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본 제국 최후의 군인, 박정희

박정희가 죽자 일본의 한 외교관은 '대일본 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고 평한다. 일본인 마저도 '대일본 제국 최후의 군인'으로 평가한 박정희. 박정희가 만들고 싶었던 나라는 일본이 만주에 세운 괴뢰국(만주국)이었고 박정희의 정책도 여기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난 박정희를 친일매국노 보다는 '일본인'으로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박정희의 주군은 셋이었다. 첫번째 주군은 일왕, 두번째 주군은 김일성, 세번째 주군은 미국이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주군 셋을 모두 배반한다. 일왕을 섬기다 김일성에게 돌아서고 김일성을 섬기다 미국에 돌아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국에게도 돌아섰다. 그래서 난 박정희를 매국노 빨갱이[1] 독재자라고 부른다. <사진: 대일본 제국 최후의 군인, 다까끼 마사오>

또 돌려막기?

난 국내 서비스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국내 포털무거움, 무개념이 싫기 때문이다. 요즘 즐거 사용하는 서비스를 보면 대부분 외국 서비스이다. 그 중 가장 자주 사용하는 서비스는 역시 트위터(Twitter)와 텀블(Tumblr)이다. 트위터의 트윗을 보다 보니 재미있는 트윗이 하나 올라왔다. 바로 장동건, 고소영의 교제 보도는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가기위해 쓴 혈서를 숨기기 위한 것이라는 트윗이다.

사건의 규모를 보면 '장동건, 고소영이 사귄다'는 사실 보다는 박정희혈서가 더 크게 부각되어야 한다. 그런데 대다수의 언론은 박정희의 혈서는 다루지 않고 오로지 장동건과 고소영만 다룬다. 미디어법이 왜 인간을 가축으로 만드는 법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아무튼 우리나라가 아직까지 이념적 대립속에 빠져 있는 이유는 친일매국노를 청산하지 못한 우리의 슬픈 역사에 있기 때문이다.

대일본 제국 최후의 군인, 박정희

그러나 만주군관학교에 가기위해 '혈서를 썼다'는 것은 새로운 사실은 아니다. 적어도 박정희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작년 4월 민족문제연구소는 그간의 자료로 친일매국노 4776명을 발표했다. 친일매국노와 그 후예들은 이 숫자가 너무 많다고 한다. 무려 36년이다. 친일하지 않으면 애국이라고 했으니 전국민을 친일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3000만명 중 고작 4776명이 많은 것일까?'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매국노를 발표한 뒤 난 박정희는 친일파가 아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박정희는 친일파가 아니다. 박정희는 다까끼 마사오, 한국명 박정희인 일본인이다. 이 글에 인용된 내용을 다시 인용하겠다.

다까끼 마사오(高木正雄)

  • "대동아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습니다" - 만주 신경군관학교 졸업식장에서 다까끼 마사오(高木正雄)라는 졸업생의 답사
  • "다가키 생도(다까끼 마사오(高木正雄))는 태생은 조선일지 몰라도 천황폐하에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점에서 그는 보통의 일본인보다 훨씬 일본인다운 데가 있다" - 일본 육군사관학교 교장, 나구모 쥬이치(南雲忠一) 의 한 생도에대한 평가
  •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일본) 보답하고, 나를(私) 죽여서 국가를(公) 받들겠습니다" - 다까끼 마사오(高木正雄)의 혈서
  • "박정희 대통령과는 부자 사이 같은 관계로서 아들의 경축일을 보러 가는 것은 무엇보다도 즐겁다" - 일본의 자민당 부총재 오노
  •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 - 일본대사관의 외교관

인용된 글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일본인도 박정희를 일본인으로 본다. 그래서 박정희가 부임하자 '아들의 경축일을 보러 가는 것은 무엇보다도 즐겁다'고 하고 박정희가 죽자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이 죽었다고 평할 수 있는 일이다.

진충보국 멸사봉공

최근 박정희의 후손들이 친일인명사전을 걸고 나왔다. 박정희는 친일파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민족문제연구소는 박정희의 일본에 대한 충성도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려주기 위해 당시 만주일보에 실린 박정희 혈서 보도를 공개한 것이다. 다음은 만주일보에서 공개한 박정희에 대한 기사다. 번역은 민족문제연구소의 발표를 인용했다.

혈서(血書) 군관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訓導)로부터

29일 치안부(治安部)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訓導) 박정희군(23)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와 함께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를 넣은 서류로 송부되어 계원(係員)을 감격시켰다. 동봉된 편지에는

(전략)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일반적인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송구하지만 무리가 있더라도 반드시 국군(만주국군-편집자 주)에 채용시켜 주실 수 없겠습니까. (중략)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중략)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 : 편집자 주)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후략)

라고 펜으로 쓴 달필로 보이는 동군(同君)의 군관지원 편지는 이것으로 두 번째이지만 군관이 되기에는 군적에 있는 자로 한정되어 있고 군관학교에 들어가기에는 자격 연령 16세 이상 19세이기 때문에 23세로는 나이가 너무 많아 동군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중히 사절하게 되었다.

(『만주신문』 1939.3.31. 7면)

민족문제연구소 보도자료: updat.zip

박정희는 친일파가 아니다라는 글에서 한번 설명했지만 박정희는 친일파가 아니다. '박정희는 일본인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다까끼 마사오는 일본인이다. 그가 통치한 지난 18년은 일본 총독 다까끼 마사오[2]가 다스린 일정의 연장선이었다.

경제부흥의 공?

가끔 박정희의 공으로 과를 덮자는 사람들이 있다. 만약 이런 논리라면 일제의 우리나라 식민통치도 아무 문제가 없다. '조선민중을 수탈하고 생체실험까지 일본의 역시 공으로 덮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큰 본질은 일본이 발전시킨 '조선의 경제는 수탈을 위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점이다. 박정희 역시 마찬가지다. 설사 박정희가 우리나라의 발전에 사소한 공이 있다고 해도 그 공으로 박정희의 친일매국을 덮을 수는 없다.

박정희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쓴 기회주의 청년, 박정희를 보면 된다. 한겨레의 아이디가 없어서 이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은 이 글과 소회를 담아 블로그에 올린 기회주의 청년, 박정희를 보면 된다. 현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표한 친일인명사전의 링크는 사라졌다.

관련 글타래


  1. '빨갱이'라는 말로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되돌려 주기 위해 사용한다. 
  2. 다까끼 마사오는 박정희를 일본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외 박정희의 진짜 일본 이름이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오카모토 미노루'에 대한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