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훼의 폭력성에 대한 신부님의 답변


손희송 신부님의 답변

글을 읽어 보면 알 수 있지만 비기독교도라고 해도 상당히 수긍가는 내용이 많다. 구약의 야훼에 대한 폭력성을 인정하면서 예수 이후의 사랑의 하느님을 들고 있다. 신약과 구약이 서로 배치하면 신약을 우선함으로서 사랑의 하느님을 앞으로 배치하는 융통성을 보여주고 있다. 또 이 개신교도들처럼 문자 그대로의 진실이 아닌 진실, 과장, 비유임을 얘기하고 있다.

목차

손희송 신부님의 답변

중동 사막에서 온 깡패, 하나님라는 글에 작은선물님이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손희송 신부(교수)님의 글이 올려 주셨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관심을 가질만한 질문 네가지에 대한 신부님의 답변이다.

  1. 구약에 나타나는 야훼 하느님이 왜 고대 이스라엘 문화의 모습으로 나타나시는가?
  2. 야훼의 폭력성.
  3. 오경의 내용이 글자 그대로 진실일까?
  4. 이스라엘과 의 보수 근본주의자들

글을 읽어 보면 알 수 있지만 비기독교도라고 해도 상당히 수긍가는 내용이 많다. 구약의 야훼에 대한 폭력성을 인정하면서 예수 이후의 사랑의 하느님을 들고 있다. 신약과 구약이 서로 배치하면 신약을 우선함으로서 사랑의 하느님을 앞으로 배치하는 융통성을 보여주고 있다. 또 이 개신교도들처럼 문자 그대로의 진실이 아닌 진실, 과장, 비유임을 얘기하고 있다.

과연 장로교 목사들 중에 이 신부님의 글처럼 비기독교도까지 수긍할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모르겠다. 우리 나라 장로교도를 상대하다 보면는 모르는 것이 한 가지 있다는 생각이들곤한다. 바로 역지사지이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방법을 아예 모른다. 그리고 개신교에 대한 비판은 모두 비판하는 사람이 을 몰라서 한 것으로 치부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잘못 없음을 항변한다. 이런 잘못이 밝혀지면 무조건 이단으로 몬다. 두타 스님의 머리에 손을 얹은 사람에 대한 장로교도의 입장은 "그 사람은 이단"이다.

문제는 이런 이단을 양산하는 장로교의 시스템(쉽게 교회를 만들 수 있는)과 이런 미친 신도를 양산하는 장로교의 시스템에 있다는 것을 인정할 줄 모르는다는 점이다. 이런 개신교도와의 논의는 정말 끝이 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논의의 시작과 끝을 아전인수로 하기때문이다. 예수의 실존은 이나 기독교사로서는 절대 입증할 수 없다. 예수가 역사적인 인물이기 위해서는 예수는 역사에 나타나야 한다.

예수 당시의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의 업적록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는 평생 세번의 국세 조사(인구 조사)를 했다. 기원전 28년, 기원전 8년, 서기 14년. 모두 예수가 태어난 해와는 거리가 있으며, 그 대상도 외국에 있는 사람을 포함한 것이 아니라 모두 국내에 있는 사람만을 대상으로 했다. 이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볼때 예수가 허구이거나 이 틀린 것 중 하나이어야 한다.

그러나 개신교도는 이런 역사적 사실을 오로지 과 기독교사를 근거로 예수가 태어났을 때 인구 조사가 있었다고 강변한다. 이렇게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면서 예수를 실존이라고 강변하는 것을 보면 역시 개신교도는 눈감고 귀닫고 입만 살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얘기가 잠시 옆길로 샌 것 같다. 다음은 위의 다섯 가지 질문에 대한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손희송 신부님의 답변이다. 기독교도이든 비기독교도이든 상당히 타당성있고 수긍이 가는 답변이다.

주님의 평화

안녕하신지요. 답변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먼저 제기하신 질문들은 결코 유치한 질문이 아니라 모두 상당히 깊은 수준의 질문이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신학을 전공으로 하는 사람들도 고민하는 그런 질문입니다. 질문하신 순서대로 답변을 시도해봅니다.

① 구약에 나타나는 야훼 하느님이 왜 고대 이스라엘 문화의 모습으로 나타나시는가?

하느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셔서 당신이 누구이신지, 당신 뜻이 무엇인지를 계시하셨습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히브리 노예들을 종살이 땅에서 해방시켜주심으로써, 당신이 자유와 생명을 원하고, 억압자 편이 아니라 억눌린 이들을 보호해주는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시나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시면서 십계명을 주셨는데, 그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1계명부터 3계명까지는 오로지 하느님만을 섬기라는 것이고, 4계명부터 끝까지는 인간 상호 간에 서로 해치지 말고 사랑하며 지내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위로는 오직 하느님만을 섬기고, 인간끼리는 지배와 종속 관계가 아니라 형제, 자매의 관계, 가족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이 십계명의 정신은 예수님이 주신 두 가지 계명, 즉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와 마찬가지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야훼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셔서 다른 백성들에게 빛으로 삼고자 하신 것입니다. 다른 이들도 이 백성이 하느님만을 섬기고 자기들끼리는 형제, 자매처럼 사는 모습을 보고서 야훼 하느님을 찾아 와서 믿도록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만 구원하기 위해서 그들을 택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서 다른 모든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셔서 당신 도구로 삼으신 것인데, 그러면서 이스라엘 민족의 여러가지 특성을 존중해주셨습니다. 번제, 정과 부정의 규정, 병자에 대한 규정 등. 하지만 신약의 시대에 와서 우리는 이것을 지켜야할 의무가 더 이상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근본적으로 구약의 율법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 선교를 하면서 이방인들에게는 유다인들에게 필수적이던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② 야훼의 폭력성

사실 구약성서에 보면 야훼 하느님이 자비로운 분이라기 보다는 폭력적이고 피를 요구하는 잔인한 신같이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구약성서 학자들도 이 문제에 대해 고심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선 성서의 성격에 대해서 전제를 해야 할 것입니다. 성서는 하느님이 그 내용을 불러주시고 인간이 그 말씀을 듣고 쓴 것이 아닙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계시인 동시에 인간의 글입니다. 말하자면 그 시대 인간의 문화와 생각을 전제로 하고 그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서서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가톨릭 계통의 책방(예를 들어서 명동의 바오로 서원)에서 성서 입문서를 소개받으시기 바립니다.

어떤 신학자는 구약성서에 나타난 야훼의 폭력성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 인간에게는 폭력성이 내재해 있는데, 이것을 하느님께 투사시킨 것이다. 인간 자신이 폭력에 물들어 있어서 폭력의 눈으로 하느님을 바라보았고, 그래서 하느님 역시 잔인하게 폭력을 휘두르는 분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구약성서는 서서히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는 과정에 있다. 그래서 구약성서의 내용은 자비로운 하느님과 폭력적인 하느님의 모습이 혼재해 있는 것이다. 이 과정은 신약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끝이 나는데,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아버지 하느님을 선포하면서, 이를 근거로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가르치신다. 실제로 그분은 십자가 상에서 자신을 못박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아버지 하느님께 간청하신다." (참조, 장익 엮음, [폭력], 분도소책 40, 분도출판사, 25-41쪽).

저도 이 해석에 동의합니다. 구약성서, 신약성서 모두 하느님을 계시하는 책이지만, 구약은 약속이고, 신약은 그 약속의 실현입니다. 계시의 중심은 신약성서가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 중심을 근거로 성서의 다른 내용들을 해석하는 것이 가톨릭의 오랜 성서 해석 방법입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신약의 입장에서 구약성서를 해석하고, 신약에 입장과 반대되는 구약의 내용은 받아들이지 않거나 달리 해석합니다.

③ 오경의 내용이 글자 그대로 진실일까?

글자 그대로 진실인 내용도 있고, 비유도 있고, 때로는 과장도 섞여 있습니다. 성서는 자연과학적 언어나 매스컴의 언어가 아닙니다. 사랑의 언어지요.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 하느님을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게 되었고, 자신들을 종살이 땅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주신 그 하느님께 무한한 사랑과 경외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상대방을 표현할 때 비유와 과정을 자주 사용하듯이 하느님께 대해서도 비유와 과장을 사용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구약성서의 모든 내용이 다 비유와 과장은 아니지요. 어떤 것은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를 두고, 세월이 흐르면서 뭔가 덧붙여지고 과장이 섞인 것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가려내기 위해서 바로 성서학 공부를 합니다. 가톨릭 계통의 서원에 구약성서의 형성과정에 대한 입문서가 비치되어 있을 터이니, 소개를 받아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출애굽기에 관한 것은 제가 쓴 책, 생활성서사에서 나온 [주님이 쓰시겠답니다]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④ 이스라엘과 의 보수 근본주의자들

이스라엘 의 강경론자들은 구약의 질서 속에서 머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땅이 하느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약속의 땅이기 때문에 한치도 양보할 수 없다고 확신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자신들의 땅을 지키기 위해서 무자비하게 행동하나 봅니다.

가톨릭 교회는 신약의 질서 속에서 더 이상 땅에 매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폭력을 불사하는 것에 동의하지도 않습니다. 의 보수 근본주의자들은 성서를 전체적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바처럼 가톨릭은 신약성서가 계시의 완성이라고 보면서, 신약성서의 입장에서 구약성서를 읽습니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입장에서 구약의 폭력적인 내용들을 따르지 않습니다. 반면 보수 근본주의자들은 자기들 구미에 맞는 구절을 신약과 구약을 가리지 않고 뽑아내어 자기 이익에 맞게 해석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성서에 대해 상당히 많은 의문을 갖고 계시는군요. 질문이 많다는 것은 관심이 많다는 것이고, 질문을 통해서 자기 신앙을 좀더 확실하게 다질 수 있습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이 자기 스스로의 신앙이 되기 위해서는 힘들더라도, 묻고 대답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고 봅니다.

단, 의문을 다 해결한 다음에 믿겠다고 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의문을 모두 해결하려면 아마도 일생이 걸리거나, 아니면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믿으면서 의문을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나에게 정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확신하신다면, 신앙의 길로 들어서세요. 그리고 의문은 하나 하나 풀어도 늦지 않습니다. 또한 믿음의 눈으로 볼 때에야 풀리는 문제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긴 대답이 되었습니다. 작게나마 도움이 되엇기를 바랍니다.

-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손희송 신부(교수)님

관련 글타래


Powered by Textc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