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기업이 없는 한국
굳이 오랜 시간을 거슬러 가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스타기업이 있었다. 도스 시절 V3로 결국은 국내 최고의 보안업체로 성장한 안랩, MP3P로 세계를 평정한 레인콤, 셋톱박스로 성장한 휴맥스 등. 젊은 피를 뜨겁게 달굴 수 있는 스타기업이 계속해서 만들어 졌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는 이런 기업이 자랄 수 있는 토양 자체가 없다. 우리경제가 어두운 이유는 별것 아니다. "삼성과 같은 재벌이 건전한 중소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토양 그 자체를 없앴기 때문이다".
1등 기업 삼성은 어떤 일을 했을까?
소니와 워크맨
일본을 대표하는 전자제품을 들라고 하면 내 또래에서는 당연히 워크맨이다. 카세트 테잎 하나 정도의 작은 크기, 리모콘으로 동작하는 이어폰, 걸어 다니면서 노래도 듣고 라디오도 들을 수 있다. 가격은 20만원 정도로 당시 물가를 생각하면 정말 비싼 전자제품이 워크맨이었다. 누적 판매 대수가 1억대로 추산되는 위크맨은 과거 아이팟 못지 않은 명성을 가진 전자기기였다. 따라서 내 또래의 사람들 중 집에 일제 워크맨 하나 없는 집은 거의 없었다.
워크맨의 주역인 소니에서 워크맨에 이어 들고나온 전략적 제품은 바로 MD였다. 워크맨 만한 크기에 CD 보다 작은 디스크(Mini-Disk)를 사용하는 휴대용 기기였다. 출시 당시만 해도 휴대용 카세트 레코더인 워크맨을 대치할 수 있는 제품으로 각광받았다. 또 시장은 소니 주도하에 워크맨에서 MD로 흘러갈 것으로 예상되었다.
소니를 압도한 한국의 중소기업
그러나 세계 시장은 소니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히 이야기 하면 우리나라의 중소기업은 소니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일본을 따라 가다가는 절대 일본을 잡을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우리의 중소기업이 보여주었다. 새한미디어의 계열사인 새한정보시스템[1]은 1998년 독일 하노버에서 열린 세빗(CeBIT)에서 엠피맨 F10이라는 세계 최초의 MP3 플레이어이를 선보인다[출처:MP3 플레이어].
그리고 휴대기기 시장은 MD가 아니라 MP3P로 흘러간다. 이어 국내 중소업체들의 MP3P 출시가 봇물을 이룬다. 당시 MP3는 쉽게 구할 수 있었으며 MP3를 가지고 다니면서 재생하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MD와 MP3는 분명히 음질의 차이가 존재한다. 혹자는 MP3의 음질을 카세트 테잎 보다 떨어지는 것으로 평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음질이 떨어지는 음악이라도 쉽고 편하게 듣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다.
일반인에게 MP3P는 싸고 저렴하며, 휴대하기 편한 휴대용 기기였다. 그리고 이런 MP3P 성장에 힘입어 세계적인 MP3P 전문기업으로 등장하는 업체가 바로 레인콤이다. 프리즘 형태의 차별화된 디자인, 싸다는 인식을 불식시키는 고가, 고성능의 MP3P를 생산함으로서 레인콤은 한때 세계 MP3P 시장의 5분의 1을 점유하는 전문업체로 성장한다.
음성 녹음기, FM 라디오, MP3 재생기, 어학학습등 다양한 기능을 내세운 레인콤의 아이리버는 디지탈 유목민의 필수품으로 자리잡으면서 국내 시장 점유율 55%, 미국 시장 점유율 30%, 세계 시장 점유율 20%을 달성[2]한다. 매출액도 99년 18억에서 2002년 800억, 2004년 4540억을 달성하는 등 급성장한다.
재벌의 시장 빼앗기
레인콤에 성공에 자극을 받은 삼성에서도 옙과 같은 MP3P를 내놓는다. 그러나 레인콤을 따라잡기는 사실 역부족이었다. 우리나라 재벌의 공식 중 하나는 중소기업이 파이를 키우면 시장을 빼았는 것이다. 얼마 전 원어데이가 키운 시장을 네이버가 빼았은 사례나 미투데이가 키운 시장을 SK에서 빼았은 사례등 재벌의 이런 짓들은 사실 차고 넘친다.
애플이 아이팟 1세대를 들고 나온 시점은 2001년으로 레인콤이 MP3P 시장에 뛰어들던 시점이다. 레인콤도 마찬가지고 애플도 마찬가지 지만 당시 MP3P 시장은 후발 업체가 먹을 것을 챙기기에는 너무 늦은 시기였다. 군소업체들이 지나치게 난립했고 경쟁이 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인콤은 기존업체들이 저가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에 착안 고급 스런 디자인과 고기능으로 무장한 MP3P로 시장 탈환에 성공한다.
반면에 애플의 아이팟은 출시초기 이렇다할 주목을 받지 못한다. 부가기능이 부족하고 지나치게 무겁고 가격이 비쌌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4년말을 기준으로 미국에서 시장 점유율 70%에 달하는 휴대용 기기로 성장[3]한다. 그러나 아이팟의 성세는 하드 디스크가 아닌 플래시 메모리를 탑재한 2005년에 시작된다. 2005년초 플래시 메모리를 사용하는 아이팟 셔플, 2005년 9월 컬러 디스플레이에 2GB, 4GB의 용량을 갖춘 아이팟 나노를 출시하면서 사실 세계 MP3P 시장을 평정한다.
삼성의 중소기업 죽이기
아이팟 나노가 갖추고 있는 가격적인 매력은 당시 국내 MP3P와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국내 MP3P 2GB의 가격보다 아이팟 나노 4GB의 가격이 더 싸다. 이 당시 애플에 플래시 메모리를 공급한 업체는 삼성이었다. 따라서 "삼성이 초저가에 플래시 메모리를 애플에 제공했기 때문에 이런 가격이 나올 수 있다"는 주장이 떠 돌았다. 아울러 삼성에서 이런 가격에 플래시 메모리를 제공한 것은 국내 중소 기업을 모두 죽이고 그 시장을 삼성이 차지하려고 한다는 기사까지 이어졌다.
이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당시 디지털 타임즈의 기사, [HOT 이슈진단] 삼성 낸드
, 애플 아이팟 나노
저가공급의 진실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 삼성이 애플에 공급한 플래시 메모리는 SLC가 아니라 MLC이며, MLC는 성능은 떨어지지만 가격은 30% 정도 싸다.
- 아이팟 나노의 가격 하락은 모든 부품 수급 공정에서 가격이 가장 싼 업체로 교체함으로서 가능했을 것이다.
- 애플의 성공이 삼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애플이 시장을 지배하면 구매력(Buying Power)이 커져 가격 결정권이 애플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 같은 조건이면 같은 가격에 공급한다. 단 2G의 가격을 4G 절반가로 낮출수는 없다. 4G는 저가, 2G는 가격 유지를 통해 플랜시 메모리의 고용량화를 추진하기 때문이다.
삼성측의 주장인지 아니면 디지탈 타임스의 입장인지는 모르겠지만 얼핏 생각하면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여기서 되짚어 볼 부분이 있다. 애플에서 "부품 수급 공정에서 가장 싼 업체로 교체했다"는 점이다. 즉, 당시 "플래시 메모리를 제공하던 업체 중 삼성이 가장 싸게 공급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두번째는 "같은 조건이면 같은 가격에 공급한다"는 부분이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국내의 어떤 기업도 애플 또는 삼성만큼 싸게 살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한다. 특히 2005년 초 삼성전자는 "MP3P 시장이 삼성-애플-소니의 3강 체제로 재편될 것"이라고 자신 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싸게 공급했을 개연성은 더 커진다.
2004년 국내 시장 점유율 50%를 차지하던 레인콤은 2005년 1사분기에도 31.3%로 1위, 코원이 12.3%로 2위, 삼성이 11.6%로 3위, 소니가 6%로 4위, 애플이 1.5%로 5위를 차지[4]한다. 그리고 2005년 9월 아이팟 나노가 출시되고 아이팟의 저가 공세가 시작된 직후인 2006년 삼성은 35%, 레인콤은 30%, 코원은 15%의 점유율을 차지[5]한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전년 대비 점유율이다. 레인콤은 2005년과 큰 차이가 없고 코원도 증가했다. 반면에 삼성은 무려 35%로 25% 가까이 증가한다.
애플의 가격공세에 직격탄을 맞은 업체는 바로 중소업체이다. 애플과 삼성 보다 비싸게 부품을 공급받고 같은 가격 경쟁을 해야 하는 중소기업은 살아 남기 힘들다. 결국 이들 중소기업이 점유했던 점유율의 상당수가 삼성의 점유율 상승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2008년으로 가면 이런 현상은 더 심해진다. 2008년에는 삼성 40%, 아이리버 20%, 애플 10%로 이제 레인콤을 제외하면 10%의 점유율을 가진 중소업체 조차 사라진다. MP3P 시장을 만들고 키운 중소업체가 없어졌다는 이야기이다.
중소기업이 키운 시장을 재벌이 집어 삼키는 것은 항상 있는 일이었다. 아무리 비난을 해도 우리나라 재벌은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또 이 과정에서 중소기업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저가 경쟁을 한다. 다음은 대우전자에 다니던 친구가 해준 이야기이다. 10여년도 더된 이야기지만 지금도 똑 같다.
친구: 그런데 대기업이라는 놈들은 하연간.
도아: 왜?
친구: 이사가 와서 "시장 점유율을 1% 높이는 방법"을 묻더라고 기술 개발을 한다. 마케팅을 한다 등등의 의견이 나왔는데
친구: 이사 왈, "시장 점유율이 1%인 회사를 산다"라고 하더군.
친구: 그러고는 "개발은 나중에 해. 다른 회사 다 망하고 한 두개 남으면 그때 정말 개발하는 거야"
그러나 결과적으로 삼성은 다른 업체가 저가 경쟁을 해준 덕에 중소기업이 키운 시장을 욕도 먹지 않고 집어 삼겼다[6]. 삼성에서 하는 일 중 불법은 별로 없다. 법을 잘 알기 때문이다. MP3P 시장에서 1위를 하고 있는 삼성. 그러나 그 1위에는 중소기업의 피눈물이 섞여있다.
스타기업이 없는 한국
다음은 비즈니스 위크는 2004년판이다. 2004년 비즈니스 위크를 보면 레인콤의 아이리버의 점유율이 21.5%로 플래시 메모리 기반 MP3P 시장에서 1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애플은 이때까지 플래시 메모리 기반 MP3P는 출시하지 않고 있으며, 하드 드라이브 기반 MP3P 시장을 76.2% 점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이팟의 저가 공세에 국내 MP3P 시장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레인콤이 세계 시장에서는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기업으로 전락했을까?
굳이 오랜 시간을 거슬러 가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스타기업이 있었다. 도스 시절 V3로 결국은 국내 최고의 보안업체로 성장한 안랩, MP3P로 세계를 평정한 레인콤, 셋톱박스로 성장한 휴맥스등. 젊은 피를 뜨겁게 달굴 수 있는 스타기업이 계속해서 만들어 졌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는 이런 기업이 자랄 수 있는 토양 자체가 없다. 우리경제가 어두운 이유는 별것 아니다. 삼성과 같은 재벌이 건전한 중소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토양 그 자체를 없앴기 때문이다.
삼성이 망하면 정말 나라가 망할까?
- 후에 앰피맨닷컴으로 사명이 바뀌고 2003년 7월 부도를 낸 뒤 경쟁사인 레인콤에 흡수되었으며 원천기술도 미국 기업에 넘어간다. ↩
- 레포트 사이트에 올라온 분석자료이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
- 하드 드라이브를 기반으로 한 MP3P를 말한다. 플래시 기반 MP3P는 아이리버가 1위이다. ↩
- GfK 마케팅 코리아 서비스의 통계 자료라고 한다. ↩
- 통계 주체가 다르기 때문에 단순한 추세로만 받아드리기 바란다. ↩
- 애플이 저가 공세를 펼치며 1.5% 점유율을 9%까지 끌어 올렸다. 그러나 애플의 점유율은 여기서 더 증가하지 않는다. 따라서 국내 시장에서 애플은 삼성이 MP3P 시장을 평정하는데 1등 공신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