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숭이를 만드는 시스템
숫자가 조금 커지면 수를 세기위해 우리는 어렸을 때 배운 손가락 셈을 한다. 만물의 영장? 웃기는 소리다. 적어도 큰 수를 셀 때는 우리는 원숭이와 다를 바 없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상황에 대해 어느 누구도 이의제기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네자리로 끊어 읽기
나는 꽤 오래 전부터 숫자를 표기할 때 '세자리'가 아닌 '네자리'로 끊어서 표시하고 있다. 처음에는 오타로 알던 사람들은 이제는 네자리가 잘못된 표기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숫자를 네자리마다 끊는 것은 잘못된 표기가 아니다. 우리의 언어 습관에 비추어 보면 오히려 정확한 표기다. 아울러 세자리마다 끊어 읽는 것은 정확한 표기가 아니라 '익숙한 표기'에 불과하다. 2008년 정부 예산은 195조1000억원이라고 한다. 그러면 세자리마다 끊어 읽는 사람은 조 단위인 다음 숫자를 얼마나 빨리 읽을까?[1]
838,924,843,267,102원
은행업무를 보던 사람이 아니라면 대부분 마지막 자리수 부터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천만 억 십억 백억 천억 조로 단위를 확인하고 조부터 역순으로 8백 3십 8조 9천 2백 4십 8억 4천 3백 2십 6만 7천 백 2원으로 읽을 것이다. 이렇게 읽는 시간은? 그러나 숫자를 네자리로 끊어서 똑 같은 수를 읽어 보자.
838'9248'4326'7102원
우리 말에서 수체계는 네자리마다 만, 억, 조로 증가하기 때문에 838조 9248억 4326만 7102원으로 바로 읽을 수 있다. 이 현상을 처음 본 사람은 무척 신기할 것이다. 그러나 이건 신기한 게 아니라 당연한 현상이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우리말은 만, 억, 조, 경의 단위를 사용하며, 네자리마다 단위가 올라간다.
반면에 미국이나 유럽은 Thousand(천), Million(백만), billion(십억)으로 세자리마다 단위가 올라간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세자리로 수를 끊어 읽으려면 세자리 단위의 용어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언어 습관을 무시하고 세자리마다 끊어 읽도록 하고 있다. 이렇기 때문에 숫자가 조금 커지면 모든 국민이 원숭이처럼 손가락으로 자리수를 꼽고 수를 읽어야 한다.
억단위는 한손으로 단위를 꼽을 수 있지만 조 단뒤는 이제 한손으로 꼽을 수 없다. 경 단위를 넘어가면 두손으로 꼽는 것도 힘들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 국회의 예산이 경을 넘는다면 국회에는 숫자만 전문적으로 읽어 주는 사람을 두던가 아니면 숫자를 한글로 써두어야만 읽을 수 있는 때가 올 수도 있다.
130m가 몇 평이예요?
아파트를 분양하는 곳마다 벌어지는 일이라고 한다. 작년 7월 부터 미터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과태료를 부과하겠다고 정부가 규제에 나섰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무식한 정부인가?
구정, 신정과 숫자 끊어 읽기
우리나라는 1961년 부터 평, 근, 돈과 같은 척관법을 금하고 미터법을 사용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무려 50년이 지난 지금도 생활에서는 평, 근, 돈과 같은 척관법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한때 우리나라에는 두개의 설이 있었다. 바로 양력 1월 1일 신정과 음력 1월 1일 구정[2]이다. 일제 시대 양력이 도입되면서 유래된 신정과 구정은 일본이 우리말, 우리글을 죽이고 창씨개명을 하는 듯 민족혼을 빼았기 위해 사용하기 시작한 말이다.
그러나 구정이라는 개념이 고착화 된것은 바로 박정희 탓이었다. 박정희는 역모로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세계화라는 명목으로 설을 일본의 민족말살 정책의 일환인 구정으로 몰며, 설에 학생을 등교시키고 공문원을 출근 시키고 사기업에도 반드시 신정을 세도록 강제했다. 그리고 50년 가까이 지났다.
그 결과는?
음력 1월 1일이 설로 굳건히 자리를 잡았다. 다른 얘기일 것 같지만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오천년을 내려온 전통을 법이라는 이름으로 하루 아침에 바꿀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도량형을 미터법으로 바꾸면서 내세운 논리는 대부분 세계화였다.
법정계량단위의 필요성은 국제무역에서도 시급하다. 현재 한-EU FTA가 진행 중이지만 유럽연합의 경우 2010부터 역내로 수입되는 모든 제품에 미터법 사용을 의무화하게 된다. 따라서 앞으로 미터법단위를 사용하지 않은 제품은 유럽에 수출할 수 없게 된다고 하니 더 늦출 수 없는 상황이다.
전세계에서 상당히 많은 나라가 '내수용과 수출용을 따로 만든다'. 왜? 언어가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출용에는 미터법을 적용하면 된다. 지금까지 그렇게 적용되어 왔다. 그리고 수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관습을 버리도록 강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터법의 나라, 미국에서도 마일, 야드와 같은 관습 단위가 그대로 쓰인다. 그런데 왜 우리만 우리의 관습을 버리고 미터법을 따라야 할까?
작년에 미터법을 강제하면서 TV에 나온 홍보 동영상을 보면 마일을 미터로 변환하는 프로그램에 버그가 있어서 우주선이 추락한 것처럼 나온다.
1999년 9월 미국의 '화성 기후 궤도선'이 화성에 진입하며 폭발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1억25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1조 원 가까이 되는 거금을 들여 만든 우주선이 286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부서진 것이다. 이 사고의 원인은 통일이 안 된 단위 문제였다. 록히드마틴사가 미국에서 일반적으로 쓰는 야드를 기준으로 설계한 우주선을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미터법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결국 NASA가 잘못 계산한 추진력 탓에 탐사선은 예정된 100km보다 낮은 60km 궤도에 진입하며 대기와 마찰을 일으켜 폭발하고 말았다. 미터법이 대체 뭐길래 우주선의 생사까지 좌지우지하는 걸까.
(중략)
올해부터 우리나라에서도 평, 돈, 근 같은 예전 도량형을 사용할 수 없게 됐다. 아파트의 넓이를 표기할 때 '32평'이 아닌 '105.79㎡'이라고 써야 한다는 얘기다. 익숙했던 명칭을 버리고 미터나 그램 단위만 써야 하니 역시 불편하다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도량형이 통일이 안 되면 화성 궤도선 사건처럼 어이없는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 특히 정교함이 생명인 과학 분야에서는 도량형 통일이 매우 중요하다. 다행히 화성탐사선 사건을 계기로 도량형 통일의 필요성을 깨달은 NASA는 올해 1월, 달 탐사에 미터법을 쓰겠다고 공표했다. 또 우리나라나 유럽, 일본의 우주국은 모두 미터법을 따르고 있다. 이제, 미터법은 국제를 넘어 우주 표준으로 자리잡은 셈이다.
우리나라에서 건축물을 설계하면 척관법을 쓰는 곳이 과연있을까? 우주선은? 사람들이 실생활에서 접하지 않는 것은 모두 미터법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가 척관법을 사용하는 곳은 시장, 땅처럼 생활중에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실생활에서 까지 미터법을 적용하도록 강제한 것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모르는 무식한 정부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미터법은 세계 표준이다. 세계 공용어이다. 따라서 미터법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언어 체계에 없는 것까지 법으로 강제할 이유가 있을까? 인치는 원래 외국에서 온 단위이므로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나 평과 근은 굳이 바꿀 필요가 없는 부분이다. 물론 근이라는 단위는 고기의 단위(600g)와 채소의 단위(400g)가 서로 다르다. 모르는 사람에게 분명히 혼동을 줄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실생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오히려 미터법과 척관법을 병행하면 오히려 더 명확해 진다. 지금까지 그래왔다.
특히 숫자는 더욱 그렇다. 평과 근은 미터법으로 표기할 수 있지만 숫자는 아예 단위가 없다. 그러니 숫자가 조금 커지면 손가락을 꼽는다. 과연 이 것이 '오천년의 역사를 가진 민족의 셈법인가?' 숫자는 네자리마다 끊어서 읽어야 한다. 장기적인 관점에서도 네자리마다 끊어 읽는 것이 국가적으로도 훨씬 이득이다.
숫자를 세자리로 평생 끊어 읽어도 큰 수를 읽는 데에는 손가락을 사용하지만 네자리로 한달만 끊어 읽어도 네자리로 끊어 읽는 습관을 들일 수 있다. 왜? 네자리로 끊어 읽는 것이 우리 언어 체계에 맞기 때문이다. 네자리로 숫자를 끊어 익다보면 세자리로 끊어둔 숫자도 훨씬 빨리 읽는다. 그이유는 손가락을 꼽는 것이 아니라 4, 8, 12로 마음속으로 수를 끊어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국으로 보내는 문서를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 요즘은 모두 전산화되어 있다. 계산이 포함되는 서식 파일은 우리가 네자리로 설정해서 사용해도 언어 설정만 바꾸면 세자리로 표시된다. 외국으로 보내는 문서는 보내는 사람이 조금만 더 신경쓰면된다. 작은 숫자는 그냥 입력하고 큰 숫자는 계산한 뒤 복사하기 때문에 별 문제도 없다.
숫자, 지금부터라도 네자리로 끊어 읽자
남은 이야기
구정을 폐지하고 신정만 쇠도록한 박정희를 비난하고 있지만 나는 박정희의 덕을 보는 셈이다. 그 이유는 처가 집은 양력 1월 1일에 설을 세고, 본가는 음력 1월 1일에 설을 세기 때문이다. 따라서 처가 집에서 설을 쇨 때는 본가에 가지 않아도 되고 본가 에서 설을 셀 때는 처가에 가지 않아도 된다.
- 이 글을 작성한 동기는 작은인장님의 숫자의 ',' 사용에 관해서....라는 글이다. ↩
- 이젠 신정, 구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음력 1월 1일을 설, 양녁 1월 1일을 새해 또는 신년이라고 부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