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예수'의 종교 개혁 by 도아
예수가 한국 개신교도에 보내는 메시지
기본적으로 나는 기독경에 나오는 예수를 믿지 않는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난 신의 아들은 부정한다. 그러나 나는 예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폰티우스 필라투스(본디오 발라도)의 묵인하에 십자가를 지고 처형된 종교 개혁가 '인간 예수'는 존경한다. '인간 예수'는 기독교를 세계의 종교로 만든 사람이며, 그의 가르침에는 인류 보편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와 종교개혁
기본적으로 나는 기독경에 나오는 예수를 믿지 않는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난 신의 아들은 부정한다. 그러나 나는 예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폰티우스 필라투스(본디오 발라도)의 묵인하에 십자가를 지고 처형된 종교 개혁가 '인간 예수'는 존경한다[1]. '인간 예수'는 기독교를 세계의 종교로 만든 사람이며, 그의 가르침에는 인류 보편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어떤 근거를 가진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유대경(구약)과 기독경(신약)에 나타난 현상만으로 추정한 이야기일 뿐이다.
먼저 유대경의 야훼는 증오의 하느님이다. 사람을 삶아 죽이고 죄없는 이스라엘 백성 수천명을 단지 자신의 영광을 위하지 않았다고 죽인다. 유대경에 나타난 야훼의 모습에는 사랑을 느낄 수 없다. 기독교인들이 아무리 유대경의 사랑을 이야기 해도 나는 그 사랑을 믿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해로운 책에서 설명했지만 유대경에는 아이들이 보기에도 해로운 내용이 정말 많다. 또 야훼의 이런 모습은 유대인 스스로도 인정하는 것이며 야훼의 폭력성은 신부님도 인정[2]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기독경의 하느님은 유대경의 야훼와 같은 모습이 없다. 즉, '유대경의 하느님'이 증오의 하느님이었다면 기독경의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으로 바뀐다. 추정하기로 예수는 당시 유대를 떠돌던 수많은 설법자 중 한명이었을 것이다. 예수의 일생을 보면 출생은 불명이고 청년기 시절의 기록 또한 불명이다. 이렇기 때문에 예수가 인도에서 부처님의 설법을 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기독경에 나오는 사랑과 불경의 자비는 일맥상통[3]하기 때문에 전혀 황당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유대경의 야훼와 기독경의 하느님은 너무 차이가 난다. 이런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에 유대인조차 "야훼가 아들을 낳더니 정신을 차렸다"고 비꼰다. 그런데 예수의 위대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수도 아마 '유대경의 아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실현하기에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예수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오늘 날의 기독교도처럼 이런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하느님의 뜻'을 '미천한 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느냐?'와 같은 모순적인 해석을 들이댔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예수는 신을 바꿨다. 예수의 위대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수는 유대경의 야훼를 버리고 기독경의 사랑의 하느님을 창조한 것이다.
유대인의 야훼를 버렸기 때문에 예수의 두번째 종교 개혁이 가능해 진다. 바로 '하느님을 따르면 누구나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여기서 구원이라는 말대신 평안이라는 말을 사용한 이유는 '이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가 말한 것은 유대경에 나오는 보이지도 않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바로 '기독교인들이 만들 지상 천국'이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야훼를 버리고 민족의 장벽을 없앤 예수의 설법은 당연히 기성 종교로 부터 핍박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새로운 학설을 내놓으면 기존 학계의 끊임없는 비판을 받는 것과 비슷하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기독경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을 사람도 없겠지만 장담하건데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매장된다. 이단은 별것 아니다. 기존 기득권에 반하면 이단이다. 그리고 이런 이단이 세를 얻으면 이단에서 벗어난다. 이 부분은 개신교도 마찬가지다.
종교 혁명가 였던 예수는 자신의 이런 혁명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 그리고 독재자가 죽으면 독재는 끝나지만 순교자가 죽으면 치세가 시작된다는 말처럼 예수의 순교로 예수의 치세는 시작된다. 다만 현재 이루어지는 예수의 치세는 증오의 야훼를 사랑의 하느님으로 바꾼 예수의 혁명적 가르침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내 기독교관
나는 기독교를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내가 한 종교 비판은 '종교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은 거의 없다'. 대부분 그 종교를 믿는 사람, 그 종교 중에서도 기독교를 믿는 사람, 기독교 중에서도 개신교를 믿는 사람, 개신교 중에서도 장로교인 사람, 장로교 중에서도 예수장로교인 사람, 예수장로교도 중에서도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의 행태를 비판한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자체에는 호감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정확히 이야기 하면 '나는 예수의 가르침은 좋아한다'. 나는 '예수의 가르침'을 인류 보편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또 그의 말을 기록한 복음서는 인류에게 꼭 필요한 지혜의 책[4]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예수를 따른다는 후세들에 의해 예수의 가르침이 왜곡, 편집되었기 때문이다.
내 소원
개인적으로 나는 죽기 전까지 콥틱어로 된 예수의 가르침을 직접 읽는 것[5]이 소원이다.
일본 기독교
일본의 기독교는 우리나라와 다르다. 일본인의 입장에서 전향적으로 기독교를 재해석해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중심에는 함석헌[6]등의 사상에 영향을 미친 우찌무라 칸조오가 있다. 우찌무라 칸조오는 일본 무교회주의 창시자이다. 근세 일본의 양심이며 인간 중심이 아닌 하느님 중심, 기독경 중심의 사상을 외치며 일본인의 주체적 기독교관을 형성했다.
무교회주의
교회는 인간이 만든 것이며 하느님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기독경이 있고 그 기독경을 통해 기도하는 자리가 바로 교회라는 생각이다. 교회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를 따로 두지않는 것 뿐이다. 따라서 목사와 같은 사제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 기독경을 해석해 주는 사람 자체가 없다.
모든 사람은 기독경을 마음으로 읽고 깨닫는대로, 즉, 하느님이 주신 은총대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우리나라처럼 목사가 자신의 생각으로 기독경을 왜곡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이런 기독교 사상은 교회를 버려야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내 기독교관과도 일치한다[출처:우찌무라 칸조오 - 무교회주의의 창시자].
'우리나라 기독교도는 전도를 사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일본의 기독교도는 전도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본의 기독교가 이상한 것이라고 한다. 똑 같은 경전을 똑 같이 해석해서 사용하는 같은 기독교이지만 입장의 차이가 이처럼 크다. 그러나 나는 일본의 기독교가 기독경을 통해 하느님과 직접 만날 것을 주창한 마르틴 루터의 가르침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최고의 전도는 말이 아닌 행동이다'. 통전적 선교로 한지역 주민의 90%를 개종시킬 수 있는 이유는 통전적 선교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하는 선교이기 때문이다.
돈이 있어야 갈 수 있는 교회
나는 원래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이 별로 없었다. 내가 자라던 시절에는 가가호호 방문하며 사람들을 괴롭히는 개신교도는 없었다. 또 지금은 하늘의 별보다 많은 것이 교회지만 당시에는 온 동네에 하나 정도 밖에 없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초등학교 1학년 정도였을 때 교회에 나갔다. 부활절에 주는 계란이나 크리스마스 때 주는 선물에 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물을 바라고 열심히 교회에 다니던 나는 교회 뒷편에 헌금 도표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헌금 도표에는 헌금을 낸 아이들의 이름과 낸 금액이 빨간색 막대 그래프로 그려져 있었다. 방위성금 10원이 없어서 울면서 학교에서 집으로 왔다, 갔다 해야 했던 어린 시절이었다. 나는 당연히 헌금을 낼 돈도 없었다.
이 도표를 본 뒤 교회에 다니는 것은 그만 두었다. 그리고 이때 처음으로 교회도 돈이 있어야 다닐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런 기억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그 뒤에도 잠깐씩 교회를 다녔고 중고등학교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기독교는 절대 믿지 말아야 하는 종교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미션스쿨을 다닐 때였다. 이교도를 증오로 바라보는 목사의 모습[7] 어디에도 예수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불교 학생회 창립 총회 포스터에 석가는 귀신이라며 빨간 글씨를 새기는 기독교도, 불교 학생회 창립회장을 습격, 사람을 패고 기물을 부시는 기독교도의 모습에서 예수가 말한 '사랑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경험으로 기독교는 절대 믿지 말아야 하는 종교로 바뀌었다. 종교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종교의 믿음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 종교의 폐단(광신)을 봤기 때문이다. 이 당시 기독교에 대한 입장은 기독교 자체가 싫은 것이 아니라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싫은 것이었다. 그러나 세계사, 동양 철학과 세계 종교에 대한 지식이 쌓여 가면 갈 수록 이제는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가 싫었다. 예수의 가르침을 왜곡한 기독교는 지구상의 모든 정신 문명을 말살하며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출처:하나님은 천원을 싫어해].
꾸란과 기독경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은 번역을 인정하지 않는다. 아니 번역을 금하고 있다. 즉, 꾸란을 한글로 번역하면 그것은 꾸란이 아니라 꾸란의 한글 해설서일 뿐[8]이다. 이슬람에서 꾸란의 번역본을 꾸란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번역을 통해 본래의 뜻이 와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기독경은 모든 언어의 번역본을 인정한다[출처: 꾸란과 기독경(Bible)].
기독경과 성경
흔히 기독경(Bible)을 성경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성경이라는 표현은 명백히 잘못된 표현이다. 불교의 경전을 불경이라고 하듯 기독교의 경전은 성경이 아니라 기독경으로 불러야 한다. 나 역시 무의식적으로 성경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러나 龍川미리내님의 지적처럼 성경이 아니라 기독경이라고 불러야 한다.기독경의 번역
기독교도 이런 고민은 한 것 같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목사 아들이 한 이야기가 있다. 기독경은 단 한글자의 오류도 없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더 황당하다. 기독경을 적는 사람 수십명이 신의 계시를 받아 자국어로 적고, 수십명이 적은 기독경들을 서로 비교해 보면 단 한글자도 틀리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기독경은 신내림으로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세계 모든 언어의 기독경이 단 한글자의 오류도 없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들으면 '기독교인들은 가장 미개한 믿음'[9]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개독교
나는 개독교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개독교이라는 말에는 아주 심한 편견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로 기독교라는 단어를 이용했다. 그러나 기독교라고 하면 개신교와 카톨릭이 포함되는 문제가 있었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독교를 개신교로 아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다. 그래서 결국 기독교와 개신교, 정확히 이야기하면 개신교 중에서도 특정 부류를 구분하기 위해 사용하기 시작한 말이다. 즉, 내가 사용하는 개독교는 개같은 기독교가 아니다. 개신 기독교를 줄인 것이다.
나는 개독교의 이런 사용을 내가 가장 먼저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위키백과의 개독교를 보니 나 이외에 이런 의미로 개독교를 사용하는 사람이 있는 듯 하다.
대한민국의 반기독교주의자들은 "개독"이라는 비하적인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개독"이라는 말이 현재 한국에서 반기독교 적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지만 기독이라는 말이 크리스도를 믿는 여러종교의 포괄적인 상위 의미라 하위개념으로 개독교를 "개신 기독교"의 압축형으로 사용하는 이들도 있는 상황입니다.[출처: 위키백과의 개독교]
일단 앞으로 내가 사용하는 기독교 관련 단어의 뜻은 다음과 같다. 물론 개독교를 본문에 사용하지 않는다. 예전 글에도 본문에 개독교라는 말을 사용한 적은 없다.
- 기독교: 카톨릭과 개신교를 포함한 모든 예수교를 지칭한다.
- 카톨릭: 우리나라에서 구교라고 하는 카톨릭을 말한다.
- 개신교: 우리나라에서 신교라고 하는 마르틴 루터 계열의 종파를 말한다.
- 개독교: 개신교 중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거나 그 가르침을 왜곡하는 사람 또는 종교를 말할 때 사용한다.
- 하나님: 개독교도들이 믿는 유대경의 야훼를 표현할 때 사용한다.
- 하느님: 예수가 창조한 기독경의 신(아버지)을 말할 때 사용한다.
남은 이야기
길을 가다 보면 '도를 아십니까'하면서 접근하는 사람이 있다. 심중팔구는 '대순진리회'[10]이다. 그런데 난 이 대순진리회의 모태인 증산도에 대해 아주 어린 나이에 알았다. 바로 길거리에서 공짜로 나눠준 개벽이라는 책을 통해서 였다. 또 원래 도에 관심이 많아 대학교에 다닐 때 자주 읽은 책 중 하나가 도에 관련된 책이다. 따라서 이런 사람을 만나면 두가지 행동을 한다.
도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이런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다 도장까지 끌려가 돈을 냈다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나는 대부분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심심면 거부하지 않고 도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말로 할 수 있는 것은 도가 아니다'. 따라서 상대의 공력이 아무리 높아도 내 논리를 이기지 못한다. 결국, '정말 대단한 분을 만났다'고 이야기 하며 사라진다.말 몇마디로 쫓는다
대순: 도에 대해서 아십니까?
도아: (뚫어지게 처다 보다) 음, 열심히 하게. 그러면 내가 보일거야.
대순: (분해 쫓아 오며) 그래, 정말 보이나 봅시다.
- 글자만 읽는 사람이 있어서 추가하자면 유대서에 나온 대목을 믿는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라는 인물이 '실제 존재했었다'는 것을 '믿는다'는 뜻이다. ↩
- 모든 신부님이 인정하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러나 인정하는 신부님이 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하나의 경이로움이었다. ↩
- 모든 도는 통한다. 붓다와 예수가 만났다면 논란 자체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 나중에 따로 설명하겠지만 기독경에서 내가 인정하는 복음서는 딱 하나 뿐이다. ↩
- 꾸란에서 번역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에 나 역시 동의한다. 그 이유는 번역을 통해서도 왜곡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
- 예전에 후배와 예천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마을입구에 '씨알의 소리'라는 간판을 봤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이 씨알의 소리에는 함석헌 선생님과 함께 종교 운동을 한 분의 집이었다. 참고로 함석헌 선생님의 종파는 퀘이커이다. ↩
- 기독교에서 이 목사의 명성은 당시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에 버금갔었다. 이런 명성을 가진 사람이 "길거리에서 태어나 길거리에서 방황하다 길거리에서 죽은 것이 부처의 일생이다."라고 주장했었다. ↩
- 그래서 꾸란 번역판은 모두 '성 꾸란 의미의 한글 번역'이라는 해괴한 이름을 갖는다. ↩
- 기독교가 미개하다는 뜻이 아니다. '신내림으로 기독경이 기록되었다'는 믿음이 미개하다는 뜻이다. 난독자를 위해 붙인 주석이다. ↩
- 원래는 증산도로 표시했지만 zintung님이 증산도는 길거리 선교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 주셔서 대순진리회로 바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