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잘 읽었습니다. 다른 단어로 바뀌어 쓰이고 있지만 (개인적인 주관으로) 실제로는 적절치 못하다고 생각하는 말들이 쓰이는 것들을 언론이 가진 언어 지배력으로만 생각했지, 그 단어가 가진 생명력이라는 방향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거든요. 제가 너무 패배주의적인 사고를 가진게 아닌가 반성하게 됩니다. 확실히 언중도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겠죠. ^^
예... 한님.
저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 사용되는 것을 종종 보곤합니다. 아울러 정말 어울리는 말이 사용되지 않는 것을 보며 안타깝게 생각을 하기도 하고요. 그러나 문제는 제가 어울린다고 생각을 해도 그 말이 사용되지 않는 것은 많은 사람들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물론 여기서도 언론의 지배력은 피해갈 수 없는 부분이겠죠.
한 예로 글쇠에 보면 글자와 글자를 띄울때 쓰는 글쇠(스페이스바)를 사이띄개라고 합니다. 컴퓨가 보급되던 초창기에는 스페이스나 사이띄개나 비슷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아울러 스페이스 보다 의미도 명확하고 글자수도 같습니다. 스페이스를 밀어내고 사이띄개가 사용될 것으로 예상했었는데 요즘은 사이띄개보다는 스페이스가 더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어릴적 교육의 영향인지 아니면 항상 두개의 언어를 사용해온 습관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의미도 분명하고, 어감도 좋은 우리말 대신 외래어가 우리말을 치고 앉아 있는 것을 보면 저도 한님처럼 언론의 무관심때문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제가 걱정하는 것은 누리꾼의 생명력이 없다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다수의 인터넷 언론에서 누리꾼을 사용하고 있죠. 만일 네티즌들이 이 단어가 과연 적당한 단어인지를 생각하지 않고 언론의 권위에 이끌려 사용하게 된다면 생명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언어의 생명력은 이제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한 것이 현재의 사회라고 보거든요.
언어를 너무 무시하는 것 같군요. 글에서 언급한 동아리나 새내기는 철저한 언론의 무관심속에서 제도권에 편입된 언어입니다. 언론에서 일시적으로 생명력을 조작할 수 있어도 끝까지 살아남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 언어가 네티즌들 사이에 사용되어 제도권으로 편입된다면 그것은 언론의 힘이 아니라 그 언어의 생명력입니다. 아울러 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네티즌이 우매하지는 않습니다.
언어가 생명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지켜보며 가꾸자는 것은 제게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언중에게 맡겨보자'는 말로 인식되었습니다. 하지만 도아님이 언급했듯 원래 자리에 있어야 할 말 대신에 이상한 말이 쓰이는 것을 보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요. 우리 역시 언중에 속하는 이상, 언중에게 맡긴다는 것은 언중으로서의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동아리는 언론의 무관심이 있었다고는 말하기 힘듭니다. 오히려 동아리라는 용어의 대한 적극적인 대학생들끼리의 계몽과 전파가 있었습니다. 선후배간의, 그리고 주도층과 비주도층간의 권위가 동아리라는 단어의 정착에 큰 도움을 주었고, 아울러 써클이라는 단어 자체가 그 강한 발음으로 동아리에 비해 어감 등의 면에서 떨어졌기에 그 정도로 동아리라는 단어가 정착이 되었던 것입니다. 즉 대학 자체내에서 언론의 주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네티즌들이 그렇게 우매하지 않다는 점에서는 동감합니다. 다만 이미 말했듯이 네티즌 스스로 단어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면 제가 말하는 대로 되겠지요. 이 누리꾼이라는 단어가, 어감이 괜찮은 편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 단어의 조어를 분석하지 않으면 문제점을 느끼기 힘들 정도입니다. 언어의 생명력을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말은 확실히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인위적으로 조종이 가능하다는 말로 고치겠습니다.
대학생들의 계몽과 전파를 했다고 해도 언론은 무관심했죠. 님은 대학생을 언론으로 보십니까?
아울러 대학생들이 계몽, 전파했다고 해도, 소수죠. 동아리라는 말을 일부 대학생들이 사용하고, 그 말을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계되고 결국 제도권으로 들어왔습니다. 따라서 이 부분은 계몽과 전파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력의 문제입니다. 쉬운 얘기로 아이들보고 빨리크라고 계몽, 전파한다고 빨리 자랄 수 있습니까?
또 굳이 어감을 운운할 필요도 없습니다(어감이 않좋다면 생명력이 당연히 떨어지니까요).
두번째 님이 말한대로 절대 되지 않습니다. 어차피 님은 가정을 통해 논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님의 가정과 반대의 가정을 하면 절대 되지 않죠. 어차피 가정이란 어떻게하느냐의 문제이지 사실의 문제는 아니니까요. 그리고 네티즌이 우매하지 않다고 하면서 생각없이 받아들인다는 가정은 조금 이율배반적인 것 같군요. 차라리 대중은 무지하다. 따라서 그들의 믿기보다는 내가 끌고가겠다는 논리가 훨씬 더 마음에 와닿을 것 같군요.
님이 누리꾼을 반대하는 것과 제가 찬성하는 것, 결국 언어의 생명력입니다. 생명력이 없다면 님이 반대하지 않아도 사라집니다. 수없이 많은 언어가 그랬습니다. 그 많은 말들이 생각하고 반대하고 찬성해서 만들어 졌다고 보싶니까?
가꾼다는 것은 그런 뜻이었군요. 제가 오해했습니다. -_-;;
저는 조중동에 대해 별로 비판의식도 없음을 우선 말씀드립니다.(우리집에서는 동아일보를 봅니다) 다만 누리꾼의 대표성에 대해 논하는 것은 언중으로서 당연한 자연적인 일이며 님께서 말하시는 '경쟁'에 해당하는 필요한 논쟁이며, 님께서 말하시는 가꾸는 일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점에서 의견이 상충되는 것 같네요.
앞서 언급했듯 소모적인 논쟁보다는 적극적인 참여가 낫습니다. 님이 이글을 쓰고 있을 그 시간에 누리꾼보다 나은 말을 찾아 퍼트리는 것이 우리언어 발전에 훨씬 도움이됩니다. 가꾼다는 것은 못마땅하다고 밟는 것이 아닙니다(님에게 못마땅해도 다른 사람에게는 좋은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대안없는 비평은 비난입니다. 누리꾼이 못마땅하다면 거기에 합당한 대안을 제시한 후 논쟁을 시작해도 늦지않습니다. 어차피 경쟁입니다. 다른 말이 제시되고 그 말을 사용하고, 그 말이 힘을 얻으면 그말이 결국 경쟁에서 승리하게됩니다.
님은 이런 대안없는 논쟁을 계속하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어떤 이득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이러한 대안없는 논쟁은 TV 토론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대안없는 비평, 합의 없는 논쟁에는 모두가 지쳐있으니까요.
저는 언론이란 것을 그렇게 크게 보지 않습니다. 뭔가를 말하는 것이 권위와 전파성을 가진다면 그것이 언론입니다. 굳이 신문, 방송을 만들지 않더라도 충분히 언론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한 것은 물론 가정이지만, 그렇다고 가능성이 없다고는 볼 수 없죠. 저는 그 가능성을 죽여버리기 위해 누리꾼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님께서 말하시는 경쟁에 해당합니다.
대안이 없다고 해서 명백히 잘못되어가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을 가만히 놓아둘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누리꾼보다는 네티즌이 원 뜻에 닿는 올바른 단어라고 생각하며, 또한 누리꾼을 대체할 단어도 생각중입니다. 그 결과 '이은', '통신인' 등 몇가지 떠올렸지만 뜻에 정확히 맞으며 부르기 쉬워야 한다는 원칙에 안 맞고 있기에 아직 아무것도 내세우지 못할 뿐입니다. 이건 결코 소모적인 논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글을 처음부터 잘못읽으셨군요. 제글에서 언론은 계속 조중동과 같은 제도권 언론을 의미했습니다. 아울러 언론의 무관심에서 얘기한 언론 역시 말의 앞뒤를 살펴본면 알 수 있겠지만 제도권 언론을 얘기하고 있습니다(우리는 광의의 언론에대한 정의를 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들은 조중동을 얘기하는데 님은 님이 생각한 언론으로 얘기(정몽준식 화법이라고 하나요)한다면 무슨 논의가 되겠습니까?
이런 논의는 앞서 언급했듯 TV 토론에서 많이봐왔습니다. 논의를 원한다면 최소한 기본적인 단어의 사용 정도는 일치 시키고 논의해야 하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대안없는 비판의 다른 말이 무었인지 아십니까? 반대를 위한 반대입니다. 아울러 님의 말처럼 대안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면 논쟁이 아니라 논의입니다. 님이 하고 있는 것은 논쟁이고요.
그리고 한가지 더 지적하자면 논의를 하기위해서는 주제를 확산시키지 말기바랍니다. 누리꾼에대한 논쟁이 소모적인 논쟁이기때문에 그만 두라고 얘기한 것이 아니라 조중동의 의도에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대표성을 운운하는 것보다는 보다 현실적인 방법으로 우리말을 가꾸는 것이 낫다고 얘기한 것입니다.
이걸 누리꾼에대한 논쟁은 소모적인 논쟁이라고 얘기한 것으로 해석하고, 누리꾼에대해 애기하는 것이 소모적인 논쟁이 아니라고 답변하면 정말 할말이 없습니다.
눈이 있어도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 글은 읽어도 뜻을 모르는 사람, 뜻은 알아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과의 논쟁은 그 주제가 무었이든 소모적인 논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애시당초 누리꾼에대한 얘기는 논쟁이 아니라 논의여야 합니다. 외계어 같다는 댓글이나, 그 말에 동조해 여기저기 다니면서 논쟁을 벌이는 것 보다는 한글 학회같은 전문 학회에 서면으로 자문을 구하고 그런 자문을 통해 누리꾼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동조자를 구해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훨씬 나은 방법입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누리꾼(우리말)에대한 논쟁은 소모적인 논쟁일 수 없습니다. 아울러 이런 논쟁은 논쟁이 아니라 논의여야 합니다.
그러나 님의 논쟁은 누구에게도 득이될게 없는 소모적인 논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님께서는 대안 없는 비판을 논하고 계시지만, 비판 없이 대안이 탄생할 수는 없으며, 소수가 적절한 대안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이런 논쟁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문제점을 말해 공감대를 형성하면 대안은 더 잘 나오는 법입니다. 당장 대안을 말할 수는 없지만 누군가 궁시렁거릴 수는 있으며, 혼자만의 궁시렁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면, 더 많은 사람의 궁시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충분히 의미있는 일입니다.
아울러 언어의 생명력은 결국 언중에게 달려있습니다. 동아리라는 단어가 정착된 것에 대학생들의 우리말에 대한 생각이 있으며 그 전파과정에도 또한 그 생각이 녹아있음을 모르시겠나요? 누군가 누리꾼과 네티즌을 말할 때 생각과 반대와 찬성이 없이 사람들이 말할 단어를 선택하겠습니까?
"아울러 언어의 생명력은 결국 언중에게 달려있습니다. 동아리라는 단어가 정착된 것에 대학생들의 우리말에 대한 생각이 있으며 그 전파과정에도 또한 그 생각이 녹아있음을 모르시겠나요?"
언어의 생명력입니다. 그 언어가 왜 대학생 사이에 정착되고 전파되었겠습니까? 생명력이 없는 언어가 대학생 사이에 정착되고 전파됐다고 생각하십니까? 생명력이라는 것은 앞서 언급했듯 만들고자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죽어가는 아이를 님이 노력한다고 해서 살릴 수 있습니까? 어느 정도 생명을 연장을 할 수 있겠지만 살고 죽는 것은 님의 문제가 아니라 그 아이 문제입니다.
알겠습니다. 언론이란 것을 제쪽에서 무리하게 일반화시켜버렸군요. 언어의 경쟁에 인위적인 요소가 주는 영향을 님께서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적게 보시기에 광의의 언론으로서 대학생들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론이라 하지 않고 동아일보라고 하겠습니다. 저는 언중의 의식을 무시하지는 않습니다만, 동아일보와 그외 누리꾼을 사용하는 언론사의 권위에 의해 그 의식이 활동하지 않는 경우 역시 무시하지 않습니다. 저는 생각하는 대중은 믿지만 생각하지 않는 대중은 믿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이런 논쟁으로 대중을 생각하게 해야한다고 믿습니다.
제가 결국 직접적으로 대안을 만들기 위한 '논의'가 아니라 '논쟁'을 하고 있다는 것 역시 인정합니다. 이것은 논의도 토론도 못됩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저는 논쟁 역시 필요하다고 봅니다.
생명력은 만들고자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둘 사이의 경쟁에서 어느 한쪽을 편들어 줄 수 있으며, 나서지 않으면 경쟁에서 질지도 모르는 한쪽을 누군가가 나서서 이기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언중의 힘입니다. 언어의 생명력이란 처음부터 이기거나 지도록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언어의 경쟁에 인위적인 요소가 주는 영향을 님께서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적게
> 보시기에 광의의 언론으로서 대학생들을 들었던 것입니다.
이 역시 님의 오해입니다. "이 글은 언어가 언론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뜻으로 쓴 글이 아니다. 언론의 영향을 받는다고 해도 생명력이 없다면 한때의 유행으로 사라진다는 뜻으로 쓴 글이다."라는 제글에서 알 수 있듯이 언론의 영향을 받지만 그 보다는 언어의 생명력이 훨씬 강하다는 뜻으로 쓴 글입니다. 즉, 인위적인 요소가 주는 영향이 적다는 뜻이아라 아무리 커도 생명력이 있다면 제자리를 찾는다는 뜻입니다.
동일한 예는 아니지만 신정과 구정(지금은 설이죠)을 예로 들어보죠. 조금 부적절할 수 있겠지만 설은 우리 생활에 가장 밀접한 관습이고 언어는 우리가 항상 사용하고있는 습관이니 아주 부당하다고는 할 수 없겠죠.
신정은 갑오개혁 이후 양력을 공식력으로 사용하면서 1896년1월1일을 新正이란 이름으로 설을 쇠도록 홍보하였고, 1945년 광복 후 정부의 노는 날을 줄이고 낭비를 억제해야 한다는 경제부흥의 논리에 밀려 달력에서 설날이란 글자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신정도 구정도 아닌 설을 새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었이겠습니까? 무려 110년간 정부와 언론이 그토록 노력했는데도 불구하고 설하나 못바꾸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었이라고 생각합니까?
언어의 생명력은 님이 상상하는 것 이상입니다. 물론 제 얘기가 그냥 두어도 잘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분명 우리말 역시 우리가 가꾸면 그만큼 더 성장합니다.
그러나 누리꾼에대한 논쟁보다는 우리말의 조어력을 어떻게 높일 수 있는가에대한 논쟁이 훨씬 생산적인 논의입니다. 그러나 누리꾼에대한 논쟁에는 거품을 물고(미안합니다) 달려들 수 있어도 조어력에대한 논의는 먼산 불구경하듯 합니다. 뭐가 문제일까요?
> 생명력은 만들고자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도 동의합니다.
> 그러나 둘 사이의 경쟁에서 어느 한쪽을 편들어 줄 수 있으며,
> 나서지 않으면 경쟁에서 질지도 모르는 한쪽을 누군가가 나서서 이기게 할
> 수도 있습니다.
예. 어느 정도는 동의합니다. 다만 경쟁에서 질지도 모르는 한쪽을 편드는 것보다는 우리 언어의 전체적인 생명력(한 예로 조어력이되겠죠)을 향상 시킬 수 있는 쪽으로 진행되어야 겠죠.
> 언어의 생명력이란 처음부터 이기거나 지도록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이기거나 지도록 결정되어 있다면 생명력이 아니죠. 생명력이란 살아남는 능력을 얘기합니다. 즉, 님의 표현에따르면 이기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 이 덧글에도 님의 생각이 변하지 않는다면 이 논쟁은 그만두겠습니다.
님의 글에 수긍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님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바꾸려 하고 있습니다. 이 것은 님이 비난하는 동아일보의 행위를 님 역시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말만들기에도 과학의 방법론을 맞추어 써 보면 어떨까요?
예를 들어,
TV=Tele+Vision=먼+그림
이럴 때, 우리말로 바꾸려면 거꾸로 맞춰보면 되겠지요...
그냥 "먼그림"이라고 해도 될 겁니다.
조금 뜻과 말을 맞게 해보자면 "먼그림틀", "멀(먼)그리개"로 해도 되겠고,
귀맛(어감)을 더 좋게 하자면 또 다른 이름도 만들 수 있겠죠.
덧 : 다른 얘기겠지만, 영어로 "TeleVision"은 어색하거나 촌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우리말 "먼그림"은 어색하다거나 촌스럽다고 생각하는 것, 바로 그 자체가 오랜 사대주의와 그에 따른 말글살이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예는 수도 없이 많죠.
영어로 "TeleVision"은 뜻과 말이 똑 맞지 않는다고 따지는 사람이 없어도, "먼그림"은 - 'TeleVision'을 말 그대로 옮겨놓은 것임에도 - 뜻과 말이 맞지 않아 쓸 수 없다고 쎄우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제 생각이 지나친 것일까요?
> 말만들기에도 과학의 방법론을 맞추어 써 보면 어떨까요?
> 예를 들어,
> TV=Tele+Vision=먼+그림
> 이럴 때, 우리말로 바꾸려면 거꾸로 맞춰보면 되겠지요...
> 그냥 "먼그림"이라고 해도 될 겁니다.
> 조금 뜻과 말을 맞게 해보자면 "먼그림틀", "멀(먼)그리개"로 해도 되겠고,
> 귀맛(어감)을 더 좋게 하자면 또 다른 이름도 만들 수 있겠죠.
좋은 방법입니다. 먼그림이 조금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 것은 Vision과 그림이 정확히 일치하는 단어가 아니기때문인 것 같습니다. 우리말 중 물이나 거울에 비친 모습에 해당되는 말이 있다면 그 말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더군요.
참고로 요즘 어머님께서 컴퓨터를 배우십니다. 가장 어려워하시는 부분이 스페이스, 이스케이프와 같은 외래어 키 이름 입니다. 그냥 우리말로 스페이스는 사이뛰개, ESC는 취소 키, 역스페이스는 지우개라고 하면 될텐데 왜 그렇게 가르치는 모르겠다고 했더니 이걸 적어달라고 하시더군요.
그러나 문제는 사이띄개로 알려드려도 강사는 스페이스라고 할테니 무용지물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따라서 언어 교육은 교육 현장에 있는 사람을 먼저 교육해야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스페이스보다는 사이띄개가 의미도 훨씬 명확하고, 글자수도 같습니다. 그런데도 스페이스가 사이띄개를 밀어내는 것을 보면 조금 아타깝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