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인천 민중가요를 이끌었던 아름다운 청년, 최경숙

문화도시부평과 함께하는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중가수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인터뷰 운영은 국내 최대 사이트 PLSong.com의 운영자 ‘단풍’이 참여했다.

6회는 ‘아름다운 청년’의 최경숙님이 참여해주셨다.

80년대가 지나고서 민중가요는 더 이상 불리지 않았다는 인식이 많았지만, 2000년에 결성되어 10년 동안 매 년 수백회의 공연을 소화했던 노래패가 있었다. 바로 인천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아름다운 청년>이다. <아름다운 청년>은 2000년 6.15공동선언으로부터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 이르기까지 남과 북의 정상들이 만나 해빙무드가 무르익고 통일에 대한 희망들이 가득찼던 시기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노래패이다. 그래서인지 <아름다운 청년>의 노래들은 강한 생명력으로 현재도 많이 불린다. 대표였던 최경숙 씨를 만나 <아름다운 청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Q. 아름다운 청년(아청)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합니다.
A. 인천 시민문화센터 음악위원회에 휘파람이라는 직장인 노래패가 있었어요. 휘파람에는 대부분 대학생 때 노래패 활동을 했던, 소위 인천 지역 대학에서 노래 쫌 한다는 사람들이 다 모여 활동을 했어요. 휘파람이 동아리 형식이었지만, 노동현장이나 미군기지반환운동, 수돗물 불소화 운동 같은 지역 현안이 있을 때마다 적극적으로 활동했어요. 휘파람 구성원 가운데서도 전업으로 노래활동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저 같은 경우에는 소위 민중가요에 드문 피아노 전공자여서 전업으로 활동하는 전문노래패를 만들자하는 기대가 더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전업으로 활동하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기 때문에 프로젝트 음반 형식으로 시작했습니다. 음반을 만들기 위해 사람들이 모이는 형식을 취한거죠. 대부분의 곡을 제가 작사 작곡을 했고, 당시 인천지역에 있는 노래패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했습니다. 제 기억에는 가톨릭청년연대 노래패 사람들도 함께 했었고, 일반 시민 가운데서도 함께한 분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1집 당시에는 멤버가 정확하다고 할 수 없었어요. 가수로 참여한 사람만해도 10명이 넘었고 세션으로 참여한 사람부터 음반을 예약해 준 1,500여 시민까지 모두 함께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1999년에 음반을 준비해서 2000년 1월경에 음반이 나왔고 3월경에 첫 공연을 했어요. 그렇게 음반이 나오고 아청이라는 이름으로 공연을 다녔는데, 공연이란게 낮에도 있고 주말에도 있고 그렇잖아요? 공연을 다니다보니 음반을 녹음했던 분들과는 다르게 공연 멤버가 정해지게 됐어요. 대략 2000년 7월경에 그때쯤 노래패 구성원이 어느 정도 구성되어 전업활동을 시작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Q. 1집 음반은 프로젝트 음반답게 다양한 주제로 다양한 음악을 이용한 음악들인 것 같습니다.
A. 1집 음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시도를 한 음반이라고 볼 수 있어요. 아청 음반을 작업할 때 작곡가로서 출정가 같은 스타일의 노래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좀 했었습니다. 90년대 중반 이후 조국과청춘(서총련 노래단)의 5집과 6집 나오면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했고, 집회에서도 이미 당시 학생들은 처음처럼 같은 춤추는 음악을 좋아하던 때였어요. 다양한 음악의 노래를 만드는 것이 1집의 의도였기 때문에 랩이 들어가는 ‘우주인’이라는 노래도 있었고 락 발라드 형식의 ‘이 노래를 기억해요’라는 노래도 있는 등 정말 다양한 노래들을 담으려고 노력했어요.

Q. 1집으로 활동을 시작하시고 1년이 지난 2001년에 <유월의 약속>이라는 음반을 냈습니다. 특이한 점은 1집을 CD와 카세트 테잎 모두 발매했는데, 음반 <유월의 약속>은 카세트 테잎으로만 냈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A.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이 있은지 일주일도 안돼서 ‘유월의 약속’이라는 곡을 썼는데, 이 노래가 보급곡처럼 널리 퍼졌어요. 사람들이 6.15선언에 대한 노래를 찾을 때 우리가 시의적절하게 곡을 낸 거죠. 당시엔 인터넷이 활발하던 시절이 아니니까 음원보다 악보가 먼저 퍼졌어요. 악보만 보고 노래를 부르다보니 다양한 버전의 ‘유월의 약속’이 생산된거죠. 아청이 공연을 다녔지만, 그보다 악보가 빨리 퍼져서 심지어 작자 미상으로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서 급하게 통일과 관련된 노래들을 담아 만든 음반이 <유월의 약속>입니다. 카세트 테잎만으로 낸 이유는 2000년 당시만해도 CD는 약간 귀하고, 카세트 테잎을 아직 많이 듣던 시절이기도 했고, 음반 예산도 많지 않기도 하고 해서 그냥 카세트 테잎만으로 작업을 한거죠. 다양한 음악을 담으려던 1집을 내고 전문노래패로 활동하다 보니까 6.15남북공동선언 이후 통일국면이어서 통일노래에 대한 수요가 많았어요. 1집엔 통일 노래가 한 곡밖에 없었거든요. 음반을 내기보다는 일단 통일노래를 먼저 만들어서 활동을 하고 음반 <유월의 약속>은 그 노래들을 모아낸 것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아요.

Q. <유월의 약속>이라는 음반 안에 있는 ‘유월의 약속’이라는 곡이 인기가 굉장히 많았어요. 예전 피엘송 홈페이지 댓글을 보면, 이 노래를 너무 많이 불러서 선배가 금지곡으로 지정할 정도였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인기가 많았던 이유가 뭘까요?
A. 잘 모르겠어요. 이 노래가 6.15남북공동선언 일주일 만에 아청활동 하던 친구가 가사를 쓰고, 제가 곡을 쓰고 악보를 그려서 내보냈는데, 나도 모르게 전국으로 퍼졌어요. 굳이 생각해보자면, 당시 6.15선언 이후 남북교류가 시작되면서 금강산 관광도 할 수 있었죠. 2004년에는 아리랑 축전에 참가하기도 하는 등 통일 분위기가 상승세가 있었던 것이 한 요인이라 할 수 있겠죠. 그리고, 노래의 형태나 가사의 내용이 쉬워서 대중적으로 함께 부르기 좋았던 것 때문인 것 같아요.

Q. 아청의 세 번째 음반은 <당신과 함께라면 할 수 있어요>죠. 이 음반은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의해 중학생이었던 효순이 미선이가 압사했던 사건(효순이미선이사건)과 관련된 음반처럼 보입니다.
A. 당시 효순이미선이사건도 있었고, 2000년에 창당된 민주노동당에 지역운동이 결합하면서 마을활동과 지역활동이 활발해지던 시기였어요. ‘당신과 함께라면 할 수 있어요’라는 말은 광의적으로 뭐든지 할 수 있다.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이 많았던 때의 음반이에요.

Q. 효순이미선이사건에 관한 노래 이야기를 조금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A. ‘꺽여진 두 송이 꽃’은 후배가 곡을 써서 저에게 가사를 부탁해서 만든 노래에요. 효순이미선이사건 관련한 투쟁이 한창일 때 노래를 만들어서 부르고 다녔어요.

Q. 같은 음반에 실려 있는 노래 가운데 ‘평화를 원해’라는 노래는 진정성 있게 다가와 저도 굉장히 감동했던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어떻게 만들어진 노래인가요?
A. 2003년에 일어난 이라크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노래로 만든 노래에요. 이 노래는 저에게 되게 의미 있는 노래인데, 인천평화창작가요제를 탄생시킨 노래에요. 그것도 필요성 때문에요.

Q. 어떤 의미인거죠?
A. 예전 피엘송 홈페이지에 올라간 우리 노래들을 누가 듣고 있는지 궁금해서 살펴보곤 했는데, 평화를 원해라는 노래의 조회수가 갑자기 늘어났어요. 응? 뭐지? 하고 살펴보니까 댓글도 엄청 달려 있는데, 초등학생들의 댓글이었어요. 학교 수업에서 이 노래를 들었는데 너무 좋았다 이런 내용들이었죠. 학교에서 평화교육을 할 때 이 노래를 피엘송에서 같이 들었던거고, 아이들이 궁금해서 또 피엘송에 들어와서 보고 그러다보니 조회수가 확 늘어난거죠. 그래서 ‘아니 평화노래가 그렇게 없나?’ 싶어서 찾아보니까 한국에 평화노래가 없는거에요. 그러다 평화바람이라는 합창단을 만들었는데, 합창단 이름에 맞게 평화노래를 하려고 해도 평화노래들이 너무 없는거죠. 그러면 가요제를 만들어서 상금을 걸면 많은 뮤지션이 평화노래를 쓰지 않을까? 이게 시작이었어요. 피엘송이 의미있는 지표를 준거에요.

Q. 그런 일이 있었군요. 피엘송 운영자로서 너무 뿌듯합니다. 2005년에 발표한 <바로 당신이었죠> 음반에 대한 이야기도 부탁드릴게요.
A. 아청의 마지막 음반입니다. 프로젝트 음반으로 많은 준비를 했던 1집과는 다르게, 2집과 3집은 아청이 활동하면서 불렀던 노래들을 다듬어진 노래들을 모아 발표한 것이었어요. 이전 음반들은 제가 작사, 작곡, 편곡을 하고 연주까지 아청 스스로 거의 대부분을 해냈다면, 이원경 선배님께 편곡을 맡기고 연주 세션을 섭외하여 공들여 작업한 음반이었습니다. 대중이 듣기 친숙한 음악이라는 아청의 음악적 색깔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서 만든 음반이에요. 아청은 인천을 기반으로 한 노래패였고, 공연의 3분의 1정도가 인천지역의 주민을 만나서 하는 공연들이었기 때문에, 투쟁이나 혁명 같은 단어들이 거의 없어요. 4집에 포함된 노래들 가운데 ‘아리랑’이라는 노래를 빼면, 좀 부드럽고 아름다운 가사들로 만들어졌어요. 통일이나 투쟁같은 이야기를 이전에는 직설적으로 표현했다면, 4집에서는 다른 표현들을 사용한거죠. 굳이 말하자면, 1집과 4집이 아청스러운 음반이고 2집과 3집은 현장 대응용 음반으로 생각해요.

Q. 인천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셨지만, 전국적으로 인기가 있는 노래패였습니다. 활동 당시 경제적으로는 좀 어땠나요?
A. 당시 공연리스트가 모두 남아있지는 않지만, 일정의 3분의 1정도가 인천이었고 전국적으로 공연을 많이 다녔습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그렇게 좋진 않았어요. 제 기억에는 2003년, 2004년이 가장 공연이 많았던 해였지만, 지방공연이라고 해도 100만원 이상 공연비를 받는 경우가 드물었거든요. 지방공연비로 100만원을 받는다 해도 교통비 등 경비를 제외하면 실제 수익은 거의 없었어요. 게다가 공연비를 못 받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당시엔 공연당일 현금으로 공연비를 받는 것이 관례였는데, 당일은커녕 미수금 독촉을 해도 끝내 못 받은 곳이 많았어요. 그래서 4~50만원 정도 월 활동비를 받곤 해서, 좀 고민이 많았어요. 그럼에도 좋아하는 음악으로 사람을 만나고 무대에 서는 즐거움이 있었기에 노래패 활동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함께 노래하면 세상이 바뀔 것 같은 그런 기분들이 있으니 공연을 다니는 것이 하나도 힘들지 않고 재밌게 다녔던 것 같습니다.


Ⓒ보건의료노조

Q. 아청의 활동은 언제까지 이뤄졌나요?
A. 아청은 원래 인천시민문화예술센터(시민센터)에 속해 있던 노래패였습니다. 시민센터에는 아청 뿐만 아니라 미술패, 영상패 등 전문적으로 문화예술활동을 하는 사람이 15명 정도가 모여 있었습니다. 전국적으로 활발해지는 민중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새로운 예술단체인 ‘새시대예술연합’이 준비되고 있었는데, 아청도 새시대예술연합에 합류할 것인지에 대해 2004년부터 거의 2년 동안의 논의를 거쳐 서울로 활동근거지를 옮겨 2005년 새시대예술연합에 합류하였습니다. 아청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니지만, 소속단체가 시민센터에서 새시대예술연합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저는 시민센터에서 사무처장 역할을 병행하고 있었고, 문화바람(생활문화예술기획단체)의 사업이 확장되면서 합류하지 못했었죠. 당시 아청 구성원 가운데 저를 제외한 모든 인원이 서울로 옮겨갔다가, 다들 이런 저런 사정으로 아청 활동을 그만두게 되면서 인천의 아청은 2011년 이후 자연스럽게 해산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Q. 아청 출신의 가수도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A. 먼저 솔로가수로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이수진이 있습니다. 2008년에 1집을 내고 2013년에 2집을 냈어요. 촛불광장에서나 투쟁현장에서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업으로 활동하는 곳은 아니지만, 전교조 인천 노래패 ‘파란’에서 활동했던 정영숙씨가 아청에 함께했었습니다. 정영숙씨는 앞서 말했던 ‘유월의 약속’을 작사하기도 했었구요. 현대자동차 판매지부 노래패 활동을 하는 이창선 형도 아청 1집에서 같이 활동했었습니다.

Q. 아청 이후 인천지역에는 전문노래패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A. 저는 민중가요의 형태가 달라졌다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투쟁하는 현장이 명확하게 존재했고 활동하는 음악과 가수가 확실히 구분되어 있었다면, 2000년대 후반부터는 시간이 지날수록 노래의 주제나 활동 측면에서 대중가요와 민중가요의 구분 자체가 모호해졌다고 생각해요.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Q. 요즘엔 민중가요들을 요즘은 많이 부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A. 이제는 민중가요가 정신만 살아있는 것 같아요. 민중가요라는 게 결국엔 노래를 생산하고 불렀던 어떤 거대란 공동체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었는데, 공동체 자체가 많이 해체된 것 같아요. 민중가요라는게 결국 공동체를 노래하거나 공동체가 지향했던 사회를 노래했던 거라면, 지금도 그런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뮤지션들이 많다고 봅니다. 노래를 만드는 사람의 언어가 달라진거죠. 과거에 아청 음반의 ‘유월의 약속’을 만들 때의 마음과 지금의 내가 음악을 만드는 마음은 하나도 다르지 않아요. 그래서 난 지금 만드는 노래들고 민중가요라고 생각하면 민중가요가 맞아요. 그렇지만 지금 만드는 노래들을 굳이 민중가료하고 명명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감사합니다.

인터뷰, 사진, 정리 : 단풍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센터

이 글은 부평구문화재단 블로그에도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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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가요 연구자, 문화기획자, 튀르키예를 애정하는 안경사
2022/12/02 18:35 2022/12/02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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