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
부석사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부석사 무량수전이다. 교과서에서는 귀가 닳도록 들은 부석사지만 막상 와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일단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뒤 배가 고파 밥을 먹을 만한 곳을 찾았다. 지도에는 부석사 종점 식당만 있는 것으로 나와있는데 의외로 비슷하게 생긴 음식점이 많았고 하는 음식도 거의 같았다. 지금 기억으로는 산채정식, 산채비빔밥, 청국장, 간고등어 정도가 눈에 띄었다.
목차
주말 여행
문경 종합 온천 - 충주 이야기 47에서 설명한 것처럼 오랜 만에 오랜 시간 온천욕을 즐겼다. 주말 여행을 자주 다닌 덕인지 우영이와 다예는 바로 집으로 가는 것이 못마땅한 듯했다. 결국 우영이는 문경에서 하루밤을 지내고 가자고 조르고 다예도 오빠를 따라 졸랐다. 문경에서 충주까지 거리는 한시간 거리라 여기서 하루를 묵는 것 보다는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일단 중앙 고속도로를 타기로 했다. 중부 내륙 고속도로를 타고 올라간 뒤 영동 고속도로를 타고 중앙 고속도로를 탈 수 있지만 거리가 너무 먼 것 같아 문경에서 바로 예천쪽으로 빠지기로 했다.
일단 문경에서 영주 IC로 가기로 하고 영주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문경에서 영주로 가는 길은 생각외로 아주 좁은 도로였다. 또 시간이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다니는 차도 거의 없는 유령도로였다. 문경을 출발하면서 다른 곳에서 하룻밤을 자고 가기로 한 것을 안 우영이와 다예는 차안에서 좋아 노래를 부르다 잠이 들었다.
이런 유령도로를 계속 가다 보니 이런 길이라면 걸어 다니는 것이 아니라 차로 다녀도 혼자라면 무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리상 문경에서 영주까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의외로 꼬불 꼬불한 산길을 계속 가야했다. 문경에 갈 때부터 기름이 얼마 남지 않았었다. 기름을 넣을까 싶었지만 문경까지 거리가 얼마 되지 않고 오는 길에 넣어도 되기 때문에 주유소를 지나쳤다. 그런데 문경에서 영주로 가려고 하니 이제는 기름이 간들 간들했다.
물론 계량기의 눈금이 남아있고 Empty와 불이 들어와도 보통 20~30Km는 더 갈 수 있지만 기름이 없는 상태라 조금 조급했다. 꼬불 꼬불한 산길을 돌고 고개를 몇번 넘자 단양과 영주로 가는 갈림길이 나왔다. 처음 목적한 곳은 영주다. 그러나 이미 날은 완전히 저물었다. 이 상태에서 꼬불 꼬불한 산길을 얼마나 더 가야할지 알 수 없었다. 따라서 일단 한번 가본적이 있는 단양으로 길을 돌렸다.
그리고 또 고개를 몇번 넘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단양 IC가 나타났다. 다행이 아직 기름이 남아 있었고 IC 바로 앞에 주유소가 있어서 기름을 넣고 다시 단양 IC를 통해 중앙 고속도로를 탓다. 중앙 고속도로를 탄 뒤 처음에는 포항으로 가서 대게를 먹고 올까 싶었지만 문경에서 단양으로 오면서 허비한 시간이 많아 포항에 도착하면 12시가 넘을 것 같았다.
영주 부석사로
처음 생각한 대로 영주로 가기로 하고 영주로 길을 잡았다. 영주로 잡아 길을 가다보니 풍기 IC가 보였다. 아울러 풍기 IC 표지와 함께 부석사라는 표지도 보였다. 부석사라고 하면 교과서에도 나오는 유명한 사찰이기 때문에 다른 곳 보다는 부석사를 가기로 하고 풍기 IC를 나와 풍기읍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의외로 모텔이 많다. 허허 벌판에 보이는 모텔 간판만 대여섯개. 모텔촌을 지나 풍기읍쪽으로 들어가니 홈에버와 비슷한 간판(얼핏 보기에 홈에버로 보이는)의 Home E 마트가 있었다. 어차피 모텔에서 하루를 잔다고 해도 맥주를 한잔하고 잘 생각이라 Home E 마트에서 간단한 물품을 사고 들어 오면서 본 모텔을 잡았다.
그런데 위치가 위치라서 그런지 의외로 모텔 숙박비가 상당히 쌌다. 일반실 3'0000원, 인터넷이 가능한 방은 3'5000원이었다. 숙박비를 지불하고 열쇠를 받으려고 하는데 다른 모텔과는 달리 아이들이 있으면 추가금을 받는다고 한다. 주말 여행을 다니면서 꽤 많은 모텔에서 자봤지만 아이들이 있다고 추가금을 받는 것을 처음봤다.
사정을 이야기하자 일단 3'5000원에 결제를 했지만 이불을 추가하는 경우 5000원을 추가해야 한다고 한다. 알았다고 하고 방을 올라와보니 방이 상당히 좁았다. 침대가 조금 큰 침대이기는 하지만 네명이 자기에는 조금 좁아서 결국 5000원을 주고 이불 한채를 빌리고 맥주를 간단히 마신 뒤 잠을 청했다.
집에서는 늦잠 꾸러기, 놀러오면 부지런쟁이인 우영이와 다예가 먼저 일어나 있었다. 부석사가 있는 것은 알지만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인터넷을 찾봤다. 의외로 부석사에 가는 도중 볼만한 곳이 있었다. 바로 선비촌이었다. 민속촌과 비슷한 곳이 아닐까 싶고 부석사에 가는 도중이라 일단 선비촌에 들려 부석사를 가기로 했다.
놀러와서 모텔에서 라면을 끓여 주는 경우가 많아서 인지 우영이와 다예는 또 라면이 먹고 싶다고 했다. 결국 가지고 다니던 버너와 코펠을 이용해서 라면 두개를 끓여먹고 아침 일찍 부석사 관광에 나섰다. 풍기읍에서 부석사를 가는 길은 아주 간단했다. 풍기읍 가운데 도로를 타고 계속 직진만 하면됐다.
소수서원
부석사로 가다 보니 소수서원 주차장이 나타났다. 원래는 선비촌을 가려고 했지만 선비촌과 소수서원이 붙어 있는 것 같아 소수서원 주차장에 주차를 한 뒤 소수서원에 대한 안내 표지를 확인했다. 서원이라고 해서 전통적인 서원으로 생각했지만 소수서원은 비교적 초기에 세워진 서원이며, 최초 사액서원이라고 한다.
비교적 초기에 세워진 서원으로 1542년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 선생을 제사하기 위해 사당을 세우고 다음해 백운동 서원을 설립한 데서 비롯됬다고 한다.
소수서원에 들어가면서 요금을 확인해 보니 어른은 3000원, 아이는 1000원이었다. 다만 초등학교 이상만 표를 받았고 여기서 표를 끊으면 소수서원, 소수박물관, 선비촌을 모두 구경할 수 있었다. 서원을 구경하는 비용으로는 상당히 비싼듯 했지만 세가지 모두 관람이 가능했고 소수서원, 소수박물관, 선비촌 모두 구경 거리가 많아 요금은 비싸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매표소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송림군락이 나타난다. 학자수 군락이라고 해서 겉과 속이 모두 붉은 적송이라고 한다. 이 송림군락 오른쪽으로 숙수사지 당간지주가 보인다. 신라시대 숙수사의 터에 조선조에 들어 서원을 세웠기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 한다. 당간지주는 불교 행사 때 깃발을 세워두는 곳이라고 하는데 실제 깃발이 걸려있는 것은 보지 못한 것 같다.
불교 행사 때 깃발을 세워두던 지주이다. 소수서원이 신라시대에 세워진 숙수사 터에 세워졌기 때문에 서원이지만 절의 유물인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매표소 앞 작은 길을 따라 걷다보면 소수서원은 상당한 절지에 세워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수서원은 그 둘레를 죽계라는 조그만 하천이 감싸고 있다. 또 서원이 높은 곳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탁트인 풍광이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죽계와 어우러저 상당히 운치있는 풍광을 연출했다.
소수서원과 소수박물관, 선비촌에는 두 개의 하천이 흐른다. 소수서원은 이중 왼쪽으로 죽계가 휘감아 돌고 있었다. 또 죽계의 중간 중간에 보를 두었기 때문에 작은 하천이지만 수심은 상당했다.
당간지주를 뒤로하고 조금 걸어 안쪽으로 들어가니 커다란 나무가 보였다. 얼핏 보기에도 몇 아름은 되는 듯한 나무였는데 확인해 보니 보호수로 지정된 500년된 은행나무였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죽계는 얼핏 보면 작은 또랑 같지만 중간 중간 보를 둠으로서 상당히 깊고 운치가 있었다.
커다란 아름드리 나무는 500년된 은행나무라고 한다. 가운데가 갈라지기는 했지만 하늘끝까지 솟아 있는 듯하다.
소수서원 입구 바로 옆에는 경렴정이라는 작은 정자가 있었다. 죽계에 어우러진 소수서원과 이 정자를 보니 여기에 앉아 술 한잔 한다면 정말 운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비들이 공부하는 서원의 정자에 술을 마신다는 것이 불손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서원이 흥성하던 때는 공맹의 도 보다는 주자의 도가 더 판 쳤을 것을 생각하면 그리 불손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다만 조선 시대에는 서원, 신라, 고려 시대에는 절이 있었다고 하니 절경에 길지는 모두 종교에서 차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1543년 주세붕 선생이 지은 우리나라에서 가종 오래된 정자라고 한다. 현판은 회원선생을 높인다는 뜻에서 경자를 따왔고 중국 북송의 철학자 "렴계 조돈이"를 경모하는 뜻에서 주돈이의 호인 염계에서 첫글자를 따왔다고 한다.
우엉맘은 문화재보다는 현장학습이 우선인 듯했다. 우영이 현장 학습 자료라며 열심히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지만 이런 문화재를 관람하면서도 현장 학습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도 조금 우수웠다. 과연 이런 교육제도가 올바른지 의구심이 생겼다. 현장 학습을 가지 않고 현장 학습을 갔다 왔다고 하는 사람을 막기위한 제도이고 또 이런 형태의 제도가 정말 많다. 그러나 소수의 지키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잘지키는 다수의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병적인 모습을 보면 지키는 사람이 다수가 아니라 소수일 것이라는 생각도 조심스레 하게된다. 서원을 관람하며 할 수 있는 생각은 아니지만 죽계가 휘감아 도는 절지에 들어선 소수서원을 보니 불현듯 예나 지금이나 가진자의 특권은 여전한 듯했다.
소수서원에 들어서니 첫번째로 보이는 것이 백운동이다. 조선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물려 받은 듯한 건물에는 고운 단청이 입혀져 있었다. 문화재에 대한 남다른 안목이 있다면 조선 건축 양식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 놓고 싶지만 그런 지식이 없어서 간단히 사진으로 대신한다.
백운동이라고 붙어 있는 이 건물은 선비들에게 글을 강독하던 강학당이라고 한다. 네 방향에 툇마루를 두르고 배흘림기둥을 사용했다고 한다.
백운동 뒷편에서는 직방제와 일신제가 있다. 소수서원의 교수들이 기거하며 집무를 보던 곳이라고 하니 요즘으로 따지면 교수 연구동 정도 되는 듯 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기거하기에는 조금 좁은 것 같았다. 또 강학당과 달리 단청을 하지 않은 건물이었다. 직방제와 일신제 옆에는 학구제와 지락제가 있었다. 유생들이 공부하던 기숙사 건물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몇명이나 거주했는지 모르지만 크기는 상당히 작았다.
교수의 연구동인 일신제와 서생의 숙박 시설인 학구제이다. 그러나 크기는 상당히 작다. 또 단청도 하지 않은 건물이었다.
직방제 바로 옆에는 장서각이 있고 그 옆에는 문성공묘가 있다. 보통 중국의 서원은 전학후묘라고 해서 강학당을 앞에 두고 사당을 뒤에 두는 형태지만 조선 초기의 서원에 해당하는 소수서원은 서쪽을 으뜸으로 삼는 우리나라 전통 위치법(이서위상)에 따라 동학서묘의 방식을 따랐다고 한다. 따라서 강학당 왼쪽에서 문성공묘가 있다.
해시계이기 때문에 일영대 가운데에 막대가 있어야 하지만 막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또 앞 건물의 그림자 때문에 해시계의 역할을 하기에는 힘들어 보였다. 원래의 위치에서 옮겨진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이외에도 해시계의 일종인 일영대가 있으며 장서각 뒷쪽에는 영정각과 전사청이 있다. 영정각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회헌 안향과 신재 주세붕의 영정을 모신 곳이라고 한다. 지도상에는 소수서원이 상당히 커 보이지만 소수서원은 강학당, 직방제, 일신제등의 총 10여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고 소수 서원을 나오면 고직사와 사료관이 나온다.
밀납인형으로 만들어 사실감을 더 했다. 서당에서 학동을 가르치는 것과 별 차이는 없다.
사료관에는 소수서원에 대한 각종 사료가 모여있으며 당시 소수서원에서 강학하던 모습과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밀납인형으로 볼 수 있다. 소수서원을 나오면 뜬금없는 연못이 보인다. 탁청지라고 한다. 겸암 류운용 선생이 풍기군수로 재직할 때 만든 연못이라고 한다. 다만 어떤 용도의 연못인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탁청지 가운데 쯤에 상당히 커다란 거북 모양의 바위가 있다. 이 바위를 보니 또 주님 생각이 났다.
소수박물관
소수서원을 나와 탁청지를 지나면 죽계를 건너는 다리가 보인다. 다리의 기둥를 보면 만든지 꽤 오래된 것 같은데 상판으로 쓰인 목재를 보면 최근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 다리를 건너 작은 오솔길을 50여m 올라가면 소수박물관이 나타난다.
작은 천이지만 보가 있기 때문에 수심은 상당하다. 또 겨울이라 모두 얼어 있었다.
소수박물관에는 유교에 관련된 자료가 다수 비치되어 있다. 또 박물관 입구에는 탁본을 뜨는 것을 무료로 체험해 볼 수 있는 탁본대가 있다. 어른들에게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창호지에 물을 뿌리고 먹을 바르면 현판의 도드라진 글을 탁본을 뜰 수 있기 때문에 아이들은 상당히 좋아한다.
탁본을 뜨는 방법은 상당히 간단하다. 먼저 창호지를 현판에 올려 둔다. 분무기로 물을 뿌린다. 물을 뿌릴 때는 글자가 확연히 나타날 수 있도록 글자에 뿌리는 것이 좋다. 물을 뿌린 뒤에는 창호지 옆에 있는 수건으로 창호지의 물을 제거한다. 먹을 묻힌 작은 헝겊을 들어 도드라진 글자를 가볍게 톡톡 쳐주면 사진처럼 탁본이 만들어진다.
별것 아니지만 아이들은 의외로 좋아한다. 특히 먹이 묻은 헝겊으로 톡톡치면 글씨가 나타나는 것이 무척 신기한 듯 싶었다.
박물관을 방문할 때면 항상 느끼는 점이지만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하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에 대한 기준이다. 보통 문화재는 작은 빛에도 손상될 수 있기 때문에 플래시를 터트리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촬영 자체를 금지하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따라서 박물관을 방문하면 먼저 사진을 찍을 수 있는지 확인하는 편인데 소수 박물관은 사진 촬영을 금지하고 있지만 그런 금지 표시는 찾을 수 없었다.
박물관에서 유물을 구경하면서 사진을 몇장 찍다가 청소하는 아주머니의 제재로 사진촬영을 중지하고 박물관을 관람하다 보니 반대쪽 끝에서 사진 촬영을 금지하는 작은 표지를 찾을 수 있었다. 기껏 아이들과 박물관을 방문하고도 사진 한장 찍지 못하고 결국 간판만 찍어어서 온다. 이런 박물관에서 사진 촬영 자체를 금지하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조치였다. 얼추 짐작하기로는 플래시 금지, 촬영을 허용하는 것보다는 촬영을 금지하는 것이 관리하기 더 편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지만 촬영을 금지하는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소수 박물관을 관람하고 나오니 바로 앞에 무덤처럼 보이는 작은 움막이 보였다. 마드레 고분이라고 하는데 실제 고분이 아니라 모형으로 만든 고분으로 보였다. 우영이는 박물관에 오면 노트를 가져와 적어야 한다는 것을 학교에서 배운 듯 다예의 노트와 볼펜을 빌려 무엇인가 열심히 적고 있었다.
복원 모형이다. 그러나 고분처럼 보인다기 보다는 꼭 움막처럼 보였다.
선비촌
소수 박물관을 오른쪽으로 돌아 나가면 선비촌이 보인다. 처음에는 선비촌이 민속촌과 비슷한 것으로 생각했지만 선비촌은 영주의 선비들의 집을 한곳에서 복원 전시한 곳이었다. 실물을 복원했고 또 여름에 숙박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복원했기 때문에 일반적인 세트장 보다는 훨씬 튼튼하게 지어져 있었고 사진찍기도 상당히 편했다.
영주에 선비들의 집을 복원 전시한 곳으로 여름에는 숙박 체험을 할 수 있다. 고가를 그대로 복원한 것이라 세트장에 비해 훨씬 튼튼하고 고가의 창고에는 상당히 오래된 물건을 볼 수 있다.
선비촌은 영주에 있는 선비들의 집을 복원 전시한 선비촌과 각종 문화체험을 할 수 있는 저자 거리로 나누어져 있었다. 실제 선비촌을 방문해 보면 전시 복원된 집도 아주 사실적으로 복원됐지만 거리 역시 상당히 사실적으로 복운된 것을 알 수 있다. 나도 어렸을 적에는 이런 동네에서 살았기 때문에 더 정다웠다. 다만 내가 살던 곳은 방 두 칸 초가집이었는데 선비촌에는 대가집이라고 부를 정도로 가옥이 가득했다.
선비촌을 방문한 시간이 조금이르고 날이 추워서 그런지 관람객은 많지 않았다. 저자거리도 저자거리라는 이름과는 달리 마차 한대와 말 세마리, 그리고 문화체험을 위한 작은 천막 몇개 밖에 없었다.
말을 보고 말을 타고 싶어하는 우영이 때문에 우영이와 다예를 마차에 태웠다. 동네 한바퀴 도는 마차의 탑승 비용은 오천원. 그런데 문제는 역시 다예였다. 다예는 겁이 많기 때문에 마차를 태우자 또 울면서 타지 않으려고 했다. 한푼이라도 더 벌려는 할머니는 어른은 만원인데 오천원에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면서 우엉맘에게 다예를 앉고 타라고 하고 있었다. 가격을 오천원이나 빼준다는 말에 혹한 우엉맘이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마차는 타본 사람은 알겠지만 아이들이라면 몰라도 어른은 거의 탈일이 없는 마차이다. 같은 돈을 준다면 차라리 말을 바로 타는 것이 낫다. 그래서 우엉맘이 타기 보다는 다예를 내리고 오천원을 받도록 했다. 그러자 돈을 돌려주기 싫은 할머니는 엄마는 공짜로 태워줄테니 아이를 앉고 타라고 했고 결국 우엉맘이 다예를 앉고 마차를 탔다.
처음에는 제주도 조랑말인가 싶었다. 그러나 조랑말 보다도 더 작다. 미국산 미니종인데 정확한 종자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녀석들의 눈말울을 보면 정말 순진하다.
다예는 우엉맘이 안고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선비촌을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선비촌을 구경했다. 시골집을 연상하는 풍경과 예전에 사용되던 집기가 놓여있었다. 여기 저기 구경을 다니다 보니 시간이 꽤 흘렀다. 모텔에서 나온 시간이 오전 9시가 되지 않았는데 소수서원과 소수 박물관, 선비촌을 구경하다 보니 점심때가 지난 것 같았다.
내가 살던 고향도 여기와 비슷했다. 다만 담에 기와가 없고, 돌담 역시 흙을 채우지 않은 완전한 돌담이었다. 돌담 옆에는 작은 수로가 있는데 여기도 똑 같이 복원되어 있었다.
예전에는 꽤 부유한 집에나 있었던 재봉틀과 전축이다. 우리집에도 비슷한 재봉틀이 있었다. 물론 이때는 생계용이었기 때문에 부유한 것과는 관련이 없었다.
집집마다 팽이치기, 윷놀이, 널뛰기, 투호놀이처럼 전통놀이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관광객이 많다면 놀이 하나당 5천원씩 주고 해야 하지만 관광객이 전혀 없다 보니 모두 무료로 체험할 수 있었다.
이정도면 상당히 고관대작의 집으로 생각된다. 방이 마당에서 우뚝 솓아 있는데 예전의 집중에는 의외로 땅을 돋와 이렇게 지은 집이 많은 듯했다.
부석사
부석사를 바로 구경하기 보다는 부석사 앞의 식당에서 가볍게 밥을 먹고 부석사를 관람하기로 하고 선비촌을 빠져나왔다. 선비촌에서 부석사까지는 같은 길을 계속 직진하면 됐지만 의외로 선비촌에서 부석사까지의 길도 꽤 멀었다. 풍기읍과 부석사 중간 정도에 선비촌이 있는 듯 했다.
부석사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부석사 무량수전이다. 교과서에서는 귀가 닳도록 들은 부석사지만 막상 와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일단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뒤 배가 고파 밥을 먹을 만한 곳을 찾았다. 지도에는 부석사 종점 식당만 있는 것으로 나와있는데 의외로 비슷하게 생긴 음식점이 많았고 하는 음식도 거의 같았다. 지금 기억으로는 산채정식, 산채비빔밥, 청국장, 간고등어 정도가 눈에 띄었다.
음식점 세군데 중 가게된 곳은 세 음식점 중 가장 크고 깨끗해 보이는 집(주자창 가장 아래쪽)이었다. 산채정식을 시켜면 간고등어까지 나온다고 해서 산채정식을 시켰고 잠시 뒤 산채정식이 나왔다. 그런데 산채정식이라고 해도 산채비빔밥과 별 차이는 없었다.
산채비빔밥에는 산채가 그릇에 모두 담겨 나오지만 산채정식은 접시에 나온다는 차이가 있는 듯 했다. 또 한가지 차이는 2인분에 간고등어 반마리가 나온다는 정도였다. 밥을 먹고 밥값을 지불하려고 보니 언론이 격찬한 음식맛이라고 광고가 붙어있었지만 격찬할 정도의 음식맛은 아니고 그냥 먹을 만한 정도 였다.
밥을 먹고 부석사로 올라갔다.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안내판을 확인했다. 그런데 의외로 부석사가 상당히 컸다. 더 재미있는 것은 무협지에 나오는 고찰처럼 조사당도 있었다. 무척 재미있게 생각하고 부석사로 올랐다.
안내판을 보면 부석사는 상당히 큰 절이었다. 그러나 다른 절과는 달리 산을 깍아 절을 만든 것이 아니라 산을 오르며 절을 만들었기 때문에 커보인 것이다.
그리고 나타나는 부석사 산문(일주문). 소백산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태백산 부석사였다. 또 부석사의 한자가 浮石寺였다. 뜰부 돌석. 산중의 절이름치고는 조금 신기했다. 산속에 무슨 뜨는 돌이 있을까 싶어서 관심을 가지고 부석사를 올랐다.
소백산 부석사가 아니라 태백산 부석사이다. 이름도 신기하게 뜨는 돌이다.
사찰이 산에 있기는 하지만 보통은 산 중턱을 깍아 평평하게 만든 뒤 절을 짓는 것이 일반적인데 부석사는 이점에서도 달랐다. 산문이 나오고 바로 대웅전과 같은 부속 건물이 나올 것으로 생각했지만 의외로 산문에서 한참을 올라가도 부속 건물은 나타나지 않았다.
한참을 올라가다가 보니 당간지주가 나타났고 다시 또 문이 나타났다. 천왕문이라고 하는데 이 천왕문에는 다른 사찰과 마찬가지로 사천왕상이 안치되어 있었다. 안내판만 보면 일주문에서 천왕문까지의 거리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매표소에서 일주문까지의 거리도 상당히 멀지만 일주문에서 천왕문까지의 거리도 만만치 않았다.
산을 깍아 만든 것은 다른 절과 비슷하지만 부석사는 산을 오르면서 건물을 배치했다. 따라서 앞에서 보면 2층이지만 올라가 보면 1층이다.
천왕문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천왕문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상당히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한다. 그런데 부석사는 대부분 이런 구조였다. 보기에는 이층으로 보이는 건물이지만 산길을 계단식으로 깍아 보기에는 이층이지만 올라가서 보면 일층인 구조였다.
천왕문에서 다시 오르다 보면 또 성곽같은 돌담이 나타나고 이 돌담을 올라가면 부석사의 본 건물이 나온다. 그런데 안내판에서는 상당히 커보이는 부석사지만 대부분의 건물은 여기에 모두 모여있다.
부속 건물들
여기에 대부분의 건물이 모여있었다. 그러나 폭이 좁아 건물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부석사라고 하면 떠 올리는 무량수전이 나온다. 워낙 유명한 걸물이라 역시 관광객이 상당히 많았다. 그러나 무량수전은 그 오랜 역사를 말해 주듯 상당히 낡은 건물이었다. 손대면 우르르하고 무너질 듯한...
이름은 쟁쟁하지만 막상 건물을 보면 "애게"라는 반응이 나올법하다. 문화재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라고 하는데 역시 충분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대단한 건물로는 보이지 않았다. 단지 오래된 건물이라는 인상뿐. 기대가 너무 컷던 탓도 있었다.
무량수전 왼쪽 옆에는 부석사라는 이름이 있게한 부석이 나온다. 전설에 따르면 의상 대사를 흠모하던 중국 여인이 용으로 변해 의상 대사를 따라 신라에 왔다. 의상대사가 태백산에 부석사를 세우려고 했을 때 부석사에는 이미 이교도들이 터를 잡고 부석사의 건설을 반대했다. 이때 용으로 변한 이 여인이 돌을 들어 올려 이교도를 내쫓았다고 한다. 무량수전 바로 옆의 부석은 이때 전설을 반영한 것으로 상다히 큰 돌이 다른 돌을 누르고 있었다.
부석사라는 이름을 있게한 부석이다. 상당히 큰 돌이 작은 돌을 누르는 형국인데, 꼭 큰 돌로 이교도를 무저갱에 가둔 뒤 봉인을 한 듯한 인상이다.
부석사 삼층석탚 옆의 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 가면 조사동이 나온다. 조사동이라고 하면 무협지에는 자주 나오지만 일반 사찰에서는 보기 힘든 곳인데 특이하게 부석사에는 이 조사동이 있었다. 아울러 바로 옆에는 스님들이 기도, 정진하는 곳도 함께 있었다. 조사동에 오르는 반대편 길로 조금더 올라가면 역시 또 다른 건물이 보인다. 산문에서 부터 이 자인당까지가 부석사였다.
다른 절에는 없는 조사동이 있다. 그 앞에 철창에 갖힌 선비화가 있다. 선비화는 의상 대사의 지팡이가 살아서 오늘 날까지 전해 내려온 것으로 비와 이슬을 맞지 않고도 1300년을 산 신비한 전설의 나무라고 한다.
부석사는 여는 절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일단 어느 사찰이나 가면 볼 수 있는 '대웅전이 보이지 않는다'(화엄종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 무협지에나 나올 법한 '조사당이 있다'. 마지막으로 사찰을 돌아 다녀도 '스님의 모습을 찾기 힘들었다'.
다른 사찰은 날씬한 비구승과 뚱뚱한 스님을 보는 것이 일반적인데 사찰을 관람하는 내내 이런 스님의 모습은 보기 힘들었다. 조사당에 오르면 "기도 정진 중이오니 조용히 하시기 바랍니다"라는 문구가 붙어 있는데 다들 이곳에서 기도정진에 매진하기 때문인지 스님을 찾기는 힘들었다.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오르는 것보다는 내려오는 것이 더 힘든데 운동을 안한 덕인지 상당히 힘들었다. 다예는 어린 나이에 비해 힘들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고 너무 잘 걸었다. 어디를 가든 다예는 씩씩하다. 부석사에서 내려오다 보니 부석사 입구에서 인삼 동동주를 팔고 있었다. 여기까지 온 김에 맛이나 보려고 한 바가지를 시켰다. 인삼 동동주는 시원하고 감칠 맛이 났다. 또 인삼의 씹히는 맛까지 너무 좋았다.
결국 집에서 먹기로 하고 인삼 동동주를 한병샀다. 그리고 주차장 옆의 사과 파는 집에서 사과 한 바구니를 샀다. 30개가 들어있다고 하는데 가격은 만원. 친절하신 아주머니는 사과 몇개를 더 집어 주셨다. 맛을 보려고 옆의 의자에 앉아 사과를 자르고 한입 베어 물었다. 지금 껏 사과를 많이 먹어 봤지만 이렇게 맛있는 사과는 처음 먹어 본 듯 싶었다. 일단 과즙이 아주 풍부하다. 또 아주 달다. 특히 씹히는 맛이 아삭 아삭했다. 사과의 색깔은 충주 사과와는 달리 훨씬 붉은 색이었다.
뜻하지 않은 주말 여행이었지만 너무 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수서원, 소수박물관, 선비촌, 부석사 모두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다시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집에 도착해서 예전에 사다둔 용두동 쭈꾸미를 안주로 부석사에서 사온 동동주로 하루를 마감했다. 한가자 아쉬운 것은 동동주를 한병만 사왔다는 것. 결국 나중에 다시 부석사에 가서 동동주와 사과를 사오기로 했다.
남은 이야기
처음에는 주말 여행을 다녀 온 2월 10일 직후에 올리려고 했던 글이다. 그러나 주말 여행이라고 해도 돌아 다닌 곳이 많아 글을 쉽게 정리하기 힘들었다. 결국 2월 10일부터 오늘까지 조금씩 글을 추가하고 결국 오늘 정리해서 올리고 있지만 글 하나 올리는데 걸리는 시간이 만만치 않다.
부석사에서 찍은 다예의 동영상
다예는 혼자서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상당히 좋아한다. 문제는 사진을 찍으려고 하면 쑥스럽다고 숨는다는 점. 부석사 무량 수전에 가서도 다예는 혼자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찬스라고 생각하고 촬영을 시작했는데 카메라로 찍고 있다는 것을 안 뒤 바로 그만 두었다.
엄마, 아빠만 즐거운 주말 여행 - 주말 여행을 너무 자주 다녀서 그런지 우영이와 다예는 주말 여행을 싫어한다. 그래서 오늘은 주말 여행을 가지 않고 집에서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