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추억 10. 친구 2 by 도아
여자, 유일한 관심사
공부에는 관심이 없지만 여자에게 워낙 관심이 많다보니 여자를 사귀는 방법을 이런 연습을 통해 익힌 것이었다. 공부에는 워낙 관심이 없는 녀석이라 첫해 대학교에 떨어졌다. 한번 재수를 하고 다시 시험을 봤지만 역시 떨어졌다. 그러나 이번에도 떨어지면 군대에 가야하기 때문에 군대를 피할 목적으로 면목동에 있는 서일 전문 대학의 산업 디자인 학과에 입학을 했다.
순진, 혹은 순수
아이가 만든 마법라는 글을 쓰다보니 또 다른 친구가 생각난다. 경우가 완전히 똑 같은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일찍 결혼을 했다는 점에서는 같다. 이 녀석은 고등학교 때 만났다. 선무부라고 고등학교 음성 동아리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동아리 모임보다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고 1학년 때부터 여름이면 함께 여행을 다니고 겨울이면 함께 도박을 하던 전형적인 놀이 친구였다.
녀석도 성격은 상당히 순진했다. 머리가 뻣뻣했서 돼지털이라고 놀리고 여자를 좋아하기 때문에 돈색마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근본은 착하고 순진했다. 끼리 끼리 모인다고 내가 워낙 공부에 담을 쌓고 살다 보니 친구 중에도 공부를 잘하는 녀석은 없었다. 이 녀석도 비슷했다. 공부와는 담을 싼 녀석이데 유독 여자에 관심이 많았다.
한번은 동대문으로 여자를 꼬시러 갔다. 당시에는 여자와 함께 다니다 선도부 선생님(학교는 불문)께 걸리면 심하면 정학을 먹는 그런 시대였다. 예쁘장하게 생긴 여고생 두명이 걸어 오고있었다. 그래서 말을 걸어 보라고 시켰다.
녀석: (머리를 긁적이며) 저. 시간있으세요?
그녀: 없는데요.
다시 머리를 긁적이며 '시간없다는데'라고 얘기할 정도로 순진했다. 여자와 같이 다니는 하나만으로 정학이 가능한 상황에 생판 처음보는 남자가 시간이 있냐고 물으면 시간이 있다고 대답할 바보같은 여학생은 당시에는 없었다. 물론 그 시간에 동대문에서 얼쩡 거리는 여학생 중 날라리가 아닌 여학생도 없었다.
이렇게 순진한 녀석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집에 늦게 들어 간다고 전화를 하러 공중전화 박스에 갔다가 여학생들이 있으면 꼭 여학생들에게 전화를 걸어 달라고 조르고, 버스를 타려고 하다가 같이 버스를 기다리는 여학생이 있으면 회수권이 있으면서도 꼭 회수권을 빌려 달라고 말을 거는 것이었다.
여자, 유일한 관심사
공부에는 관심이 없지만 여자에게 워낙 관심이 많다보니 여자를 사귀는 방법을 이런 연습을 통해 익힌 것이었다. 공부에는 워낙 관심이 없는 녀석이라 첫해 대학교에 떨어졌다. 한번 재수를 하고 다시 시험을 봤지만 역시 떨어졌다. 그러나 이번에도 떨어지면 군대에 가야하기 때문에 군대를 피할 목적으로 면목동에 있는 서일 전문 대학[1]의 산업 디자인 학과에 입학을 했다.
얼마 뒤 녀석이 미팅을 시켜준다고 해서 서일 전문대를 방문했다. 재미있는 것은 학교 수업은 거의 들어가지 않는 녀석인데 과의 여학우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이 녀석의 과 별명은 '땡땡이 왕자'. 땡땡이 왕도 있는데 땡땡이 왕은 입학만 하고 아직까지 한번도 출석을 안한 녀석이고, 이 녀석은 신입생 환영회[2], 학기 중에 있던 두번의 과 술자리에는 참석을 했기 때문에 '땡땡이 왕자'로 불린다고 했다.
땡땡이도 적당히 처야 하는데 오로지 땡땡이만 관심이 있다보니 교련까지 땡땡이를 쳤고 그 덕에 교련 점수를 F를 받게됐다. 그러나 당시는 군사 정권의 서슬이 퍼런 때라 교련을 F를 맞으면 다른 학점, 학생이라는 신분하고 무관하게 영장이 나오던 시절이었다.
결국 교련 선생님께 사정 사정하고 리포트를 제출하는 조건으로 간신히 D로 학기를 마감했다. 이런 상황이니 따로 얘기할 필요가 없을 정도인데, 삼수를 하면서도 여전히 공부를 하지 않은 덕에 마땅히 갈 학교가 없었다. 당시 관동 대학교를 다니던 다른 친구 녀석이 서울의 대학교는 힘들지만 지방의 대학교는 가능하다고 꼬셔서 이 녀석도 관동 대학교 환경 공학과를 무전기까지 동원한 눈치 작전으로 간신히 합격했다.
관동대에 가서도 이 녀석의 상황을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이 녀석의 부모님은 당시 방아간을 하셨다. 당시 방아간을 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알부자였다. 이녀석의 집도 겉으로 보기에는 중류층 가정이지만 이미 집만 10여채 가지고 있었던 알부자였다.
따라서 집에서 보내준 돈으로 편하게 당구나 치면서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물론 공부는 안했다. 거의 모든 과목이 F고 작년의 경험을 교훈 삼아 '교련만 D'를 맞았다. 그리고 영장이 나와 군대에 갔다.
군대, 갈라진 젊음
지금 기억으로는 녀석은 수색에 있던 '30사단'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수도 경비 사단이라는 이름 답게 주로 하는 훈련이 시위 진압 훈련인 충정 훈련이 전부이고 분임 토의 시간에는 폭도 중 친구가 있는데 중대장이 발포 명령을 내린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를 토의했다고 한다.
훈련이 워낙 힘들어서 인지 이 녀석의 말투는 완전히 군인 말투로 바꼈다. 술한잔도 못하던 녀석이 휴가를 나와 하루 종일 술을 사달라고 할 정도로 술도 늘었다. 다만 충정 훈련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녀석이 휴가를 나올 때면 꼭 부상을 당해있었다. 귀가 찢어진 적도 있고, 눈이 찢어진 적도 있고.
아무튼 이 녀석이 제대를 했다. 그런데 제대한 뒤 이 녀석이 한 첫마디는 앞으로는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에 친구들을 만날 시간이 없으므로 이해해 달라는 것이었다. 평생 공부랑은 담을 싼 녀석이 그래도 기특한 소리를 하는 것 같아 그렇게 해주기로 했다.
그런데 공부하기 위해서 한 소리가 아니었다. 다른 여자를 사귀면서 친구들 모임에 빠지기위한 일종의 술책이었다. 그리고 반년 뒤 갑자기 녀석이 결혼을 한다고 친구들을 불렀다. 물론 친구들의 배신감은 컸다. 특히 모임을 주관했던 친구는 녀석이 우리들을 만나러 간다고 거짓말[3]을 하고 여자를 만난 것을 알고 더욱 이 녀석을 싫어했다.
이때 이 녀석의 나이가 23이었다. 내막을 들어보니 이 녀석과 친하게 지내는 친구 중 한 친구가 제대 기념으로 이 녀석에게 여자를 소개시켜준 것이었다. 다른 친구들도 이 아가씨 친구들과 미팅을 한적이 있다고 했다. 문제는 이 아가씨들이 하는 일이 관광 가이드 비슷한 일이었고 모두 남자 관계가 복잡했었다.
혼인, 야속한 운명
그런데 이 녀석은 이 아가씨에게 폭 빠졌고 결국 임신을 하자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결혼을 하게된 것이었다. 이때 처음 함을 팔아 봤는데 이 아가씨의 집이 워낙 인색해서 결혼한 뒤 여는 피로연 비용도 함 값이 모자라 우리가 지불했다.
그렇지만 녀석은 결혼한 뒤 상당히 많이 바뀌었다. 부양 가족이 있다는 책임감 때문에 전처럼 흥청 망청 쓰지도 않았고 나름대로 공부도 열심히 했다. 집이 알부자라 강원도에 아파트도 한채 얻어 주고 한달 생활비로 60만원 정도(당시 대졸 초임 평균이 35만원 정도였다)를 보내주었기 때문에 별 다른 고생을 하지 않고 학교 생활을 한 것 같았다.
대학교 3학년 때 환경 기사 2급을 합격을 하자 이 녀석의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녀석의 집안을 통털어 국가 고시에 합격한 사람이 없는데 이 녀석이 합격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녀석의 부모님은 녀석에게 차를 사주었다.
아들이 자랑스러워 사준 차이지만 결국 이 차 때문에 녀석은 25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대학원에 다닐 때였느데 갑자기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친구: 야. 윤수 죽었단다.
도아: 장난치니. 며칠 전에 술마시고 지 애보러 간다던 녀석이 왜 죽어
친구: 차를 몰고 가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어제 죽었데.
결국 녀석의 시신이 있다던 원주 세브란스 병원으로 갔다. 녀석의 부모님은 먼저 와게셨다. 사고 경위를 물어봤는데 우리 나라의 전형적인 몰상식한 운전자 때문에 발생한 일종의 살인이었다. 나이가 들고 운전을 배웠다면 이런 일이 발생했을 가능성은 더 줄어 들지만 나이가 젊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다른 지역에 있던 친구를 만나고 집으로 가는 도중 국도에서 느리게 가면서 길을 비켜주지 않는 차를 보자 추월을 한 모양이었다. 문제는 그동안 천천히 가던 차가 추월을 하려고 하자 따라서 속력을 내며 따라 붙자 추월을 하지 못하고 중앙선을 침범한체 달리다 반대쪽에서 오는 차와 충돌한 모양이었다.
교통 사고가 났을 때까지만 해도 살아 있었고 원주 세브란스 병원에 와서도 한시간 정도 살아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사고가 난 뒤 응급처치만 제대로 했으면 죽지 않았겠지만 추월을 양보하지 않은 운전자는 도망가느라 바빴고, 충돌을 한 운전자는 경황이 없었기 때문에 발생한 '애꾿은 죽음'이었다.
친구가 죽고 난 몇달 뒤 친구들이 다시 모였다. 어차피 녀석의 처는 남자없이는 살지 못하는 여자 이므로 크게 걱정할 것은 없지만 친구의 아이는 우리가 돌봐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친구의 집이 못사는 것도 아니고 충분히 여력이 있는 상태에서 우리가 나서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는 것 같아 명절을 기회로 죽은 녀석의 집을 찾아갔다.
엄마, 어디가요?
친구가 죽은지 석달, 아이의 엄마는 집에 없었다. 친구 부모님이 친구 처에게 제안을 했다고 한다.
아이와 단 둘이 살고 싶으면 집을 얻어 주겠다.
우리와 함께 살고 싶으면 함께 살아도 된다.
제발 아이가 엄마와 떨어질 수 있을 때까지만 키워다오.
그러면 네가 시집을 간다고 하면 그 비용은 우리집에서 부담하겠다.
그러나 녀석의 처는 녀석이 죽은 한 달 뒤 집을 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우리를 보면 녀석이 생각나기 때문에 이제는 찾아오지 말라는 말씀도 하셨다.
당시 친구의 딸은 세살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엄마, 아빠와 함께 즐겁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엄마와 아빠가 사라지는 일을 경험한 그 아이[4]. 지금도 친구의 딸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젊은 여자가 남편도 없이 아이를 키우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아이를 두고 떠날 만큼 그렇게 절박했을 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우영이와 다예를 낳았다. 지금도 그 생각이 든다. 이런 아이들을 두고 어떻게 떠날 수 있을까? 물론 내 생각이다.
- 지금을 서일 대학으로 바뀐 것으로 알고 있다. ↩
- 지금은 '새내기'라는 단어가 보편적으로 쓰이지만 당시에는 '신입생'이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됐다. ↩
- 당시 녀석의 부모님은 녀석의 친구들 중 우리 외에는 믿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를 만나러 간다고 하면 보내주어도 다른 친구를 만난다고 하면 통제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
- 나도 경험한 일이지만 아이들은 가끔 엄마와 아빠가 사라지는 꿈을 꾼다. 자신의 행복이 갑자기 사라질 수 있다는 아이들의 잠재의식이겠지만 나도 이런 꿈을 꾼적이 있다. 우영이도 비슷하다. 갑자기 일어나서 엉엉 운다. 조금 달래고 물어보면 꿈속에서 엄마, 아빠가 없어졌기 때문에 운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이 꿈이 아니라 사실이라면. 생각만 해도 안쓰럽고 괴롭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