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훈련소 이야기 3. 고문관
고문관
다들 일어서 침상에 앉아 있는데 한 사람은 일어서지 않고 벌을 계속 받고 있었다. 앞에서 이야기한 고문관이다. 몇번씩 조교가 일어서라고 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조교가 밖에 나가서 이야기를 하자며 데리고 나갔다. 조교도 고문관이었다면 사고가 크게 났겠지만 다행이 원리원칙은 강조해도 융통성이 아예 없는 조교는 아니었기에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된 것 같았다.
미국에선 인재, 한국에선 고문관
훈련소 마지막 날이다. 부모님을 모시고 퇴소식이 있었다. 그리고 훈련소를 나가기 위해 다들 옷을 갈아 입고 있었다. 이때였다. 갑자기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지금은 휴대폰이 상당히 보편화됐지만 당시에는 휴대폰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을 때였다 군대에서 이루어지는 얼차려
사진에서는 머리를 건너편 침상에 박고 있다. 우리가 받은 얼차려는 건너편 침상에 머리를 박는 것이 아니라 허리 바클 정도가 침상에 걸친채로 상반신을 들고 있는 얼차려다.[그림출처: 6년 있다 다시 군대에 가라니..]
이때 빛을 발한 사람은 역시 나의 훈련소 이야기 2. 화생방에서 설명한 동기[5]였다. 화생방을 받을 때도 눈을 뒤집고 기절한 덕에 세번째 화생방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역시 한 1~2분이 지나자 이번에는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놀란 조교가 녀석을 일으키며 모두 일어서라고 했다.
그런데 다들 일어서 침상에 앉아 있는데 한 사람은 일어서지 않고 벌을 계속 받고 있었다. 앞에서 이야기한 고문관이다. 몇번씩 조교가 일어서라고 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조교가 밖에 나가서 이야기를 하자며 데리고 나갔다. 조교도 고문관이었다면 사고가 크게 났겠지만 다행이 원리원칙은 강조해도 융통성이 아예 없는 조교는 아니었기에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된 것 같았다.
퇴소를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지만 이 사람과 이야기하면서 느낀 점은 "문화의 차이가 크다"는 것이다. 조교라고 하면 "훈련병에게는 죽이고 살리는 권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중대장에게 밉보여도 조교와 친하면 별 문제는 없다[6].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조교에게 이렇게 하는 것을 보고 다들 '고문관'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조교에게 그렇게 한 이유는 조교가 실제 가장 가까이에 부딪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입장이나 주장을 윗선이나 다른 우회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당사자와 마무리하는 것 역시 우리의 문화와는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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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기억으로 96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사귀던 아가씨와 헤어지고 우엉맘을 만난 것도 이해이다. ↩
- 훈련이 끝날 때 쯤 조교가 이야기 해준 것이다. ↩
- 이런 것을 문화로 이해하는 우리가 잘못이다. ↩
- 아무리 친해지고 분위기가 좋다고 해도 말은 가려서 해야 한다. 그런데 가끔 이런 개념없는 사람들이 있다. ↩
- 이 녀석 때문에 혹독한 얼차려를 서너차례 피했다. 원리원칙을 강조한다는 조교는 어떤 상황이 되도 절대 봐주는 일이 없는 조교였다. 속된 말로 걸리면 죽는다. 그런데 이 녀석 때문에 이런 얼차려를 서너차례 피했다. 자신이 민폐를 끼친 것으로 생각하고 퇴소하는 날 나한테 "형 미안해"라고 사과했지만 덕을 본 사람은 나였다. 그래서 "오히려 니덕에 조금이라도 편했다"고 이야기했다. ↩
- 선배형 중 한명은 병역특례 훈련을 받으면서 중대장 말을 듣지 않고 조교의 말을 듣는 방법으로 훈련을 편하게 받았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