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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가 번역한 것이 아닙니다.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라온 번역을 다듬은 것임을 밝힘니다. 원문은 South Korea push the football of fear closer to oblivion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부제: 공동 주최국 한국이 용기와 모험과 숨막히는 신념을 보여온 반면 독일은 이번 대회에 별로 한 게 없다.

이제 격정적이며 이변의 연속이었던 제17회 월드컵에 대한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할 때다. 잉글랜드가 힘없이 퇴장한 지금 우리는 일요일 요꼬하마에서 벌어질 마지막 경기에서 누가 이기길 바라는가? 내 자신의 바람은 확고하다. 나는 축구 최고의 상인 월드컵 우승이 가장 자격있는 팀, 플레이 모든 면에서 정직함과 열정과 깨끗한 얌심적 축구를 보여준 팀에게 돌아가길 바란다. 나는 그 팀의 주장이 대회 최고의 선수로서 축구란 것이 추한 냉소거리가 아니라 도덕적 용기에 관한 거라고 아직도 믿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대표하여 우승컵을 가져가길 바란다.

나는 진정한 리더요 성숙하고 강인한 주장이며 지난 주말 스페인을 물리치는 마지막 페널티 킥을 차넣을 때 그토록 당당했던 한국의 홍명보가 우승컵을 들어올리기 바란다. 왜냐면 그만이 유일무이하게 팀동료와 조국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새로운 피와 가치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세계인의 경기인 축구를 위해서도 우승을 했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리드를 지킬 동안만 뛰는 척 하는 게 아니라 전 경기를 뛸 모험심과 용기와 의지가 있던 축구의 뿌리로 되돌아가게 하는 가치를 위해서 말이다.

8강전에서 스페인의 두 골을 무효처리한 이집트 심판 가말 간두르의 관대한 판정은 잊어버려라. 낡은 축구의 수구세력은 피파가 공동 주최국중 하나인 한국을 통과시키려고 했다고 주장한다. 열광적 관중 앞에서 경기하는 주최국은 애매한 상황에서 덕을 벌 수도 있다. 1966년 잉글랜드가 우승할 때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것을 어렵지 않게 단언할 수 있다.

패퇴한 세계 축구 강국들, 특히 이태리, 16강전에서 겁을 먹고 겨우 아일랜드를 이긴 스페인, 프랑스, 아르헨티나, 그리고 특히 또 잉글랜드가 곰곰 따져봐야 할 것은 오늘 서울에서 열리는 독일과의 준결승에 한국이 자리잡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잉글랜드가 죽어도 못버리는 의심 탓에 호나우딩요의 기막힌 프리킥에 덧씌우는 혐의인 괴상망칙한 행운인가, 아니면 훌륭한 다섯 게임에 걸친 엄청난 양의 노력의 결과인가? 당연히 후자인 것이다.

'코리아팀 파이팅'은 관록의 네덜란드인 감독 휘스 히딩크가 지난 18개월동안 만들어 낸 팀에 대한 더할나위 없는 수식어이다. 당연히 한국팀이 보여준 체력은 약물 덕분이라는 중상이 따랐다. 히딩크는 그따위 주장을 헛소리로 일축한다. 그보다 그는 엄청난 수준의 신념과 경기에 대한 열정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든 경기를 소화하게끔 해주는 체력을 만들어 낸 힘들었던 시간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한국 축구는 근본적으로 공격적이며 대충 차는 긴 볼에 어떤 공간도 허용치 않는다. 그것은 쉴 새 없이 달리기를 요구하며, 따라서 볼을 가진 선수가 늘 패스할 수 있는 곳이 많아진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식의 축구는 지난 금요일 35분 동안 아무 생각 없이 둔한 플레이를 펼친 잉글랜드를 그토록 편안하게 쫓아냈던 10명의 브라질팀을 강하게 압박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의 놀라운 선전이 있게 한 사람이 네덜란드인이라는 건 우연이 아닐 지 모른다. 1970년대에 축구에 '토탈 사커'로 축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게바로 네덜란드 아닌가? 1974년 뮌헨에서, 4년 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이들이 준우승에 그친 건 이 새로운 축구 운동에겐 비극이었다. 당시 네델란드 감독( Rinus Michels)에겐 토탈 사커의 지휘자로 엄청난 재능을 타고 난 요한 크루이프가 있었다.

히딩크에겐 축구 신이 내려준 그런 천재는 없다. 하지만 그에겐 세 번의 월트컵 출전 동안 1승도 못올렸지만 수비를 강철같은 의지로 조직하는 노장 홍명보와, 일생일대의 도전에 맞서 이태리에게 결정타를 먹인 죄로 페루자가 창피하게 쫓아낸 안정환 같은 공격수가 있다.

한국의 승리에 대한 불만은 그것이 축구의 이미지에 도움이 안된다는 것이리라. 한국 축구엔 지단도, 베론도, 토티도, 히바우두도, 선수중 선수도, 축구의 아룸다움을 대표할 누구도 없다.

그러나 축구 역사의 현 시점에서 그것은 어깨 한 번 으쓱으로 무시하고 말 사항이다. 남미의 모든 최고 선수들을 흡수하는 유럽 축구 조직과 그들의돈과 수단방법을 안 가리는 승리에 대한 강조때문에 축구의 구 질서는 이곳에서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이태리는 불운을 주장한다. 하지만 운은 스르로 만든다는 게 사실이라면 아주리군단은 징징대는 운명론을 가지고 경기에 임했다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멕시코 앞에서 가련했고, 한국에게 앞섰을 때 그네들 식 축구의 신중함--좋게 얘기해 주자고--은 장막처럼 내려왔다.

용감하게 휩쓰는 축구를 원하는 많은 이들의 희망이었던 스페인 또한 아일랜드와의 16강전에서 그 못지 않게 비참했고, 주심이 승부차기 시작을 알릴 때 저 위대한 라울은 안도의 미소를 만면에 띄웠다. 이게 진정 스스로 세계 최고라고 여기는 팀이었던가?

잉글랜드는 그저 스스로를 배신했다. 언젠가 크루이프는 영국 축구는 기술이 아무리 모자라도 엄청난 용기와 상대를 위협하는 체력때문에 세계가 두려워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소리 브라질 애들한텐 하지 마라-- 기냥 웃을 테니까.

독일은 아일랜드와 미국을 상대로 살아남은 게 다행이었다. 불쌍한 사우디를 박살낼 때 그들이 보여줬던 그 모든 거만은 쪼그라져 없어졌다. 골키퍼 올리버 칸과 독일 수비수가 골라인에서 저지른 핸들링을 주심이 운좋게 못보고 넘어간 것이 미국과의 경기에서 그들을 구했을 뿐이다. 20년 전에 독일은 알제리를 떨어트리려고 오스트리아와 탱자탱자 비기는, 월드컵 역사상 가장 수치스럽다 할 경기를 치른 바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싸우는 한국팀이 오늘 서울에서 축구의 무슨 덕목을 위협한다는 것인가? 그들이 축구의 전통적 가치를 멱살잡이라도 한다는 것인가? 그들이 이번 월드컵의 질을 말살시키는 마지막에서 두번째 게임을 한다는 것인가? 아니면 그들은 두려움의 축구, 하다 마는 축구, 뺑소니치고 지키는 축구를망각의 저편으로 조금 더 밀어부치려 하는 것인가? 그들은 물론 마지막 코스를 택한다. 대회 내내 기울인 노력의 결과로, 또 스페인보다 이틀 덜 쉬고 경기를 치러야 했던 결과로 지난 주말 명백히 바닥난 밧데리가 아마 충분히 재충전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독일이 또 다시 어찌어찌 이겨서 네번째 월드컵 냄새를 맡으면서 요꼬하마로 향할 지 모른다. 그럴 가능성이 상당히 높지만 결국 그래 봐야 자기네 조국의 국경을 초월하는 경축의 대상은 될 수 없을 것이다.

독일은 이번 월드컵에 가져다 준 게 거의 없지만 한국은 그 어느 팀에게 요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져다 주었다. 그들은 능력의 절대 한계에 이르도록 경기했고 그 축구의 질 또한 뛰어났다. 그들은 뛰고 패스했으며 늙고 배부른 거물들에게 창피를 주었다.

일요일 오늘 밤에 어떤 결과가 나오든 한국은 관록의 축구인 히딩크에게 동상을 세워줄 것이다. 그것은 한 나라를 일깨워 준 이에게 바치는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더 넓은 세계의 축구계는 그가 그보다 더 큰 일을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는 부자와 가난뱅이, 전통의 강호들과 새로운 도전자들 모두를 스스로 돌아보도록 했다. 지난 몇 주 동안 한국의 이미지보다 더 눈길을 끄는 건 없었다. 그들은 지치고 돈독이 오른 낡은 축구의 잔꾀를 때려부수고 축구에 새 생명, 새 영혼을 불어넣었다. 그들은 아무리 잠깐일지라도 그들이 재생시키려 그토록 노력한 축구의 세계를 상속할 자격이 있다.

이 기사는 영국 인디펜던트지에 25일자로 실린 축구 전문 칼럼니스트인 제임스 로튼의 글입니다[기사원문].

인터넷에서 구한 자료라 역자는 알 수 없습니다. 번역한 분께 감사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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