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와 노무현
2007년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 뒤 정조 붐이 일었다. '한성별곡 정'도 개혁군주 정조를 다룬 드라마다. 8편으로 짧게 끝났지만 상당히 인상적인 명품 드라마다. 사극이지만 현재의 상황을 절묘하게 담고 있기 때문에 시대극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또 드라마속 정조는 퇴임한 노무현 대통령과 너무 닮아 있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도 정적에 의해 정치적 타살을 당하셨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더 든다. 다만 이 글에는 드라마에 대한 '헤살'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드라마를 아직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글을 읽지 않는 것이 좋다.
한성별곡 정
8회로 상당히 짧게 끝났지만 여운이 많이 남는 드라마다. 스토리가 상당히 짜임새 있고 진행도 빠르다. 무엇 보다도 짧은 드라마지만 현재 상황을 꽤 절묘하게 담아냈다. 명품 드라마지만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 조금 아쉽다.
미르님 블로그를 방문했다가 우연히 알게된 드라마가 있다. 바로 한성별곡이다. 조선의 마지막 개혁 군주였던 정조의 개혁, 반개혁의 세력에 의한 정조의 암살, 주인공 세 남녀의 엇갈린 운명과 사랑을 그린 퓨전사극이다. 커피 프린스 1호점의 인기 때문에 빛을 보지는 못했고 8편의 아주 짧은 드라마이지만 상당히 짜임새 있는 사극이다.
한성별곡을 몇 가지 특징적인 부분이 있다. 일단 8편으로 아주 가볍게 끝났다. 처음에는 인기가 없어서 조기 종영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조기 종영이 아니라 8편으로 외주 제작됐다고 한다. 두번째는 주인공이 모두 신인이다. TV를 잘 보지 않아서 나만 신인으로 아는지 모르겠지만 주인공 세명 모두 신인이다. 따라서 드라마 초반에는 주인공들이 배역을 잘 소화하지 못해 꼭 연극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회를 거듭할 수록 주인공들의 연기가 녹아나며 더욱 흥미진진해 진다. 마지막으로 개혁 군주 정조의 개혁과 좌절이 노무현 대통령과 너무 닮아 있다는 점이다.
현실과 닮은 사극
수도천도
이판: 일굴 땅이 없어 밥을 굶기 일쑵니다.
이판: 사대부에 고용되 십년을 일해도 식솔들 보살필 집한칸 마련할 수 없습니다.
이판: 천도는 일굴 땅과 살 집을 주어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하고 경강 이남의 고른 발전을 도모하자는 것입니다.
한성별곡에 나오는 수도 천도의 이유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수도 분리와 논리가 비슷하다. 상놈을 서민으로 사대부를 재벌로 바꾸면 딱 우리의 현실과 일치한다. 그런데 우리의 사회상을 비추는 대목은 이부분만이 아니다.
삼성 비자금
포도대장: 여편네가 조참지네 가채를 그리 부러워 하던데 어찌알고 이리 감동을 주시는가?
양만오: 시집을 가지 않은 계집의 머리카락으로만 만든 것입니다. 주위를 두른 장식은 모두 청나라에서 수입한 진귀한 것들입니다.포도대장: 허나 여인들의 사치가 극에 달했다 하여 임금께서 국법으로 금지 시킨 것이 가채 아닌가?
양만오: 해서 더욱 진귀해진 조선팔도에 하나뿐인 가채입니다. 저자에 값을 물으시면 북촌 기와집 서너채는 나옵니다.포도대장: 이거이 그정도 인가 하~~~ 하기사 자네가 귀하다는 건데 여부가 있겠는가만은
양만오: 사모님께 희귀한 구경이나 시켜드리시라고.포도대장: 그거 적절한 단어일세. 알맞은 단어일세. 구경까지 금지 시킨 것은 아니지 않은가?
포도대장: 허허, 허허, 어~~~. 자네는 여전히 늘 장사는 재미지고?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나 큰 꿈을 꾸고 과거에 응시하지만 사회에 절망하고 상인(총행수)이된 양만오가 포청에 뇌물을 바치는 대목이다. 난전, 시전 등 모든 상권을 장악, 사대부에게 필요한 사치품을 고가에 팔고 그 수익으로 쌀을 사 보부상을 통해 저가로 전국에 유통시킴으로서 헐벗고 굶주린 백성을 구하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목적은 정당하지만 이 목적의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래서 개혁적이라기 보다는 반개혁적이며, 오히려 수구의 모습과 더 닮아있다. 싫어하면서 닮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아울러 뇌물을 주고 받는 대목을 보면 정말 절묘하다. 가채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진귀한 구경을 하는 것. 마지막의 "자네는 여전히 늘 장사는 재미지고?" 또한 인상적이다. 재벌이 뇌물을 바치는 논리, 관료를 최대한 배려한 논리, 뇌물에 화답하는 논리가 돋보인다. 또 삼성 비자금 문건에 나오는 대목과 거의 비슷하다. 돈을 안받으면 포도주를 선물하라. 재미있는 것은 삼성 비자금 사건이 터지기 전에 만든 드라마이지만 삼성 비자금 사건과 너무 비슷하다. 아니 거의 똑 같다.
노무현과 닮은 정조
정조 1
정조: 대체이게 어찌된 일인가?
심민구: 말씀 드리기 송구스러우나 최승환 등용하신다는 교지에 몇몇 신료들이 등청을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아옵니다.
정조: 이게 몇몇 신료들이란 말이요
텅빈 어전 회의장. 정조의 심복이었던 이조판서가 암살당한 뒤 어전회의의 모습이다. 정조의 인사에 반대하는 신하들이 등청 거부로 정조를 핍박하는 장면이다. 민주당, 한나라당이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하던 모습이 그대로 떠오른다.
정조 2
유생: 국법을 무시하시고 전하의 뜻대로만 종사를 끌고 가시겠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옵니까?
정조: 언론을 넓히고 직언을 자유롭게하라 했더니 국법을 무시한다.
정조: 많은 신료들이 추천했고 이조 역시 최승환의 발탁을 문제 삼지 않았소. 절차를 거친 후보 인사 중에서 임금이 낙점하는 것은 분명 적법이 아니오?
정조: 임금이 임금으로서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는 무능력함이더냐 아니면 임금이 하는 일은 무조건 좌초 시키고 보려는 불순한 의도이냐
"임금이 임금으로서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는 무능력함이더냐 아니면 임금이 하는 일은 무조건 좌초 시키고 보려는 불순한 의도이냐"
내놓는 정책마다 딴지를 건 한나라당이 생각난다. 적법한 절차를 거쳤어도 반대하는 무리들. "대통령 짓도 못해먹겠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심정도 아마 정조의 심정과 별 다르지 않을 듯하다. 나중에 병이 깊어진 정조가 내 뱉는 한마디는 노무현 대통령의 "대통령 짓도 못해먹겠다"는 얘기처럼 들린다.
이명박의 집권
대비의 집권
박상규: 천하를 호령하실 추춘이시나 안타깝게도 전하께서는 천수를 다하셨습니다.
대비: 조사 내용에 할말이 있으면 지금하시오. 허면 이 결과를 적어 묘당과 사간헌 홍문관에 보이고 또한 사대문에 보여 널리 알리시오.
심민구: 나이를 거꾸로 먹는지 잠시 눈치가 바르지 못햅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정조를 암살하고 전권을 틀어쥔 대비. 그리고 이제 대비에게 줄서기를 하는 신하들... "천하를 호령하실 추춘이시나 안타깝게도 전하께서는 천수를 다하셨습니다."라는 수사 결과는 개혁의 종말, 조선의 종말을 의미한다. 100여년을 이어온 노론당의 재집권을 의미하며, 정조 24년의 개혁이 이로서 종말을 고한다. 한나라당의 연혁이 50년,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집권이 10년. 숫자만 봐도 상징하는 바가 크다.
정조가 암살 당한 것을 분명히 아는 박상규는 수사 결과를 "천하를 호령하실 추춘이시나 안타깝게도 전하께서는 천수를 다하셨습니다."고 끝 맺는다. 얼마 전 이명박의 BBK 사건에 대해 검찰이 BBK 혐의 없음을 선언하는 모습과 너무 비슷하다. 중간 중간 인상적인 대목만 집어넣은 것이지만 한성별곡은 사극이라기 보다는 시대극으로 봐도 될 정도로 현재 우리 시사를 그대로 풍자하고 있다. 퓨전 사극이지만 최근에 나온 사극 중 최고이다.
노무현 뒤 다시 뜨는 정조
그런데 의외로 정조를 다른 드라마가 많다. 한성별곡이야 이미 종용됐지만 현재 MBC에서 방영하고 있는 이산도 개혁 군주 정조를 드라마하고 있다. 한성별곡이 정조가 암살되기 전까지 며칠을 다루고 있지만 이산은 정조의 어린 시절부터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난관을 타개하고 왕위의 오르기 까지의 과정, 그리고 정조의 개혁과 좌절, 암살을 다룰 것으로 보인다. 정통 사극을 표방하고 한 인물의 일대기를 다루기 때문에 진행이 조금 느린 감은 있지만 자신을 지키려는 정조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세력의 권모술수가 매회 이산을 보게 만든다. 특히 정조의 책사로 나오는 홍국영은 역사적 평가와 무관하게 아주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정조라는 한 인물에 대해 이미 두 개의 드라마가 나왔지만 현재 방영 중인 정조에 대한 드라마가 또 있다. 바로 CGV에서 방영하고 있는 '정조 암살 미스터리 8일'이다. 기존의 정조에 관련된 드라마와는 상당히 다른 시선으로 정조 암살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일반적으로 정조의 암살은 사도세자의 동생인 화완옹주와 영조의 계비였던 정순왕후가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정조 암살 미스터리 8일'은 혜경궁 홍씨가 암살에 깊이 관여한 것으로 나온다. 케이블 TV에서 만든 드라마이지만 상당히 완성도가 높고 흥미 진진하다. 비싼 배우는 나오지 않지만 조연들의 빛나는 연기와 김상중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가 한목하는 것 같다.
노무현의 개혁과 좌절
그러면 한가지. 왜 이 시점에 노무현 대통령과 비슷하다는 정조가 부각되는 것일까?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정조의 개혁 보다는 개혁의 좌절에 더 큰 촛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 같다. 정조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나오는 이야기는 바로 암살이다. 세 드라마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핵심 코드도 역시 개혁, 암살, 좌절이다[1].
그러나 한가지 잊은 것이 있다. '정조가 죽은 뒤 조선은 그 운명을 다한다'. 정조는 조선의 마지막 개혁 군주가 아니라 조선의 마지막 군주로 봐도된다. 이후 조선은 수구 세력이 세도 정치를 펼치며 왕권을 쥐락펴락하며, 결국 순종을 끝으로 500년 역사를 마무리하게된다.
얼마 전 대선이 끝났다. 개혁 군주 정조의 좌절만큼은 아니라고 해도 우리 역시 비슷한 좌절을 격고 있다. 바로 이명박 당선이다. 이명박 당선은 단순히 한 '부도덕한 정치가의 등장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간 개혁세력이 이룬 모든 성과가 뒤 엎어짐을 의미한다. 이명박의 당선은 이땅에 기생한 50년 전통 수구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정조의 죽음과 수구의 집권은 결국 망국으로 이어졌다. 이미 IMF를 통해 한번 망한적이 있는 우리나라이기에 조선처럼 쉽게 망국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컴도자[2]라는 이명박의 별명처럼 무리한 공약의 실천, 일시적인 경기 부양, 부동산 버블, 경기 침체, IMF라는 악순환을 다시 맞을 가능성 또한 적지 않다.
이 세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면서 씁쓸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