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워드, 아래아 한글 by 도아
혁신 그자체였던 아래아 한글
내가 처음 사용해 본 워드는 삼보의 보석글이었다. 도깨비와 같은 외부 한글 프로그램을 실행한 뒤 사용해야 하는 프로그램이다. 지금 생각하면 워드라기 보다는 간단한 문서 편집기 수준이었다. 다만 메뉴가 요즘 사용되는 풀다운 메뉴가 아니라 실행한 뒤 빠져 나오는 방법을 몰라 꼭 컴퓨터를 꺼서 빠져나와야 했던 프로그램이다. 바로 이런 상황에 혜성처럼 등장한 워드가 아래아 한글이다. 풀다운 메뉴로 사용자의 접근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했고 자체 한글을 사용해서 외부 한글 프로그램이 필어없는 프로그램이었다. 따라서 당시로는 아주 혁신적인 프로그램이었다. 오늘은 한컴 창립 20주년을 기념해서 아래아 한글에 대한 추억을 회고해 볼까 한다.
IMF가 터지고 한컴이 Microsoft에 인수되려고 하자 한컴의 인수 반대 운동이 불면서 나온 한글 815. 1년 사용권을 만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판매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혁신의 아이콘, 아래아 한글
처음 대한 아래아 한글(HWP)은 정말 혁신적이었다. 사용하기 쉬운 메뉴, 화면에 보이는 그대로 출력되는 위지윅(WYSIWYG). 이렇다 보니 삼보 보석글 보다는 대학생이 만든 소프트웨어가 더 폭넓게 사용됐다. 다만 '아래아 한글'이 생긴 뒤 부작용이 하나 생겼다. 당시에는 컴퓨터가 있어도 워드프로세서로 출력해서 보고서를 만드는 문화는 없었다. 컴퓨터가 있어도 대부분 볼펜으로 쓰고, 충무로 DTP 업체에 넘기면 충무로 업체에서 직접 입력해서 보고서를 만들었다.
보석글과 같은 워드는 UI 자체가 불편했다. 그러나 위지윅이 되지 않아 화면과는 다른 결과가 출력됐다. 따라서 개인이 전산사식 대용으로 쓰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런데 아래아 한글이 등장한 뒤 이런 상황이 바뀌었다. 대학원생들은 아래아 한글로 출력해서 논문을 만들었고 교수님은 아래아 한글로 보고서를 출력해서 만들었다. 충무로의 DTP 업체에 넘기는 것 보다 품질은 조금 떨어지지만 비용면에서 확실히 잇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예전에는 DTP 업체의 타이피스트가 할 일이 이제는 대학원생의 일이 된 것이다. 나도 비슷했다. 대학원 내에서는 컴퓨터를 잘하는 축이었다. 또 "아래아 한글은 개발자 보다 더 잘쓴다"는 평을 들었다. 이렇다 보니 대부분의 보고서 작업은 모두 내 몫이었다. 당시에는 표를 그리는 작업이 아주 힘든 작업이었다. 보석글은 선문자를 찾아 입력해야 했다. 그런데 아래아 한글은 화살표만으로 표를 그릴 수 있었다[1].
지금처럼 표를 개체로 다루었다면 오늘 이야기하는 에피소드는 아마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당시는 보석글을 쓰던 아래아 한글을 쓰던 모두 선문자를 이용해서 표를 그렸다. 개체가 아니니 표에 내용을 입력하면 자연스레 선문자가 뒤로 밀린다. 따라서 표를 그릴 때는 표를 그리고 내용을 입력한 뒤 다시 공백을 제거하는 과정을 반복해야 했다[2]. 이런 표가 많지 않다면 큰 문제는 없다. 그러나 표가 많을 때는 이 작업을 반복하는 하는 것이 상당히 귀찮다. 그래서 애용한 기능이 매크로였다.
혁신은 노가다를 낳고
아무튼 당시도 보고서를 작성할 때였다.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총 100여장의 보고서에 약 '60~70장'이 '표'로 된 보고서였다. 따라서 내용을 쓰는 것 보다는 표를 만들고 내용을 입력한 뒤 배분으로 글의 양옆을 맞추느라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표에 내용을 입력하면 교정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일단 교수님께 내용에 대한 '교정은 완전히 받은 상태'였다. 며칠을 고생해서 70여장에 이르는 표를 모두 완성했다. 그리고 인쇄하고 교수님께 마지막 검수를 받았다. 열심히 검수하던 교수님께서 한마디 하셨다.
미안한데 여기에 조금만 추가하자!
한 글자를 추가하면 공백을 조절해서 어느 정도 표를 맞출 수 있다. 아예 양옆이 딱 맞는 한줄이라면 역시 한줄을 추가하고 페이지를 조절하면 된다. 그런데 아주 애매하게 조금 긴 문단이었다. 또 하필이면 고친 부분이 20여 페이지가 넘는 표의 중간 부분이었다. 추가된 이 부분 때문에 일단 줄 양옆의 선문자를 제거했다. 그리고 다시 줄바꿈 문자 제거했다. 여기에 각줄을 양쪽 배분에 맞게 정리하고 선을 그어 다시 표를 만들었다. 또 추가된 부분 때문에 페이지가 밀렸다. 결국 조금 추가한 것 때문에 한 50여 페이지를 다시 작업해야 했다.
물론 상당 부분 매크로에 의존해서 한 작업이다. 그러나 역시 시간은 만만치 않게 걸렸다. 요즘처럼 표를 개체로 처리하는 워드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당시 표를 만드는 작업은 이처럼 상당히 힘든 작업이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단순히 글자만 추가하면 되는 줄안다. 그런데 의외로 복잡하다. 다만 좋은 일이든 고생한 일이든 시간이 지나면 추억이 된다. 그래서 이 일 역시 내게는 꽤 깊은 추억으로 남았다.
흉내낼 수 없는 자동 저장
내가 아래아 한글을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 중하나는 바로 자동 저장 기능이었다. 아래아 한글의 자동 저장은 두가지 기능을 제공했다. 작업과 무관하게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저장하는 기능은 다른 워드에도 있었다. 그러나 키보드 입력이 없는 몇초 뒤에 자동으로 저장하는 기능은 아래아 한글에만 있었다. 얼마 전 부터는 MS 워드에도 들어간 기능이지만 한 10여년 넘게 아래아 한글에만 있었다.
그러나 당시 몇분이 지나면 자동으로 저장하는 기능은 쓰지 않았다. 그 이유는 떨어지는 시스템에서 이 기능을 쓰면 파일을 자동 저장하느라 작업 중 키보드 입력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로 사용한 기능은 키보드 입력이 없으면 몇초 뒤 자동으로 저장하는 기능이었다. 내용을 생각하거나 커피를 마시고 있는 동안 자동으로 저장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또 노는 시간에 저장하는 것이라 시스템이 버벅 거려도 큰 문제가 없었다.
역시 보고서를 쓸 때였다. 올빼미과인지 모르겠지만 작업 효율은 밤이 높았다. 따라서 보고서도 밤에 쓰기 시작해서 새벽까지 작업하는 때가 많았다. 당시도 비슷했다. 밤을 꼬박 새며 작업을 했다. 그리고 창문 밖으로 먼통이 트기 시작했다. 밤샘 작업에 조금 지치기는 했지만 마무리 시간이 다가왔기 때문에 오히려 힘은 더 났다. 그런데 이때였다. 갑자기 형광등이 깜박하고 나갔다 들어왔다. 그리고...
형광등은 깜박여도 상관없다. 다만 컴퓨터로 작업 하던 보고서까지 날라갔다. 그러나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앞에서 이야기한 자동 저장 기능 때문이다. 어치파 날라갔다고 해도 지난 몇분간 작업만 날라갔을 것으로 생각했다. 또 글 다쓰고 잠깐 잠깐 딴짓하며 작업 했기 때문에 이 시간 동안 날라간 것이 얼마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무지는 다시 노가다를 낳고
"엎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한다. 작업 하던 것이 날라갔기 때문에 잠깐 커피를 마시고 작업하기로 했다. 그리고 3층으로 내려가 자판기에서 커피를 빼 마셨다. 또 마침 등교하던 동기를 만나 잠시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4층 교수님방으로 와보니 선배가 워드 작업을 하고 있었다. 대학원 보고서 때문에 작업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선배가 작업하는 것을 보고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아: 선배, HWP 실행한 뒤 저장하라는 메시지 안떴어?
선배: 떴는데.
도아: 어떻게 했어?
선배: 아무것도 없는데 뭘 저장해?
아래아 한글은 파일배 자동으로 저장한다. 그리고 이렇게 저장한 파일은 ASV라는 확장자를 붙인다. 아래아 한글을 실행하면 먼저 ASV 파일있는지 확인한다. 있으면 불러와 HWP로 저장할 것인지를 묻는다. 이때 '아니오'를 선택하면 새로운 문서를 열고, 백업 파일인 ASV 파일은 삭제한다[3]. 이런 동작과정을 정확히 아는 나는 어떤 컴퓨터에서 작업을 해도 아래아 한글을 실행하고 이런 메시지가 뜨면 일단 저정한다. 그러나 이와 내용을 모르는 선배는 '아니오'를 선택한 것이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솟구쳐 선배을 밀치고 찾아 봤지만 역시 ASV 파일은 삭제되고 없었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 조금만 더 빨리 올라왔으면 하고 후회했지만 역시 늦었다. 그러나 역시 '호랑이한테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파일이 삭제되기는 했지만 선배가 작업한 시간이 길지 않기 때문에 복구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다. 일단 아래아 한글을 끝내고 노턴 유틸리티로 복구를 시도했다.
결과는?
한컴 20주년을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