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스승의 날이다. 스승의 날 생각나는 스승이 없다면 이 또한 불행한 일인 것 같다. 나 역시 스승의 날이면 꼭 기억나는 선생님이 있다. 바로 동대문구 전농동에 있는 배봉 초등학교의 도태정 선생님이다. 이미 30년이 지난 지금도 선생님의 이름과 고운 자태가 그대로 떠오늘 수 있는 것은 매년 스승의 날이면 항상 도태정 선생님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아니 삶의 이음새 마다 떠 오른다. 어머니를 빼면 처음으로 좋아한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학교에 계시는지, 아직도 선생님을 하고 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스승의 날이면 언제나 선생님의 고운 자태가 떠 오른다.

이전 글들에서 알 수 있듯이 어린 시절은 아주 가난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운동화의 밑 바닥이 다 떨어져 나갔다. 그런데 집에 신발을 사달라고 할 수 없었다. 몇 십원의 방위 성금도 못내는 판에 떨어진 신발도 분에 넘치기 때문이다. 이 날은 비가왔다. 당연히 여기 저기 물이 고여있었다. 지금처럼 아스팔트라면 비에 젖지 않은 부분을 밟고 집으로 올 수 있지만 흙 길에 물 웅덩이가 많아 불가능했다. 그래서 양말에 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웅덩이를 피해다니는 것은 포기하고 아예 웅덩이를 밟고 다녔다.

어차피 젖을 양말과 신발이라면 물놀이를 할 심산이었다. 이렇게 웅덩이를 밟고 다니자 사정을 모르는 친구들도 따라서 물 웅덩이를 밟고 다녔다. 이렇게 물웅덩이를 밟고 집에 갔다가 어머님께 걸려 혼이났다. 결국 울면서 왜 웅덩이를 밟고 다녔는지를 설명했다. 어머님께서도 우셨고 나도 울었다. 다만 이날 새신을 신을 수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 선생님은 다른 학년보다 더 열의있고 좋은 선생님을 배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초등학교 1학년은 단순히 1학년이 아니라 아이가 사회라는 문턱을 넘는 첫 단계이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선생님을 잘 못 만나면 공부 자체에 흥미를 잃어버린다. 아울러 학교라는 사회가 싫어진다. 바로 내가 그랬다.

나는 이문 초등학교를 다녔다. 당시 이문동에는 시골에서 상경한 사람들이 아주 많았고 뚝빵 위에 판자집도 즐비했다. 그래서 인지 처음 이문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는 삼부제 수업을 했다. 오전반, 점심반, 저녁반. 1학년만 18개반이 이었는데 3부제 수업을 했으니 총 54개반이 있었던 셈이다. 물론 이학년 때는 학급수도 줄고, 이부제로 바뀐 것으로 봐서 일시적인 현상으로 생각된다. 아무튼 이렇게 입학한 초등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은 촌지를 아주 좋아했다. 따라서 촌지를 받을 때까지 아이들을 괴롭혔다.

숙제를 냈다. 그러나 노는 것을 좋아한 덕에 하지 않았다. 다음 날 30cm 대나무 자가 쪼개질 때까지 맞았다. 이번에는 숙제를 해갔다. 다음 날 "글씨를 못썼다"고 30cm 대나무 자가 쪼개질 때까지 맞았다. 또 숙제를 해갔다. 이번에는 거의 그려서 갔다. 몇 시간이 걸렸는지 모른다. 다음 날 "띄어쓰기를 잘못했다"고 30cm 대나무 자가 쪼개질 때까지 맞았다. 숙제를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몰랐다. 그래도 숙제를 해갔다. 다음 날 "맞춤법이 틀렸다"고 30cm 대나무 자가 쪼개질 때까지 맞았다.

이 날 이후로 숙제는 해가지 않았다. 그냥 숙제 검사를 하면 손을 내밀고 대나무 자가 쪼개질 때까지 맞았다. 이 선생 이렇게 패는 아이들의 공통점은 가난한 아이들이라는 것. 지금은 키가 큰 편이지만 당시에는 영양 실조에 걸려 있어서 빼싹 마르고 키가 작은 아이였는데 교실 가운데 줄 가장 끝에 앉혔다.

짝도 없다. 그리고 얼마 뒤 여름에 겨울 밍크 코트를 입고다니며 목욕을 전혀 하지 않는 여자 아이(언챙이고 약간 모자란 듯한)를 짝으로 해줬다. 이 선생이 나를 이렇게까지 괴롭힌 이유는 딱 한가지이다. 바로 촌지. 아이를 패고, 해꼬지를 하면 아이가 부모에게 말하고 결국 부모가 오고, 당시의 관행대로 촌지를 찔러 주기 때문이었다. 두들겨 패도 짝꿍을 바꿔도 부모님이 찾아 오지 않자 가정 통신문을 돌렸다. 아이 수업을 참관하도록. 당시 어머님은 일을 하지 않으셔서 이날 학교에 오셨고 부담이 되셨지만 얼마의 촌지를 선생님께 찔러 주셨다. 그 뒤로는 숙제를 하면 때리지도 않았고 짝도 다른 여자 아이로 바꾸어 주었다.

이때 기억은 정말 참혹했다. 매일 매일 학교에 가는 것이 죽는 것보다 싫었다. 학교에 가기 싫다고 떼써도 소용이 없었다. 나에게 초등학교 1학년은 인생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시절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니 매맞는 것도 익숙해 졌다. 처음에는 맞다가 피했지만 나중에는 부러질 때까지 웃으면서 맞았다. 당연히 선생은 더 열받아 했다. 나는 맷집이 좋다. 어지간히 맞아서는 통하지도 않는다. 이런 맷집은 모두 초등학교 1학년 때 익혔다.

2학년으로 올라가자 남자 선생님으로 바뀌었다. 촌지를 받지 않는 선생님은 아니지만 최소한 촌지를 주지않는다고 구박은 하지 않았다. 3학년 때는 또 여선생. 이 여선생은 체벌은 별로 하지 않지만 대신에 집에까지 뛰어 갔다 오도록 매일 시켰다. 없는 돈 어디서 나겠는가? 그러나 방위 성금을 낼 때까지 집에까지 뛰어 갔다 오도록 시켰다. 나는 지금도 초등학교 여선생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기억들 때문이다.

4학년 때는 남자 선생님이셨다. 젊고 의욕넘치며, 보이스카웃을 지도하던 선생님이셨는데 이 선생님에 대한 기억도 좋은 편이다. 5학년 때 선생님도 남자 선생님이셨지만 이렇다할 기억은 나지 않는다. 5학년 때 이문동에서 면목동으로 이사갔고 결국 중랑 초등학교로 전학 갔다.

중랑 초등학교에서 6학년 때 도태정 선생님이 계시는 배봉 초등학교로 다시 전학을 갔다. 처음 본 도태정 선생님. 예쁘게 생겼지만 여선생에 대한 인상 때문에 불안했다. 소개가 끝나고 남자한테는 별 인기가 없었던 깍쟁이 같은 여자애가 짝궁이 되었다[1][2].

신기한 일이지만 내가 가는 학급은 언제나 문제 학급이었다. 전학을 간 배봉 초등학교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전학기까지 우수학급 표창까지 받았는데 내가 전학간 뒤 바로 문제 학급으로 변신했다. 그래서 선생님께 혼도 많이 났다. 그러나 도태정 선생님께는 예전에 보았던 선생님과는 다른 모습을 봤다.

아이들이 너무 말을 안들어 화가 나서 대나무 자로 아이의 손을 때렸다. 그리고 몇대 때리지도 못하시고 이내 우신다. 맞은 아이의 손을 잡고 얼굴에 부빈다. 그리고 아이를 꼭 끌어 안는다. 많이 보던 모습이다. 바로 우리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정말 아이들을 자식처럼 생각하고 가르치셨다. 때리면 당신의 마음이 아프시기 때문에 한번 대자로 아이를 때린 뒤로는 때리는 일도 없었다. 대신에 벌을 세웠다. 이렇게 벌을 세우면서도 시간이 조금 지나 아이들이 힘들어 하는 것을 보면 이내 우시면서 아이들에게 부탁을 하셨다. 이때 쯤이면 반전체가 울음 바다가 된다[3].

도태정 선생님 덕에 교사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많이 지우고 초등학교를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초등학교 1학년 담임에 대한 뿌리박힌 기억 때문에 역시 초등학교 교사는 좋아하지 않았다. 그 뒤 중, 고등학교를 지나면서 이런 저런 선생님을 만났고 교사에 대한 안좋은 이미지는 많이 희석되어 갔다. 그러나 미팅에서 교대생을 만나면 재수없게 생각했고 그래서 소명감이 없으면 최소한 초등학교 교사는 하지 말라고 강변 했다. 미팅이 잘될리 없다.

아무튼 지금도 스승의 날이면 아이를 때리다 손을 붙잡고 맞은 손을 얼굴에 부비며 울며 안아 주시던 선생님이 생각 난다. 아이를 자식처럼 사랑하신 분.

그래서 언제나 당신이 그립습니다. 사랑합니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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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선생님의 첫 소개다. "공부 잘하고 아주 잘생긴 남학생이 전학을 왔어요". "잘생겼다"는 말은 듣기 싫을 정도로 많이 들었다. 
  2. 옆자리에 앉았는데 짝궁이 아주 친절했다. 인형 그림을 아주 잘 그렸는데 생글 생글 웃으며 그림 그리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그런데 쉬는 시간에 남학생들이 수근 거리는 것이었다. 사정을 알아보니 다른 남학생들한테는 아주 싸남쟁이로 소문난 여학생이었다. 
  3. 물론 교사는 아이들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아이를 때리다 우는 것은 처음에는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조금만 지나면 통제권을 잃게된다. 그러나 나처럼 초등학교 1학년을 대나무 자가 쪼개질 때까지 맞고 자란 사람은 이 선생님이 진정한 교육자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