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사에 민감한 글은 쓰지 않는다. 시사에 관련된 글을 쓰다 보면 어느 새 자신의 관점보다는 시류에 휩쓸린 글이 나오기 때문이다. 정말 써보고 싶은 글은 ''는 글이었다. 미션 스쿨을 다니면서 봐온, 아니 평생을 살면서 봐온 기독교도의 '거짓된 사랑'과 '편협한 의식',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모습'들 때문이었다. 따라서 정확히 설명하면 기독교가 싫다가 아니라 기독교도가 싫다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의외로 '나는 기독교가 싫다'는 글은 마무리를 할 수 없었다. 간단히 쓰기에는 분량이 너무 많고 공감을 얻어 내기에는 필력이 부족한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 두개의 글로 나누어 쓰기로 했다. 하나는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사안을 통한 접근으로, 또 하나는 '내가 겪은 기독교에 대한 경험'으로.

요즘 블로그를 평정한 주제는 기독교이다. 아마 개국이래 기독교가 이렇게 온 국민의 관심을 초래한 것은 처음인 것 같다. 기독교가 이런 관심을 유도한데에는 다음 세가지 사건이 동시에 발생했기 때문이다.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줄 수 있는 사건이 동시에 세가지나 터졌으니 기독교도에 대한 모습이 좋게 비추어 질리는 없다. 그러나 사실 우리 나라의 기독교는 이런 사건이 터지지 않았다고 해도 전부터 개독교[1]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문제가 많았다.

나는 개독교는 표현을 싫어한다. 이 표현에는 싫어하는 기독교도 보더 더 싫은 편협함이 남아 있는 것같기 때문이다[2]. 그러나 이렇게 싫어하면서도 개독교라고 표현하고 싶은 기독교인들을 종종 만난다.

아니 이런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이런 얘기를 하면 기독교인들이 항상 하는 얘기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라고 한다. 물론 맞는 얘기이다. 이때 내가 하는 얘기는 숲과 들의 비교이다.

들에는 풀이 많고 숲에는 나무가 많다. 그러나 우리가 들을 들이라 부르고 숲을 숲이라 부르는 이유는 들에는 풀이 많고 숲에는 나무가 많아서가 아니다. 우리가 숲을 숲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숲에 풀 보다나 나무가 많아서가 아니라 최소한 풀을 가릴 수 있는 정도의 나무는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썩었다고 하는 이유는 모든 기독교도가 썩었기 때문이 아니다. 썩은 기독교도를 가릴 수 있을 정도의 기독교도도 없기 때문이다.

'이랜드 사태'는 아직까지 중립적으로 보고있다. 노조와 이랜드측 주장 모두 타당성이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분당 샘물 교회의 피납건은 기독교 일방주의, 이기주의, 독선우리 나라 썩은 기독교의 전형으로 생각된다. 물론 이런 썩은 기독교도라고 해도 정부는 최선을 다해 이들을 구해낼 의무가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이 아무리 썩은 기독교도라고 해도 이들은 기독교도이기 전에 우리의 국민이기 때문이다.

두타 스님에 대한 기독교도의 모독은 사실 신경쓸 필요가 없는 부분이다. 지하철에 흔히 만나게 되는 미친 기독교도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미친 신도를 양산하는 우리 교회 시스템은 분명 문제지만 저런 미친 신도의 행위로 기독교 모두를 싸잡아 평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꽤 오래 전의 일이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니던 나 보다 다섯살 아래의 아가씨였다.

보미: 아빠가 교회를 바꾸시려고해.
도아: 바꿔.

보미: 그게 쉽지 않아.
도아: 그냥 바꾸면 되지. 종교를 바꾸는 것도 아닌데.
보미: 그게 그거야.

도아: 교회를 바꾸는게 종교를 바꾸는 거야?
보미: 오빠가 몰라서 그러는데 비슷해.

사실 우리나라의 기독교가 썩은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님과의 단순한 만남의 장이어야 하는 교회에 갖가지 이름의 기득권을 만들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기득권을 이용해서 거대한 울타리를 처버린다. 그래서 교회를 바꾼다는 것이 종교를 바꾸는 것과 같아졌다.

교회에는 권력이 있다. 그리고 증오가 있다. 그리고 이권이 있다. 이쯤이면 우리 교회의 모습이 어떨지 쉬 짐작이 간다. 내가 기독교인들에게 항상 해주는 얘기가 있다. 세상에 사탄이 있고 그 사탄이 인간세상에 내려온다면 그 사탄의 전진기지는 다름 아닌 교회일 것이라고...

이 것이 우리 기독교의 현실이다. 기독교도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 진정 기독교도라면, 인류의 고통을 짊어지고 십자가를 받으신 그분의 제자라면 지금 바로 교회를 떠나라!

교회가 줄 수 있는 것은 증오와 권력 뿐이다. 목사가 줄 수 있는 것은 다른 종교에 대한 편협한 의식뿐이다. 예수가 재림한들 교회에 알아볼 기독교도가 있을까? 교회에는 하나님이 없다. 그러니 교회를 떠나라!!!

성경만이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니 교회를 떠나라!!!

마지막으로 '국민의 혈세로 미친 기독교도를 구한다'는 비난이 있다. 아예 틀리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국민의 혈세로 구하는 것은 미친 기독교도가 아니라 우리와는 생각이 조금 다른 국민이다. 이들의 방문이 선교든 봉사든. 따라서 여기서 논의되어야 하는 부분은 혈세로 기독교인을 구하는 부분이 아니라고 본다. 혈세는 국민을 구하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 '분당 샘물 교회 피납 사건'으로 논의해야 하는 부분은 종교인의 면세특권이다. 사실 우리 교회가 이토록 썩을 수 있는 이유. 목사를 하면 한 재산 모을 수 있는 이유. 개발 지역에 가면 우후죽순처럼 교회가 생기고 얼마 뒤 교회를 팔고 가는 이유[3]. 모두 종교인에 대한 면세특권이 그 이면에 있다.

사실 며칠 간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되면서 혈세에 대한 이야기는 있어도 종교인에 대한 면세특권에 대한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사실 중요한 것은 면세특권이라고 본다. 교회에 헌금하면 헌금한 금액을 공제해주는 제도. 국교가 없는 우리 나라에 이런 제도가 왜 필요할까?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의 혈세를 거두어 가면서 교회로 빠져나가는 돈은 세금에서 공제하는 제도. 특정 종교를 국교로 하지 않은 우리나라. 이 두가지를 고려하면 우리 나라는 소수의 종교인을 위한 제도(석탄절, 성탄절)를 너무 많이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남은 이야기

나는 종교와 인연이 많았다. 중, 고등학교는 불교 계열의 학교를 다녔고 대학교는 미션 스쿨을 나왔기 때문이다. 불교 학교 6년의 경험은 불교라는 종교를 알게해준 경험이었다면 미션 스쿨 4년의 경험은 "왜 기독교를 믿어서는 안되는지"에 대한 경험이었다.

대학교 1학년 기독교 사상사라는 과목을 들을 때 한모 목사님이 수업 첫 시간에 하신 말씀이다.

부처는 길거리에서 태어나 길거리에서 방황하다 길거리에서 죽은 것이 부처의 일생이다.

이말을 하는 목사님의 눈에는 증오가 엿보였다. 사랑을 얘기해야 하는 목사가 할 얘기는 아니다. 아울러 부처의 일생이 저렇다면 예수의 일생 역시 별 차이 없다고 본다.

태어날 곳이 없어서 마굿간에서 태어나 있을 곳이 없어서 증발했다가 죽을 곳이 없어서 나무에 못박혀 죽은 것이 예수의 일생이다.

똑 같은 논리이다. 폄하하면 끝이 없다. 그러나 나는 묻고 싶었다. '네가 진정 예수의 제자인지.' '원수를 사랑하라'[4]는 교조의 가르침을 죄없는 불교도의 심장에 말뚝을 박는 것으로 화답한 네가 정말 예수의 제자인지.

관련 글타래


  1. 기독교가 싫다고 해서 개독교라고 부르지 말자. 마땅이 이말을 들어야 하는 사람(두타 스님의 머리에 손을 얹은)은 이런 말에 신경쓰지 않으며, 이런 말을 들을 필요가 없는 기독교도는 이 말에 정말 심한 모욕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2. 내도 가끔 '개독교'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때 의미는 '개신기독교'를 의미한다. 기독교는 카톨릭과 개신교로 구분된다. 그런데 개신교를 기독교로 아는 사람이 많다. 따라서 난 카톨릭과 개신교를 구분하기 위해 개신기독교, 개독교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3. 모일간지에 난 짜투리 광고문구가 생각난다. "교회 팝니다. 신도수 많음". 
  4. 예수가 말한 원수는 이교도를 말한다. 따라서 이 목사는 예수의 가르침을 대놓고 어긴 셈이다. 그런데 이런 목사가 우리나라에는 정말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