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기억하며 현재를 노래하는 노래벗, 손은화

문화도시부평과 함께하는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중가수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인터뷰 운영은 국내 최대 사이트 PLSong.com의 운영자 ‘단풍’이 참여했다.

4회는 ‘노래벗’의 대표 손은화님이 참여해주셨다.

현재 알려진 민중가요 노래패 가운데 화제성이 높은 ‘노래벗’의 대표 손은화를 만나보았다. ‘노래벗’은 민중가요계에서 오랫동안 활동해 왔던 선배 가수들이 모여 만든 노래패로 창단한지 5년 정도 되었으나,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노래패이다. 매년 광주민주화운동 기념행사 가운데 하나인 ‘상설음악회 오월의 노래’ 무대를 중심으로 여러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노래벗’은 2021년 ‘1991년 열사투쟁 30주년 기념 온라인 콘서트: 노래는 영혼을 위로한다’로 민중가요계에서 화제를 낳은 바 있다.

Q.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노래패라고 여기저기 소문이 많이 났습니다. 본인 소개 먼저 부탁드립니다.
A. 그대의 ‘노래벗’ 대표 손은화입니다. 반갑습니다. 만들어진 지 5년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노래패네요. 다른 노래패가 생겨서 가장 최근 노래패라는 딱지를 뗐으면 좋겠네요.

Q. 대표님은 인천에서 오랫동안 살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원래 인천 출신은 아니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인천에 오셨나요?
A. 2005년 4월부터 인천에서 살기 시작했으니까, 거의 20년째 살고 있습니다. 원래 부산에서 청년운동, 노동운동을 하고 있다가, 2004년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이 결성되고 처음으로 전국총파업을 진행할 때 서울에 올라왔어요. 그때 공무원노조에서 일하면서 서울에 임시 거처에 있다가 인천으로 완전히 옮기면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서구에 있었는데 부평 삼산동으로 이사 온 것이 대략 10년쯤 된 것 같아요.

Q. 대표님의 음악에 관한 개인적인 역사를 좀 알고 싶습니다.
A. 처음 음악을 접한 것은 열 살 때, 그러니까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 합창단 활동을 한 것이었어요. 첼로도 배웠는데 그게 열세 살 때였습니다. 당시로서는 재능이 조금 있었던 것 같아요. 학교 대표로 도 대회에서 입상하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예술고 진학을 준비했는데, 집안 사정이 어려워서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고등학교 때가 제 인생에서 유일하게 음악과 멀어졌던 때인 것 같아요. 대학에 입학한 뒤 대학가요제에 나가고 싶어서 통기타 동아리 앞을 매일 서성이는데, 그 동아리가 한 달 동안 문을 열지 않았어요. 통기타 동아리 바로 옆이 농촌문제를 연구하는 써클(농동아리)이었는데 기타 치면서 민중가요를 하루종일 노래를 부르던 동아리였어요. 그때 우리 학교는 노래패가 없었고, 농동아리가 유일하게 민중가요를 부르는 동아리였어요. 들어가고 싶은 통기타 동아리는 문을 안 열지, 옆에 있는 동아리는 처음 들어봤지만 어쨌든 매일 노래를 부르잖아요.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 자체가 너무 좋았거든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대학가요제는 포기했어요.(웃음)

Q. 민중가요 때문에 대학가요제를 포기했다고요?
A. 민중가요 때문은 아니고, 학생운동을 하게 되면서 접었습니다. 제가 1990년에 대학에 입학했는데, 그때가 학생운동이 한창이고 임수경이 방북한 다음 해라 대학가가 많이 시끄럽기도 했고 1991년은 강경대 열사로 시작된 열사정국이었습니다. 또 한창 농산물 수입과 관련해서 우루과이라운드 투쟁이 한창이었는데, 농동아리다보니 아무래도 더 많은 관심을 갖고 활동을 하게 되었죠. 학교 내에서 등록금 투쟁을 비롯한 여러 투쟁들에 관여하게 되었어요. 그러다보니 전국 대학교들에 있는 농동아리 관련 책임자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Q. 학생운동을 열심히 하시다 대학가요제만이 아니라 음악 자체를 못하시게 된 건가요?
A. 아니오. 그렇진 않아요.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했던 것 때문에 악보만 보고 노래를 부를 수 있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다른 노래패하는 친구들보다 노래도 더 많이 알고 있고 그러다보니 교류가 많았죠. 나중에 학교에 노래패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학생운동을 좀 오래, 그러니까 9년 정도 해서 사회에 진출을 좀 늦게 한 편인데요. 본격적으로 문예활동을 시작한 것은 사회에 나와 청년운동을 하면서부터입니다. 부산지역 청년운동에서 문화관련 활동을 하면서 여러 활동을 했는데, 그중에 하나가 부산지역 청년 노래 모임을 만든 것이었어요. 이게 나중에 ‘사람들’이라는 노래패로 발전했죠. 그거 좀 더 발전하다 보니까 노래패가 여러 개 만들어졌고, 노동운동 쪽에서도 노래패가 만들어지고 그랬습니다. 당시에 부산은 문화의 불모지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여러 문화 활동들을 만든 것은 지금까지도 자부심으로 남아있습니다. 노동운동을 시작할 때까지 계속 청년운동에서 문화 활동을 했습니다.

Q. 공무원노조가 생기면서 노동을 시작하시게 된 건가요? 공무원 노래패 활동도 함께 하신건가요?
A. 2003년 공무원노조 부산본부에서 시작해 2004년 총파업 때문에 서울로 상경했다가 계속 노동운동에 있게 되었습니다. 공무원노조에서도 문화 활동 담당자로 일했습니다만, 제가 직접 노래패로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은 안됐어요, 노동조합에서 실무자로 일하면서 직접 문화활동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노동조합이 여는 집회나 행사, 문화제 같은 것들을 기획하고 실무를 담당해야 했습니다. 물론 공무원 노래패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나, 공연하는 무대나 하는 것에 관련이 있고 지원도 하지만 제가 직접 노래를 부른다거나 하진 않았어요. 술자리에서 농담으로 15년 동안 노래 한 자락 부르지 못했다고 이야기하죠.

Q. 그렇게 오랫동안 노래를 부르지 않다가 ‘노래벗’을 만들었습니다. 그 이유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A. 한 10년 전부터 건강이 무척 안 좋아졌어요. 건강 때문에 3년 정도 생계유지조차 어려운 상황에서 삶이란 무엇인가? 내 삶은 무엇인가? 라는 문제를 깊이 고민하게 되면서 생각의 전환이 되는 계기가 됐어요. 그때, ‘내가 제일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 ‘내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노래를 다시 시작해야겠다.’였습니다. 마침, 저 말고도 오랫동안 노래활동을 쉬고 있던 몇몇을 만나게 됐고, 뭘 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뭔가 만들면 재밌겠다는 막연한 생각정도였어요. 그러다 우리끼리 제주도 한 번 놀러가자고 의기투합이 돼서 2018년 2월초에 저랑 여명이(신여명, 본명 정영훈)형, 똑(본명 박명희) 세 명이 2박 3일 일정으로 제주로 여행을 갔는데,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폭설이 내렸어요. 사려니숲 주차장에서 3시간을 폭설에 갖혀 있다 겨우 숙소로 돌아왔는데 그 고생을 했는데도 서로 얼굴만 봐도 좋았어요.(웃음) 술 한잔 하면서 여명이 형이 곡을 쓰고, 저랑 똑이랑 같이 가사를 붙이다 보니 30분 만에 곡이 완성 됐죠. 그 노래가 우리 첫 노래인 “니가 참 좋다”에요. 그런 제주여행을 마치고 나서 아무래도 그냥은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3월경에 노래패로 만들어보자고 연락을 했더니 한 명도 빠짐없이 1초 만에 ‘그럽시다’ 해서 만들게 됐어요. 처음엔 여명이형이랑 똑이, 그리고 김목사(본명 김창현)까지 네 명이서 결성하게 되었죠. 3월에 결성하고 5월에 광주 ‘오월의 노래’에서 첫 공연을 했어요. 그러다 지금은 김목사가 나가고 이근철 선배가 들어와 구성원이 됐습니다.

Q. 결성과정이 드라마틱하네요. 구성원 소개도 간단하게 부탁드립니다.
A. 여명이형은 지금은 서울에서 가극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희망새가 부산에서 활동하던 시절 가수면서 작곡자였습니다. 민중가요계 대선배인 박종화 선배의 음반 프로듀서로도 활동했었습니다. ‘노래벗’의 음악감독으로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똑이는 박종화 선배의 노래 가운데 유명한 “파랑새”를 1991년부터 불렀던 가수입니다. “파랑새”는 여러 가수가 불렀는데, 지금 박종화 선배가 최근에 만드는 여러 음반에는 모두 똑이의 목소리로 들어가 있습니다. 이근철 선배는 박종화 선배 노래 가운데, “갈 길은 간다”라는 노래를 불렀던 분이기도 하고요. 저는 부산지역 청년회에서 문화 담당을 하면서 부신지역 청년 노래패를 만들기도 하다가. 노동운동을 하면서부터 노래보다는 문화기획자로 활동을 꾸준히 해왔어요. 그리고, 지금은 나갔지만 김창현은 부산경남지역총학생회연합 노래단 ‘좋은 친구’ 가수 출신이구요. 저 빼고 여명이형, 똑이, 이근철 선배는 모두 조선대학교 노래패 함성 출신이기도 하고, 통일노래한마당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근철 선배는 1988년 통일노래한마당에서 “통일의 나라로 가자”라는 노래로 대상을 받은 분이고, 똑이와 여명이형은 3회 통일노래한마당에서 “다시 살아 만나리 통일조국”으로 백두상을 받았는데 이 곡을 여명이 형이 작곡했어요. 그리고 “남총련 찬가” 작곡가이기도 하지요. 우리 쪽에선 소위 박종화 사단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데, 제가 박종화 사단을 모두 빼온 거라고 할 수 있어요. (웃음)

Q. 다들 대단한 분들이 모이신 것 같습니다. ‘노래벗’은 어떻게 활동을 하고 있나요?
A. ‘노래벗’ 구성원 모두 직장인이기 때문에 노래공연 자체가 많진 않습니다. 공연섭외를 요청하실 경우 최소 한 달 전에는 연락을 주셔야 합니다. 저희는 정해두고 있는 고정 공연이 하나 있는데요. 매년 5월 광주에서 열리는 ‘상설음악회 오월의 노래’는 고정된 일정으로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노래벗’은 광주의 정신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팀 같다고... 뭐 그건 당연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노래벗’이 만들어지고 첫 공연이 ‘오월의 노래’이기도 했고요. 매년 초에 활동 계획을 세울 때, ‘상설음악회 오월의 노래’를 가장 먼저 정하고 2월부터 공연준비에 들어갑니다. 또, 공연의 성격이나 구성원의 사정에 따라 공연을 ‘노래벗’의 이름으로 하기도 하고, 구성원 개인 가수로 공연하기도 해요. 공연의 성격과 내용에 따라 단체 공연보다 개인 가수 공연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되면 그렇게 진행하기도 합니다. 개인 가수 공연일 때엔 ‘노래벗’의 이름이 아닌 개인 가수 이름의 공연이죠. 하지만, 개인 가수 이름의 공연도 ‘노래벗’의 활동이라고 단원들은 생각합니다. 개인공연의 선곡 또한 대표인 저의 판단을 믿고 따라주고 있습니다. 참 고맙죠.

Q. ‘노래벗’의 활동 가운데 가장 화제가 된 것이 “노래는 영혼을 위로한다”는 유튜브 공연인 것 같습니다. 1991년 열사투쟁 30주년 추모공연이라고 하던데요. 설명을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A. ‘올해가 1991년 열사투쟁 30주년인데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하고 제가 화두를 던졌어요. 1991년 열사정국이라 불렸던 상황을 온 몸으로 겪은 사람들이라서 저의 말이 아니었어도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1991년 당시 박승희 열사 노제가 금남로에서 진행되었는데 추모곡을 여명이형이 만들고 똑이가 노래를 했습니다. 제목이 “너의 가슴에 불을 품고”입니다. 이런 깊은 인연이 있어요. 저희가 매년 5월에 열리는 ‘오월의 노래’ 공연이 끝나면 공연을 몇 주 쉬는데, 2021년엔 제주 삼달다방으로 갔죠. 그때 요즘 휴대폰도 화질이 좋으니까 노래 몇 곡 찍어서 유튜브에 올리면 어떨까 싶었던 거죠. 그 자리에서 선곡을 하고 음향 놓고 휴대폰으로 찍기 시작했죠. 영상 일하는 90학번 동기가 편집을 맡고 추가 촬영을 하기도 해서 35분짜리 영상을 완성해서 올리게 됐어요.

Q. 노래 목록을 보니 못 보던 노래가 있어요. “30년이 흐른 뒤”라는 노래입니다. 창작곡인가요?
A. 그 노래는 우리 창작곡이 맞아요. 우리가 모두 30년 지기들이니까, 이번에 녹음을 하면서 30년 전 그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면서 감정이 북받쳐 올랐어요. 제가 제일 많이 울기도 했어요. 영상에는 30년 전 우리 모습들을 사진으로 넣었죠. 유튜브에 올린 영상을 보고 고맙다는 인사를 많이 받았어요. 다들 우리 또래들이다 보니 감성들이 비슷하다 보니 많이들 공감해 줬던 것 같아요.

Q. 좀 화제를 돌려 보겠습니다. 대표님이 인천에서 오랫동안 살아오셨는데, ‘노래벗’의 인천활동이 좀 적은 건 아닙니까?
A. 모두 직장을 가지고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활동하는 횟수 자체가 좀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최소한 한 달 전에는 연락을 줘야 가수들 개인 일정을 조율해서 공연을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구성 초기에는 잘 알려지지 않기도 한 것은 맞지만, 인천에서 활동이 적은 것이 아니라 코로나가 결정적이었어요. 민주노총 인천본부 집회 등 공연을 인천에서 여러 차례 준비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계속 취소됐습니다. 그러다 코로나로 인한 제한이 풀린 2022년 6월 4일 인천에서 열린 통일행사에서 오랜만의 공연을 했어요. 하지만, ‘노래벗’이 아닌 개인 가수의 공연으로 진행했습니다. 공연의 성격상 개인 가수 공연이 적합하다고 판단했거든요. 앞에서 말했다시피 단원들은 당연히 ‘노래벗’의 활동이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엔 개인 가수라고 생각할 수 있어서 ‘노래벗’의 활동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저희가 아직 앨범이 없어서인지 모르는 분들도 많습니다. 아무래도 앨범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좀 있으니까요. 인천에서 시민사회단체 행사 등에 많이 참여하고 있는데 만나보면 다들 ‘노래벗’을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Q.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활동계획이 있으시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저희가 2년 전에 3개 도시 콘서트를 추진하다 코로나로 무산된 적이 있습니다. 올해부터 다시 차근차근 준비해 내년엔 전국콘서트를 준비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노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음반도 내년에는 내려고 합니다. 앞으로 열심히 활동하는 ‘노래벗’ 잘 부탁드립니다.

인터뷰, 사진, 정리 : 단풍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센터

이 글은 부평구문화재단 블로그에도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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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가요 연구자, 문화기획자, 튀르키예를 애정하는 안경사
2022/10/06 11:39 2022/10/06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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