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출처: (-.-)a “기자님, ‘네티즌 반응’은 왜 쓰나요?”]
어제 올린 글, 누리꾼과 누리개에 누리꾼이라는 말을 아시나요?라는 역인글이 붙어 이 글을 읽다가 누리꾼과 언어의 생명력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역인글(누리꾼이라는 말을 아시나요?)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누리꾼[1]이라는 말은 모두가 함께하는 우리말 다듬기라는 사이트에 선정한 것이다. 아울러 모두가 함께하는 우리말 다듬기라는 사이트에는 동아일보[2]가 참여하고 있다는 것과 누리꾼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선정됐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역인글의 글쓴이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언어는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태어나서, 성장하고, 경쟁하다 소멸된다. 언어는 생명력있다. 만약 생명력이 없는 말이라면 아무리 언론에서 떠들어도 사라진다. 누리꾼이라는 단어가 생명력이 없다면 당연히 조만간 사라질 것이다.
내가 대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1987년) 일이다. 통일문제연구소의 백기완씨의 강연이 있었는데 이때 백기완씨는 서클 대신 동아리, 신입생 대신 새내기, 터널 대신 맞뚫레라는 말을 사용하자고 했다. 학교마다 강연을 하며 시위를 주도하던 백기완씨의 제안이다 보니 언론은 이말을 완전히 외면했다. 그러나 지금은 서클이라는 말보다는 동아리라는 말이, 신입생 대신 새내기라는 말이 주로 사용된다.
그 이유가 무었일까?
왜 동아리와 새내기는 제도권으로 편입됐는데 맞뚫레는 그러지 못했을까?
그건 언어의 생명력 때문이다. 동아리라는 말이 태어나고, 여러 사람들이 사용하고, 결국 서클과 경쟁, 그 경쟁에서 이겼기 때문이다.
누리꾼이라는 말이 생명력이 없다면 제 아무리 언론에서 대고 짓어대도 곧 사라질 것이다. 생명력이 있다면 앞의 동아리와 새내기처럼 넷티즌이라는 말과 경쟁, 언젠가는 제도권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누리꾼'이라는 말의 대표성이나 조중동의 의도에 의혹의 눈길을 보내기 보다는 이 말이 생명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지켜보며 가꾸는 것이 우리말의 발전을 위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3].
- 당시에 있던 후보들중 '넷티즌'이라는 말의 뜻에 가까운 말을 찾으려면 역인글(누리꾼이라는 말을 아시나요?)에서 언급한 것처럼 '전자 시민'이 더 가깝다. 그러나 의미에만 충실하면 생명력이 떨어진다. 물론 의미에도 충실하고 생명력도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
- 블로그에 올린 글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나도 조중동을 무척 싫어한다. 그러나 조중동이 하는 모든 것들에 의혹의 눈 빛을 보내지는 않는다. ↩
- 이 글은 '언어가 언론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뜻으로 쓴 글이 아니다. 언론의 영향을 받는다고 해도 '생명력이 없다면 한때 유행으로 사라진다'는 뜻으로 쓴 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