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최초 노동자 노래패 노둣다리, 이주헌
문화도시부평과 함께하는 <민중가요 아카이브>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중가수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인터뷰 운영은 국내 최대 민중가요 아카이브 사이트 PLSong.com의 운영자 ‘단풍’이 참여했다.
7회는 ‘노둣다리’의 이주헌님이 참여해주셨다.
인천에서 처음 만들어진 노동자 노래패는 대우중공업 노동자 노래패 “노둣다리”이다. 1990년 결성된 노둣다리는 노동자 노래패의 불모지라고 불리던 인천에서 노동자 노래패의 맏형이었고, 1996년 인천지역 금속노동자노래패연합 ‘철의 노동자’ 결성과정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노둣다리의 결성할 때부터 함께 해온 현대두산인프라코어 노동자 이주헌 씨를 만나 노둣다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Q. 안녕하세요. 노둣다리라는 이름이 독특합니다. 어떤 이름인가요?
노둣돌과 징검다리의 합성어로 노둣다리라고 합니다. 노둣돌은 제주도에서 통용되는 순우리말로 말을 탈 때 쓰는 디딤석을 말합니다. 노둣돌을 하나씩 연결해 징검다리를 만들죠, 노동해방과 조국통일을 위해 작으나마 밑거름이 되고자 하는 바램으로 노래패 이름을 노둣다리라고 정했어요.
Q. 노래패는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노둣다리는 1990년에 만들어졌어요. 회사에서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적이 있었는데, 노제에서 추모가를 불렀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제가 최도은 씨에게 연락해서 몇몇이 노래를 배워서 노제에서 노래를 불렀어요. 당시 대우중공업에는 문화패는 “이심이”라고 풍물패만 있었고, 노래팬 없었거든요. 그런 일들이 있으면서 노래패가 만들어졌음 좋겠다는 의견이 많아졌고, 노래에 관심이 있던 2명을 주축으로 의기투합이 되어 8명으로 결성하게 됐습니다.
Q. 노래패는 주로 어떤 활동을 많이 했나요?
전국 집회 문선대활동을 많이 했었요. 주말이면 거의 집회나 행사들로 일정이 채워져 있었어요. 특히, 메이데이하고 11월에 있는 전태일열사계승 전국노동자대회는 1박 2일로 참여를 했어요. 금속연맹 창립총회 공연도 했고, 학생운동이 활발하던 시절엔 전국의 대학에 공연도 많이 다녔어요.
Q. 주말마다 집을 비우시면, 사모님과 관계가 어려우셨겠습니다.
우리 마누라는 지금도 그런 이야길 해요. 당신은 내가 필요할 땐 항상 집에 없었다고... 주말에 아이가 아프거나 그럴 때도 나는 항상 집회장에 있었으니까. 내가 없으니까 큰동서가 병원에 데려다주기도 하고... 엄청 타박을 많이 받았어요.
Q. 그런 어려움이 있는데도 노래패를 계속 하셨던 이유가 뭘까요?
해야만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어요. 우리의 활동이 세상을 바꾸는데 뭔가 힘이 될 것이라는 그런 생각 때문이죠. 사실, 잔업도 하고 특근도 해야 월급이 많아지는 구조이기 때문에 고민이 많았죠. 그래도 세상에 대한 고민,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Q. 세상은 잘 안 바뀌는 것 같아요.
세상은 여전히 똑같아요. 자본가들은 자기들 유리한대로 법을 바꿔가면서...
Q. 선배님은 노동운동을 오랫동안 하셨나봅니다.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84년이긴 했는데, 그땐 노동조합 활동이었지 노동운동이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저는 할당된 작업을 열심히 해서 빨리 마치는 스타일이었어요. 해야 할 일을 다 마쳤으니깐, 그러면 동료들하고 이야기하면서 노는거죠. 그런데, 관리자들은 그런게 싫었나봐요. 관리자가 작업장에 와보면 난 일을 마치고 동료들이랑 놀고 있는거죠. 그렇게 관리자들한테 찍혔어요. 그러다보니 관리자들이 이런저런 압박을 하는데, 회사에 반감이 생기는거죠. 자연스럽게 조합활동을 하게되더라구요.
Q. 5공화국 시절 노동운동이면 어려우셨을텐데요. 위험하진 않았나요?
전두환 정권시절에는 유인물을 뿌리다 걸리기만해도 다 해고됐었거든요. 1985년경에 회사에 유인물을 배포하다 걸렸어요. 더군다나 유인물을 중간에서 전달했거든요. 내가 중간책처럼 돼버렸어요. 그래서, 그때 정말 해고될 줄 알았는데 지금은 돌아가신 친구 작은아버지가 회사 임원으로 계셨어요. 그분 덕분에 해고되지는 않고 인천으로 쫓겨온 걸로 정리한거죠.
Q. 원래 인천에 계셨던 것이 아니었어요?
제가 철도차량사업소로 입사했었거든요. 지금은 회사이름이 로템으로 바뀐 곳입니다. 어쨌든 인천으로 쫓겨와 징계로 한 달 정직을 받았어요. 그런 다음엔 조합활동을 그만두고 조용히 있었는데, 소문이 났는지 나중엔 사람들이 찾아오고 해서 결국 노동조합활동을 같이 하게 되었죠.
Q. 여러 활동들 가운데 노래패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나요?
사실 제가 노래를 잘하는건 아니에요. 그냥 노래가 좋아해서 들어갔어요. 옛날엔 카세트 테잎으로 제작해서 노래들을 많이 들었잖아요? 그런 노래들을 듣다보니까 나도 노래를 불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노래에 대해선 잘 모르기도 하고 그래서 들어가게 된 거에요. 내가 노랠 잘 부르는 건 아니지만, 떼창(집단 노래)으로 하니까 또 노래가 괜찮습니다. 내가 못하는 부분은 옆 친구가 받쳐주기도 하고 그러니까... 그 덕에 노래패 활동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Q. 활동하시던 때 이야기 좀 부탁드려요.
1992년인가, 11월 전국노동자대회에서 공연하는데 금요일 저녁에 수원에 있는 성균관대학교에 모였어요. 모이자마자 노래 연습을 막 시키더라구요. 가사도 제대로 모르고 노래풍만 대충 아는 그런 노래들을 계속 연습하는거죠. 그렇게 밤새 노래연습하고 토요일에 서울로 향했어요. 서울 갈 땐 남자 여자 한 명씩 짝지어 줘요.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릴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한거죠. 검문에 걸리면 애인 사이라면서 애인끼리 서울에 놀러왔다고 적당히 둘러대라는 거죠. 그렇게 짝지어서 계속 북쪽으로 가는 전철을 타고 이동하는데, 그때 우린 서울 지리를 잘 몰랐거든요. 그래서 앞에서 이끄는대로 계속 가는데, 잘 모르긴 해도 정문으로 못 들어가고 후문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어딘지 모를 시장에서 뛰기 시작해서 한참을 뛰어가니까 갑자기 쇠파이프를 땅에 두드리는 소리가 막 나요. 사수대들이 딱 지키고 있더라구요.
Q. 그렇게 전국노동자대회 전야제에 도착하신거군요.
지금도 생각하니까 가슴이 쿵쿵 뛰면서 벅찬 감정이 생기네요. 그렇게 노래를 배우면서 무대위에 올라 노래를 하곤 했어요. 전야제는 보통 대학교에서 했는데, 보통 숙소로 학생식당 같은 곳을 썼죠. 11월이니까 날씨가 많이 추워서 박스를 깔고 잤어요. 그렇게 추웠어도 추운줄 몰랐죠. 지금 기억엔 그 곳에 고려대였어요.
Q. 노동자대회 본대회 무대에도 올라가신거죠?(당시엔 노동자대회 전날에 전야제를 하고, 노동자대회 당일을 본대회라고 불렀다)
네 본대회 무대도 올라갔어요. 그때 본대회에 모인 노동자가 5 만 명이었다고 들었어요. 무대에 올라서 노래를 하는데, 모여 있는 노동자가 정말 많았어요. 아, 이게 노동자구나. 나 혼자가 아니구나. 그런 생각이 들면서 엄청 벅차올랐죠.
Q. 그렇게 열심히 활동하신 동력이 무엇이었나요?
세상이 금방 바뀔 것 같았어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데, 사람들이 모이면 된다고들 했었고... 진짜 그땐 뭔가 바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많이 들었어요.
Q. 노둣다리 말고 다른 활동도 많이 하셨다면서요.
최도은 씨가 지도하던 노래패들이 많았는데, 그 노래패들을 모아서 연합을 만들어서 연합노래패 활동도 했었어요. 노동자대회 전야제에 가기 위해 짝지었던 여성 동지가 동일레나운 노래패였는데, 연합노래패 활동도 함께 했죠. 단체 문화선전활동을 하는데 기세가 대단했었어요. 그땐 모임이 있으면 웬지 가야하는 의무감 같은게 막 생겨서 참석을 많이 했었어요. 또 노학연대(노동자 학생 연대) 활동을 한다고 인천대, 인하대 학생들이랑 교류도 많이 했어요. 노둣다리 공연도 대학교에서 많이 했어요. 당시에는 공연할 장소를 구하기가 어려워서 학생회하고 연대하서 대학교에서 공연을 많이 했어요. 첫 공연은 인천대학교에서 했어요. 지금 있는 송도말고, 제물포에 있는 인천대학교죠. 이름은 기억이 안나는데, 언덕 위 맨 꼭대기에 있는 건물에서 공연을 했었어요. 그 뒤로는 인하대에서 주로 공연을 했어요. 대강당에서도 하고 소강당에서도 하고, 한 열 번 쯤 공연했던 것 같아요.
Q. 가족의 협조가 없으면 그렇게 길게 활동하기 힘들 것 같은데요?
노래패 구성원끼리 한 번 이야기가 있었어요. 우리끼리만 계속 하다보면 결국 노래패가 박살날 수 있으니, 와이프들이 같이 할 수 있게 하자. 노둣다리 부녀회 ‘부름’이라는 모임으로 와이프들끼리 모임을 따고 만들게 됐습니다. 부름은 수련회에도 참가하면서 함께하다, 5회 정기공연에서는 출연자로 함께 했습니다. 처음엔 남편들을 돕기 위해 만들어졌다가 1999년에는 부녀회 노래패 ‘부름’으로 정식 노래패가 됐죠.
Q. 노래패 활동을 포기하고 싶은 적은 없으신가요?
노래패 활동을 포기하고 싶은 적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진짜 그만두고 싶었던 적이 있었어요. 1997년인가 관리직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어요. 그때 노동조합 위원장 선거에서 현장조직 중심으로 선거를 치러서 현장조직 출신이 위원장이 됐었어요. 그래서 저에게 노조 조직실장 제안이 들어왔는데, 회사가 그걸 알고 현장관리직을 제안했어요. 만약 회사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노동조합 활동과 노래패를 그만 두어야 하는 상황인거에요. 고민도 없이 바로 거절했습니다. 그때 나 말고 대신 관리직으로 간 사람이 퇴직때까지 몇 십년을 그 자리에 있었어요. 그때 갔었어야 했는데... 하하하
Q. 가장 좋아하는 민중가요는 어떤 노래일까요?
‘영원한 노동자’라는 노래를 가장 애창하고 있습니다. 문대현 씨가 만들었고, 노래를 찾는 사람들 음반에 실리진 않았지만, 공연에서 불렸던 노래다. 노동자의 영원함을 표현한 곡이라고 생각합니다.
Q. 노둣다리가 1999년을 마지막으로 거의 해산된 것 같습니다. 해산된 이유가 있을까요?
자연스럽게 해산됐다고 보는 것이 맞아요. 노둣다리는 노동조합의 문선대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 노래패라는 자발성을 기초로 하였기 때문에 회비를 모아 활동하는 등 활동에 부담이 있는 점도 있긴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신입회원이 들어오질 않았어요. 회사가 현장직 신입사원을 채용을 안 했으니까요.
Q. 지금은 노래패와 관련해 어떤 활동들을 하고 계시나요?
옛날에 함께 했던 동지들과 가끔 모임을 갖기도 하고, 매년 열리는 인천노동문화제에 참가하는 정도가 다 인 것 같아요. 아직도 이런 저런 활동에 애정을 갖고 있지만, 예전만큼 열정적이지 않은 것도 사실이긴 해요. 그래도, 노동문화에 많은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 사진, 정리 : 단풍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센터
이 글은 부평구문화재단 블로그에도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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