽은 거에요. 나를 더 힘들게 했던 건, 나는 남영역 플랫폼에서 집에 간다고 들떠 있을 때, 그 플랫폼 맞은편 검정색 벽돌 건물에서는 내 나이 또래, 같은 학년인 학생이 잡혀가서 고문을 당해서 죽었다는 거였어요. 아무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을 끌고 가서 죽일 수도 있고, 아무 죄 없는 어린 소녀들, 어린 청년들에게 총구를 겨누는 세상이었다는 걸 알게 되니까, 내가 막 독립운동을 해야 될 것 같고. 그런 마음으로 열심히 막 뛰어다닌 거죠. 그러다보니 졸업하고서도 당연히 뭘 할게 아니라 당연히 그냥 이런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 뭐 흔히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가서 내가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겨서, 그래서 졸업하고 인천에 가서 정말 열심히 살았어요.

Q. 음대생이셨군요? 그러시면 학교를 다니시면서 노래패 활동도 하셨겠어요.
A. 전혀 아니에요. 중학교부터 성악가를 목표로 공부를 했어요. 고등학교도 일반학교지만 음악공부를 하는 학교로 갔고, 숙대 성악과에 들어간거죠. 말 그대로 성악과 출신이어서 노래를 잘했으니까 그냥 졸업을 했는데, 그 당시에 인천에서 노동쟁의가 많이 일어났고 그래서 거기에서 그냥 노래운동을 해야겠다라고 생각한거에요.

Q. 노래선언 활동에 대해서도 간단히 소개부탁드려요.
A. 노래선언은 1991년 5월에 만들었어요. 인하대 노래패 출정이랑 인천대 노래패, 숭실대 노래패 학생들이랑 모여서 1990년부터 준비를 했어요. 처음에 만들 땐 사무실이 없고, 노랑다리 우리집에서 먹고 자고 같이 이야기하면서 만들었어요. 사무실은 나중에 주안에 얻었어요. 인천에서 투쟁하는 공장이면 다 찾아다니면서 강의하고 노래 부르고 교육하고 그런 활동을 주로 했어요.

Q. 인천에서 활동하실 때 노동자와 함께 활동했던 것들도 좀 이야기해주세요.
A. 투쟁이 활발했던 소규모 사업장에 다니던 노래를 좋아하던 친구들이 있는데, 자기 사업장에서는 노래를 못하니까 인천지역 노동자 노래패를 만들었어요. 그게 89년부터 하나로 굴러가는 모임이 있는데, 이 사람들도 결국 먹고 살아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노래가 좋아서 노동자노래패까지 왔지만 먹고 살기 위해서 말도 안하고 사라지곤 했어요. 모임에 안 나타나면 그냥 사라지는 거에요.

​그 당시에 전화가 있어요, 삐삐가 있어요. 약속 날짜를 잡으면 빠지지 않고 오는 거죠. 나이가 많아야 스물 세넷 정도 되는 친구들이 그냥 모이면 밤을 새고 안 가는거죠. 농성장에 가서 밤새거나 하면서요. 대기업들은 회사가 없어지지 않으니까 노래패들이 계속 남지만 소규모 사업장 노동자들은 아무리 내가 노래가 좋고 노동자들의 연대에 가서 활동하는게 너무 좋아도 ‘내가 뭐 먹고 살지?’하는 순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사라지는거에요. 지금 어디에서 뭘하고 사는지는 모르지만, 주체적으로 살아봤던 그런 경험들이 있어서 다들 잘살고 있을거라고 생각해요.

Q. 부평엔 GM도 있는데, 그곳 이야기도 들려주세요.
A. GM은 그전에 대우자동차였죠. 대우자동차나 대우중공업, 대우전자. 그러고보니 다 대우네 하하하. 이렇게 큰 회사에는 노래패가 만들어지면 나 같은 전문적인 사람이 가서 노래하는 법도 가르키고 노래도 전달해주고 또 학습도 했어요.

두산으로 넘어간 대우중공업 노래패는 활동을 하는 것 같진 않아요. 가끔 지역 노래패 연대모임에 나오곤 했었는데, 요즘엔 거의 안 보이는 것 같아요. 대우자동차는 자체적으로 노래패를 하지만 지역 노래패 활동도 열심히 해요. 최근 국민건강보험공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할 때 원주까지 가서 공연도 하고요. 암튼 다들 열심히 사는 것 같아요.

Q. 부평은 선배님에게 굉장히 큰 의미가 있는 곳이겠습니다.
A. 부평에서 살았던 시간은 내 인생에서 정말 불꽃같이 타올랐던 시간이었고, 벽을 깨는 시간이었요. 인식을 깨고...어떤 사람들에 대해서 존중하게 되는 계기, 그래서 지금까지도 민중 가수 생활을 할 수 있는 힘이 되는 그런 곳이었던 것 같아요.

Q.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A. 음대 친구들이 저한테 “너는 어떻게 그 시커먼 사람들한테 가서 노래할 마음이 나니?” 라고 물어요. 90년대 초중반까지 공장 노동자들은 사회적으로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하다 보니 밖에서 봤을 때, 노동자는 항상 피로하고 기계의 기름, 먼지에 쌓여 있는 더러운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거든요. 만나기 전에는 저 사람들은 이렇게 하층이야 이렇게 접근하지만 가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아요. 노동자들은 정말 열심히 살아요. 아빠찬스 엄마찬스 없이 열일곱 살부터 공장에 다니면서 자기가 돈을 벌어서 자기가 생활을 영위하는... 또 누가 어려운 일이 있으면 기꺼이 돕는 노동자들이 참 많아요. 그런 노동자들하고 만나서 해방감을 얻었다고나 할까요.

그런 경험이 있어서 거리에서 남루한 사람을 만나도 아무런 두려움이 없어요. 그냥 저 사람이 지금 당장 돈이 없어서 목욕하지 못하고 씻지 못해서 저렇게 더러운 거지 내가 피할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죠. 부평에서 만난 노동자들과의 경험이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편견을 깨게 했고, 누구를 만나도 다른 사람을 존중해주고 싶고 존중해줘야 된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이 존중받지 못하는 것은 이 시스템이 잘못됐기 때문인 거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구요.

Q. 이제 노래이야기를 할 수 있겠네요. 최도은 하면 불나비, 불나비 하면 최도은. 대표곡이 불나비로 알려져 있어요. 불나비에 대한 이야기도 좀 부탁드려요.
A. 솔직히 불나비만 부르라고 하니까 다른 걸 부를 기회가 없어요. 하하하. 불나비는 지금도 누가 만들었는지 아직도 몰라요. 그런데 나는 어쨌든 불나비가 되게 좋았어요. 내 친구 이은정이라고.. 친구가 1986년에 이걸 부르는데, 그때 꽂혔어요. 걔는 어떻게 불렀냐면 ‘친구야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계속 ‘가자’를 지가 하고 싶을 때까지 계속 불러요. 요즘으로 치면 랩인데 나도 걔처럼 막 이렇게 불렀죠. 그러다가 이제 인천에 갔는데 많은 노래를 불러도 불나비를 부를 때 반응이 제일 좋았어요. 인천에서부터 불나비를 부를 때는 ‘친구야 가자 가자’로 두 번으로 정리해 불렀어요. 맨날 진짜 집회에서 늘 불나비를 불렀어요.

​불나비 노래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전태일 열사가 돌아가신 평화시장에서 9살부터 일한 노동자였던 영미언니라고 있어요. 영미언니 말로는 평화시장 다닐 때 불렀다고 그러시더라고요. 근데 나한테 언니가 그러는 거에요. 불나비 가사에서 ‘하얀 꽃들을 수레에 싣고’ 부분의 하얀 꽃이 뭔 줄 아냐고. 나는 뭐 국화 백합 뭐 이렇게 대답했더니, 그 당시에 여공들이 수레 가득 옷감을 싣고 가다 보면, 평화시장 그 좁은 통로를 지나갈 때 옷감이 꽃처럼 보여서 자기들은 그렇게 불렀다라고 하더라구요.

불나비를 부를 때 반응이 제일 좋아요. 그러니까, 불나비를 안 부를 수가 없죠. 그게 고음을 지르는 그거에서 해방감을 좀 보시는 것 같아요. 96년인가 97년인가, 여의도에 10만 명 정도가 모여 있는데 불나비를 부르면 막 다 춤을 추면서 그걸 함께 불렀어요.

Q. 불나비 말고 선배님이 자주 부르시는 노래가 있나요?
A. 혁명의 투혼이라는 노래가 있어요. 혁명의 투혼은 1990년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선거에 나온 팀에서 선거운동가로 만든 노래에요. 노래를 들었는데 뭔가 딱 와 닿더라구요. 그 노래를 2천년에 “도은아 추운데 노래나 하자”라고 콘서트 할 때 불렀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십 년째 부르고 있어요. 가사가 좋아요. ‘일어서라 그대여 투쟁하라 그대여 혁명의 투혼으로 세계를 번혁하라’ 이 불평등의 세상에 딱 맞는 노래인 것 같아요. 노래라는 게 만든 사람은 그런 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는데, 그 노래가 가슴에 와 닿으면 가수가 선택해서 부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Q. 앞으로도 인천에서 계속 활동할 계획이 있나요?
A. GM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농성하고 그럴 때도, 2019년에 합의한 콜트악기 투쟁에도 가서 노래를 부르고 그렇게 꾸준히 활동을 해왔어요. 티비에도 나오지 않고 신문에도 실리지 않으니까 알려지지 않지만 노동자들이 투쟁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고 있어요.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거에요.

인터뷰, 사진, 정리 : 단풍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사업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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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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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아님의 블로그에 합류하게 된 丹風입니다.
민중가요 연구자로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으면서, 동네문화기획자로도 활동중입니다.
튀르키예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안경사입니다.
2022/06/18 14:45 2022/06/18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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