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훈련소 이야기 3. 고문관 by 도아
고문관
다들 일어서 침상에 앉아 있는데 한 사람은 일어서지 않고 벌을 계속 받고 있었다. 앞에서 이야기한 고문관이다. 몇번씩 조교가 일어서라고 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조교가 밖에 나가서 이야기를 하자며 데리고 나갔다. 조교도 고문관이었다면 사고가 크게 났겠지만 다행이 원리원칙은 강조해도 융통성이 아예 없는 조교는 아니었기에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된 것 같았다.
미국에선 인재, 한국에선 고문관
훈련소 마지막 날이다. 부모님을 모시고 퇴소식이 있었다. 그리고 훈련소를 나가기 위해 다들 옷을 갈아 입고 있었다. 이때였다. 갑자기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지금은 휴대폰이 상당히 보편화됐지만 당시에는 휴대폰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을 때였다[1]. 더구나 훈련소까지 가지고 와서 아직 퇴소전인데 휴대폰 부터 켤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이번 이야기는 바로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재미교포인지 아니면 어렸을 때 이민을 간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미국에서 살다 훈련 때문에 귀국한 사람"이다. 미국에서 석사학위까지 마쳤고 미국에서 상당히 큰 회사에 근무하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 사람의 훈련소내의 별명은 고문관이었다.
내가 훈련을 받은 훈련장에는 "10대 후반 또는 20대 초반의 공익", "20대 중반의 일반특례", "20대 후반 또는 30대 초반의 박사과정 특례"가 모두 함께 훈련을 받았다. 원래는 공익만으로 한 소대를 꾸미고 "이 소대를 쥐잡듯 잡아 군기를 잡으려고 했다"[2]고 한다. 그런데 공익의 인원이 한 소대를 만들기 힘들어 박사, 일반, 공익을 한소대로 묶었다.
이렇다 보니 19살짜리가 내 동기였다. 부대 내에서는 나이 때문에 다들 형이라고 했다. 그러나 조교는 동기이기 때문에 형이 아닌 이름을 부르라고 했다. 조교가 있는 곳에서는 어쩔 수 없이 이름을 불러도 없을 때는 나이차 때문에 대부분 형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나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고문관'이라고 불린 사람이 이 사람이다. 식판을 들고 이 사람이 걸어가면 10대 후반 또는 20대 초반되는 공익들이 "어이 고문관, 밥먹었나"라고 하곤했다.
한국에서 고문관이라고 불린 이 사람은 고문관이 아니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미국에서 석사를 받은 인재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고문관이 된 이유는 바로 문화적 차이였다. 이 사람이 하는 이야기 중 하나는 "미국에서는 아무리 사소한 일을 해도 그에 대한 응분의 댓가를 지불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군대라고 하지만 아무런 댓가를 지불하지도 않고 본래의 군역외에 휴일날 사역을 시키며, 그것으로 모자라 "심심하면 얼차려를 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구의 관점으로 봐도 이 사람의 말이 옳다. 아무리 군대라고 해도 일요일에 연대장을 위해 산을 깍아 팔각정을 만드는 사역을 시킬 권한이 누구에게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군문화에서는 이런 사역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모든 잡일에 군인이 동원된다.
고문관
내가 있던 훈련소에서도 연대장의 사택 앞에 있는 작은 야산을 깍아 팔각정을 만드는 공사에 훈련병이 동원됐다. 월요일 부터 토요일 오전까지는 훈련을 하고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까지는 훈련병이 이 사역에 동원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 것이 "공식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계속해서 승진을 하지 못한 대대장이 연대장에게 아부하기 위해 한 공사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런 문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이 사람[3]은 조교에게 직접 대드는 방법으로 저항을 한 것이다. 훈련을 계속하면서 조교와 어느 정도 친해진 상태였다. 말을 상당히 재미있게하는 고참 조교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퇴소 후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한 녀석이 조교에게 질문했다.
우리가 퇴소하는 날 조교들을 두들겨 패면 어떻게 되요?
질문을 받은 조교는 웃으며 "토요일에 퇴소 한다고 해도 토요일까지는 군인의 신분이 유지된다. 따라서 조교를 패면 헌병에 잡혀가 영창에 갈 수도 있다"고 답했다[4]. 그리고 기분이 상한 고참 조교는 우리 소대를 나섰다. 이어서 들어온 조교는 상당히 원리원칙을 강조하는 조교였다.
모두 침상 앞에 업드려 정렬했다. 그리고 이 상태로 침상에 허리만 걸치고 있는다. 해보면 알겠지만 하반신으로 상반신을 떠 받들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상당히 힘든 얼차려이다. 더구나 걸린 조교는 원리원칙을 강조하는 조교다.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쉽게 끝낼 사람은 아니었다.
사진에서는 머리를 건너편 침상에 박고 있다. 우리가 받은 얼차려는 건너편 침상에 머리를 박는 것이 아니라 허리 바클 정도가 침상에 걸친채로 상반신을 들고 있는 얼차려다.[그림출처: 6년 있다 다시 군대에 가라니..]
이때 빛을 발한 사람은 역시 나의 훈련소 이야기 2. 화생방에서 설명한 동기[5]였다. 화생방을 받을 때도 눈을 뒤집고 기절한 덕에 세번째 화생방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역시 한 1~2분이 지나자 이번에는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놀란 조교가 녀석을 일으키며 모두 일어서라고 했다.
그런데 다들 일어서 침상에 앉아 있는데 한 사람은 일어서지 않고 벌을 계속 받고 있었다. 앞에서 이야기한 고문관이다. 몇번씩 조교가 일어서라고 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조교가 밖에 나가서 이야기를 하자며 데리고 나갔다. 조교도 고문관이었다면 사고가 크게 났겠지만 다행이 원리원칙은 강조해도 융통성이 아예 없는 조교는 아니었기에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된 것 같았다.
퇴소를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지만 이 사람과 이야기하면서 느낀 점은 "문화의 차이가 크다"는 것이다. 조교라고 하면 "훈련병에게는 죽이고 살리는 권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중대장에게 밉보여도 조교와 친하면 별 문제는 없다[6].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조교에게 이렇게 하는 것을 보고 다들 '고문관'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조교에게 그렇게 한 이유는 조교가 실제 가장 가까이에 부딪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입장이나 주장을 윗선이나 다른 우회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당사자와 마무리하는 것 역시 우리의 문화와는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 지금 기억으로 96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사귀던 아가씨와 헤어지고 우엉맘을 만난 것도 이해이다. ↩
- 훈련이 끝날 때 쯤 조교가 이야기 해준 것이다. ↩
- 이런 것을 문화로 이해하는 우리가 잘못이다. ↩
- 아무리 친해지고 분위기가 좋다고 해도 말은 가려서 해야 한다. 그런데 가끔 이런 개념없는 사람들이 있다. ↩
- 이 녀석 때문에 혹독한 얼차려를 서너차례 피했다. 원리원칙을 강조한다는 조교는 어떤 상황이 되도 절대 봐주는 일이 없는 조교였다. 속된 말로 걸리면 죽는다. 그런데 이 녀석 때문에 이런 얼차려를 서너차례 피했다. 자신이 민폐를 끼친 것으로 생각하고 퇴소하는 날 나한테 "형 미안해"라고 사과했지만 덕을 본 사람은 나였다. 그래서 "오히려 니덕에 조금이라도 편했다"고 이야기했다. ↩
- 선배형 중 한명은 병역특례 훈련을 받으면서 중대장 말을 듣지 않고 조교의 말을 듣는 방법으로 훈련을 편하게 받았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