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 게임, 베네치아
보고서를 작성할 때도 아래아 한글 자판 배열을 인쇄한 종이를 보면서 세벌식으로 연습했다. 이렇게 한 20일 정도 연습하자 타자속도는 두벌식을 쓰던 때와 비슷해졌다. 타자속도가 어느 정도 나오자 시작한 게임이 바로 타자게임의 명작 베네치아였다. 베네치아는 하늘에서 내리는 산성비(단어, 나중에 산성비가 바이러스로 바뀜)를 타자를 쳐서 없애는 게임이었다. 단순하지만 꽤 중독성있는 게임이었다. 아울러 베네치아는 타자 연습을 위해 한메 타자교사에 내장된 게임이었다.
한메 타자교사
나는 세벌식 사용자다. 컴퓨터를 처음 배울 때는 두벌식을 사용했었다. 대학원에서 장시간 워드 작업을 할 때였다. 이유없이 짜증이 밀려오고 심리불안이 엄습해 왔다[1]. 그러나 그 원인을 알 수 없었고 잠깐 워드 작업을 멈추는 방법 외에 심리불안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케텔[2]에서 이런 심리불안의 원인 중 하나가 두벌식의 도깨비불 현상[3] 때문이라는 글을 봤다.
나는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해도 더 좋은 것이 나오면 바로 바꾼다[4]. 이렇게 바꾸지 못하는 유일한 대상은 아마 사람뿐일 것이다. 이런 습관 때문에 그날로 당장 안국동에 있던 한글문화원[5]을 방문했다. 한글문화원에서 세벌식 딱지를 나눠 주었기 때문[6]이다.
한글문화원에서 가져 온 딱지를 키보드에 붙이고 연습을 했지만 실력은 도통 늘지가 않았다. 타자를 가르치는 프로그램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이때했다. 당시 두벌식 타자를 가르치는 프로그램은 허접하지만 있었다. 그러나 세벌식은 없었다.
한겨레신문인지 아니면 다른 신문[7]인지 모르겠지만 "타자를 가르치는 한메 타자교사라는 프로그램이 나왔다"는 기사를 봤다. 중요한 건 '세벌식을 지원한다'는 점이었다. 당시 가격으로 만오천원 정도 했었는데 빌어먹는 학생이라 돈이 없었다.
그런데 옆방 교수님[8][9]이 아이들에게 PC일반을 가르치면서 타자연습을 하려고 한메 타자교사를 구매했다[10]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처럼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폭넓던 시절도 아니고 책도 복사판이 판치던 시절이라 옆방 교수님의 양해를 구하고 프로그램을 복사하고 매뉴얼을 빌려왔다.
매뉴얼 복사 역시 공대 사무실에서 지도교수님 이름으로 했다. 따라서 돈한푼 들이지 않고 프로그램과 매뉴얼을 구했다.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한메 타자교사 1.0'은 세벌식만 지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세벌식 보급에 공이 있는 프로그램을 꼽으라고 하면 나는 아래아 한글과 한메 타자교사를 꼽는다[11][12].
아무튼 매뉴얼에 따라 프로그램을 실행시키고 자리연습을 했다. 기본자리가 익숙해지면 다음으로 넘어갔다. 내 습관 중 하나는 한번할 때 철저히 하는 것이다[13]. 따라서 익숙해지지 않은 상태라면 다음으로 넘어가는 방법을 알아도 넘어가지 않는다. 하루에 한 20분씩 자리연습을 했다.
명작 게임, 베네치아
보고서를 작성할 때도 아래아 한글 자판 배열을 인쇄한 종이를 보면서 세벌식으로 연습했다. 이렇게 한 20일 정도 연습하자 타자속도는 두벌식을 쓰던 때와 비슷해졌다[14]. 타자속도가 어느 정도 나오자 시작한 게임이 바로 타자게임의 명작 베네치아였다.
이 화면을 잡아 인쇄한 뒤 코팅해서 가지고 다녔다. 이 자판배열 뒤에는 아래아 한글 단축키를 빼곡히 인쇄해 두었다. 워드 작업을 해보면 알 수 있지만 단축키는 워드 작업을 하는데 정말 효과적이다.
그림을 보면 알 수 있지만 물의 도시 베네치아가 그 배경이다. 하늘에서는 산성비(단어)[15]가 내린다. 산성비를 맞으면 베네치아를 지탱하는 벽돌이 산화되 물에 잠긴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빨리 타자를 쳐서 산성비를 제거해야 한다. 스토리도 간단하고 규칙도 간단한 게임이지만 상당히 중독성있었다.
당신은 베네치아를 아십니까?
아름다운 물의 도시 베니스가 있는
이탈리아 북부의 베네치아.
시인들에게는 깊은 사색을 그리고
연인들에게는 달콤한 사랑을 낳게 한 곳…
서기 2020년.
오랜 세월 바닷물에 의한 침식과 부식으로
다른 건물들은 자취를 감추고, 화려했던
추억과 마지막 희망을 안은 채 하나의
탑만이 물위에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베네치아의 하늘에
‘바이러스 군단’이 나타납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이 바이러스들은
물속에 떨어지거나 탑에 떨어지는 순간,
탑을 지탱하고 있는 벽돌이
하나씩 하나씩 깨뜨려집니다.
탑을 지탱하고 있는 벽돌이 모두 깨어지면
우리의 사랑과 희망을 지닌 마지막 탑마저
물속으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베네치아를 사수하라!’
이제 베네치아를 지킬 마지막 소망이 바로
당신의 손에 쥐어 졌습니다.
바이러스를 막아 부디 베네치아를 무사히
지켜주십시오. 행운을 빕니다!
1.0에는 이 스토리가 없었던 것 같다. 매뉴얼에만 있었는데 판올림하면서 스토리가 추가된 것이 아닌가 싶다.
자리가 어느 정도 익숙해진 상태에서는 거의 매일 타자연습 보다는 베네치아 게임을 했다. 베네치아 게임을 하면 평균타수, 오타, 점수 등 서로 비교할 수 있는 데이타가 많이 제공되기 때문에 실력을 측정하는데에도 상당히 유용했다.
처음 세벌식만 지원하던 한메 타자교사는 나중에 두벌씩까지 지원한다. 국내에서는 드믄 "제대로된 타자교육 프로그램"이라는 점과 베네치아라는 인기 있는 게임 덕에 무명에 가까운 소프트웨어 회사[16]에서 개발한 프로그램치곤 꽤 이름을 떨친다. 다만 언제부터 두벌식을 지원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이때부터 연구실에 베네치아 열풍이 일었다. 다들 타자연습은 뒷전이고 모두 베네치아로 누가 더 높은 점수를 내는지가 관건이었다. 함께 사용하는 PC라면 1등 이름을 지우고 자기 이름을 올리려고 매달렸다. 뒤에 유사한 타자 프로그램들이 등장하지만 아직까지 '한메 타자교사'처럼 재미있게 연습한 타자 프로그램은 없다.
추억의 한메 타자
최근 '세벌식 390'에서 '세벌식 최종'으로 바꾸면서 다시 타자교육 프로그램을 찾아봤다. 그러나 예전 '한메 타자교사'와 같은 맛을 주는 프로그램은 찾기 힘들었다. '한메 타자교사' 윈도판도 있지만 향수 때문인지 도스용 한메 타자교사가 더 나아 보였다.
1.0에서는 흑백이었는데 어느새 컬러로 바뀌었다. HJC와 HTT-는 등록자와 시리얼 번호다. 또 세벌식 빨래줄 글꼴과 유사한 한메소프트 로고가 아래쪽에 보인다.
당시 외국에서 나온 타자교사 프로그램은 손가락 움직임까지 보여 주었다. 그러나 한메 타자교사는 삼각형으로 어떤 손가락인지만 알려 준다.
기본자리를 익혔으면 실제 단어를 입력함으로서 자리를 연습한다. 이때는 타수와 정확도 최고 속도가 함께 출력된다.
이 화면을 잡은 이유는 왼쪽 아래의 '사이띄개를 누르세요!'라는 문구 때문이다. 스페이스가 익숙한 요즘이지만 당시에는 이렇게 컴퓨터 용어의 한글화가 한참이었다.
단순하지만 재미있는 베네치아 게임이다. 위에서 떨어지는 단어를 입력한 뒤 사이띄개를 누르면 단어가 사라진다. 색깔이 다른 아이템도 있다.
말랑말랑 산성비
한컴에서 만든 웹판 베네치아. 스토리는 좀 다르지만 산성비라는 초기 스토리 그대로 복원했다. 게임하는 방법도 거의 똑 같다. 다만 세벌식 390은 지원하지 않는다. 처음 접속하면 두벌식으로 표시되며 단계 조정하기에서 2벌식, 3벌식 최종, 쿼티로 바꿀 수 있다.
말랑말랑 산성비로 이동
남은 이야기
한메 타자교사 1.2판[17]을 찾다가 우연히 넥슨컴퓨터박물관의 존재를 알겠됐다. 그리고 넥슨컴퓨터박물관을 통해 한메 타자교사에 대한 기사가 한겨레 신문 1990년 3월 1일자 기사라는 사실도 알게됐다. 따라서 기념으로 당시 한겨레 신문 기사를 첨부한다. 세벌식을 배우려고 했던 나에겐 한줄기 빛과 같았던 기사다.
- 당연한 이야기지만 자판을 보고 치는 단계나 종이를 보고 치는 단계에서는 이런 현상이 없다. ↩
- 나중에 KOL, KOTEL, HITEL 등 이름으로 바뀌었고 현재는 서비스가 중지된 상태다. ↩
- '가나'를 친다고 할 때 '간ㅏ'를 치면 받침 'ㄴ'이 순간적으로 옆으로 이동해서 '간ㅏ'가 '가나'가 되는 현상을 말한다. ↩
- 그래서 장시간 사용한 프로그램은 정말 많지 않다. ↩
- 요즘 한글문화원은 공병우 박사님이 계실 당시의 한국문화원과 차이가 있는 것 같다. ↩
- 이때 한 백장 정도 얻어와서 대학원 내내 홍보한 덕에 백장을 거의 다 소모했다. 이중 약 30% 정도가 세벌식으로 전환했기 때문에 약 30명 정도의 동지를 만든 셈이다. ↩
- 한겨레 신문이 맞다. 글을 쓰고 10년 정도 지난 뒤 우연히 한겨레 신문 1990년 3월 1일자 기사라는 걸 알았다. 더 자세한 내용은 남은 이야기를 참조하기 바란다. ↩
- 학부 3학년 때 무능교수 퇴진운동으로 쫓아낸 교수다. 물론 나는 학회임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이 퇴진운동을 한 사람 중 하나다. 당시 "학부교육은 절대 시키지 않겠다"는 학교의 확답을 듣고 퇴진운동을 끝낸 기억이 있다. ↩
- 이 교수님은 두벌식 사용자였다. 나처럼 세벌식을 배우기 위해 한메 타자교사를 구입했는지 아니면 세벌식만 지원하는 걸 모르고 구입했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침고로 이 교수님은 세벌식으로 전환하지 못했다. ↩
- 학부생들에게 PC일반을 가르치는 교수지만 아는 도스 명령어는 dir, cd가 전부였다. 수업이 어땠을지 짐작이 간다. ↩
- 아래아 한글과 한메 타자교사 개발진 중 상당수가 우리나라 벤처산업을 이끈 주역이 되었다. ↩
- 아래아 한글에 이어 한메 타자교사를 쓰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
- 무엇이든 두번 하는 것을 싫어한다. ↩
- 두벌식을 사용할 때는 정식으로 타자를 배운 것이 아니다. 자판을 보고 치는 독수리 타법이었기 때문에 빨라야 200타정도가 나왔다. 참고로 독수리 타법으로 500타 가까이 나오는 후배가 있었다. ↩
- 내 기억으로는 산성비였던 것 같은데 한메 타자교사 3.0에는 바이러스 군단으로 나온다. ↩
- 한메 타자교사를 출시할 때는 무명이지만 얼마 뒤 윈도용 한메 한글을 출시함으로서 국내 한글 소프트웨어 이인자로 등극한다. Microsoft의 '확장 완성형' 체제가 굳어지지 않았다면 한메소프트도 한글과 컴퓨터 만큼 성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
- 내가 타자 연습에 사용했던 한메 타자교사가 1.2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