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에 대한 잘못된 믿음들 by 도아
이슬람
이슬람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은 "한손에는 꾸란, 한손에는 칼"이다. 아울러 떠 오르는 모습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자행된 테러다. 따라서 이런 모습만 보면 이슬람은 아주 베타적이고 공격적인 모습으로 다가 온다. 그러나 이슬람의 원래 모습은 이런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한손에는 꾸란, 한손에는 칼"을 이라는 말은 "꾸란을 받기 싫으면 칼을 받으라"는 말이라고 한다. "개종하기 싫으면 죽으라"는 뜻으로 기독교인들이 자주 인용하는 문구다. 그런데 이 말은 십자군원정에 실패할 당시 스콜라 철학의 대부였던 토마스 아퀴난스가 날조해낸 것이라고 한다. <사진: 한 손에 칼 한 손에 꾸란. 이슬람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잘못된 믿음이다. 재미있지만 난 이 말을 대학시절 교계에서 상당히 유명한 교목에게 들었다.>
이슬람
이슬람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은 "한손에는 꾸란, 한손에는 칼[1]"이다. 아울러 떠 오르는 모습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자행된 테러다. 따라서 이런 모습만 보면 이슬람은 아주 베타적이고 공격적인 모습으로 다가 온다. 그러나 이슬람의 원래 모습은 이런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한손에는 꾸란, 한손에는 칼"을 이라는 말은 "꾸란을 받기 싫으면 칼을 받으라"는 말이라고 한다. "개종하기 싫으면 죽으라"는 뜻으로 기독교인들이 자주 인용하는 문구다. 그런데 이 말은 십자군원정에 실패할 당시 스콜라 철학의 대부였던 토마스 아퀴난스가 날조해낸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회교(回敎)라고 부르지만 회교라는 의미 불명의 말 보다는 이슬람이라는 원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낫다. '이슬람'이라는 말은 무함마드가 만든 단어로 '복종'의 의미를 갖는다. 즉, '이슬람'이라는 말은 알라에게 복종할 때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2]는 뜻이다. 이슬람이라는 단어에 평화라는 뜻은 없다.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 바로 이슬람이다. 종교의 이름에 개창자가 등장하지 않는다. 마호메트(무함마드의 영어 이름)가 개창했기 때문에 마호메트교라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는 무지의 소치이다. 기독교는 신의 종교다. 여기서 '기독'은 'Christos'(그리스도의 영어 표시)의 중극어 음역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그리스도교가 된다. 신의 종교이지만 그 개창자인 인간 예수의 이름을 사용한다.
반면에 이슬람에는 그 개창자의 이름이 없다. '복종'이라는 명사를 그 종교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 이유는 "알라만 유일신이며 나머지는 모두 인간이기 때문"이다. 개창자 이름을 사용하면 인간 인식의 제한을 받을 수 있다. 반면 기독교는 유일신을 믿는 종교지만 여호와도 신이고 예수도 신이다. 이런 기독교 유일신관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이론이 바로 삼위일체이다. 여호와와 예수 모두 신이지만 두개가 아니라 하나라는 논리다.
기독교 신관
기독교 유일신관에는 자기 모순이 존재한다. 유일신이라는 말은 여러 신을 인정해야 나올 수 있다. 십계의 첫번째는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3]이다. 이 말을 정말 여호와가 했다면 재미있지만 여호와는 다신론자라는 이야기가 된다. 다른 신이 없다면, 즉, 유일신이라면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할 이유가 없다.
이런 모순 때문에 후세에는 신을 우상으로 번역한다. 즉 "나 이외에 다른 우상을 섬기지 말라"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도 모순이 존재한다. 이 말을 여호와가 했다면 여호와에 버금 가는 우상의 존재를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기 때문에 다시 "나 이외의 어떤 다른 존재도 신으로 섬기지 말라"는 해석이 또 나온다. 그런데 어떤 해석을 들이 댄다고 해도 결국 10계의 첫 구절은 여호와에 버금가는 다른 존재를 인정하는 것[4]이 된다.
유일신관, 정확히는 일신관은 기본적으로 다른 신을 인정해야만 나올 수 있는 신관이다. 또 이런 유일신관의 전제는 바로 계약이다. "여기 저기 신이 많이 있는데 그 중 내가 가장 좋은 신이니 나를 믿어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구원할 것"이라는 유대민족과 민족신인 여호와와의 계약인 셈이다. 계약장면은 여호수아 24장을 통해 쉽게 알 수있다.
(수 24:2)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수 24:x) 유대인에게 여호와가 행한 고난과 축복이 나온다.
(수 24:14)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수 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수 24:16)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
[출처: 여호수와 24장]
이슬람 신관
내 생각이지만 적어도 유일신관에서는 이슬람의 알라가 기독교의 여호와 보다는 진화된 형태를 갖는다. 일단 알라는 유일신이기 때문에 인간이 신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어떤 형상도 거부한다[5].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형태로 유일신을 표현하면 인간 인식세계로 제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슬람의 사원에는 인간의 상상을 자극하는 어떤 일체의 형상도 없다.
반면에 기독교 여호와는 형상부터 짐작이 가능하다. 여호와의 아들이라는 예수로부터 그 아버지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여호와는 인간과 같은 형상을 가지고 있다. 또 여호와는 "자신의 형상을 빌어 인간을 만들었다"고 한다. 따라서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비약하면 뛰어난 초능력을 지닌 인간을 여호와로 상상할 수 있다. 이 부분은 우리나라도 비슷하다. 환인의 아들이 환웅이고, 환웅의 아들이 단군이며, 그 단군의 후예가 우리이기 때문이다.
이슬람 6신
이슬람에 대한 자료를 찾다 보니 재미있는 내용이 나온다. 바로 6신 5행이다. 6신은 이슬람의 6개의 믿음을 말한다. 알라, 천사, 꾸란, 예언자, 부활, 정명의 6가지로 이만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 6신에는 이슬람이 가진 유일신의 의미와 이슬람이 가지고 있는 진화된 종교관이 그대로 등장한다. 배타적일 것으로 생각했던 이슬람은 배타성이 없는 평등한 종교였다. 평등하기 때문에 신과 인간만 존재하며 신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이런 이유로 이슬람에서는 따로 사제 계급을 두지 않는다. 이맘이라는 인도자가 있지만 이맘은 누구나 될 수 있는 존재다.
이슬람의 6신 중 경전을 다룬 3조와 예언자를 다룬 4조에는 다른 민족의 경전을 인정하며, 모든 예언자를 존중한다. 각민족의 경전은 알라의 말을 각 민족이 적은 기록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이 말을 전한 예언자 모두를 존중한다. 이 부분은 내게도 큰 충격이었다. 기독교, 유대교와 태생이 같지만 이슬람에는 유대교나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배타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독특한 유일신관
아이러니 같지만 다른 신을 인정하기 때문에 기독교 유일신관의 모순을 벗어난 진화된 유일신관을 펼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 그림은 이슬람 6신과 꾸란의 내용을 도식화 한 것이다.
그림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신은 하나다. 그 하나의 신을 유대교는 여호와라고 부르고, 한민족은 환인이라고 부른다. 또 아랍인은 알라라고 부른다. 나타난 현상은 다신이지만 그 본질은 알라신이다. 다른 나라의 신을 인정함으로서 다른 나라의 민족신을 하나로 만든 유일신관이 바로 이슬람 신관이다. 또 예수와 환웅, 무함마드와 같은 모든 민족 예언자를 존중한다. 이들은 무함마드처럼 알라의 말을 각 민족 언어로 전한 예언자이기 때문이다. 6신에는 환인과 천부경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개념을 확장하면 환인도 알라와 같은 신[6]이 된다.
꾸란과 다른 경전의 차이
이슬람은 알라가 예언자의 입을 통해 복음을 전하도록 했다고 믿는다. 이런한 믿음이 경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다윗이 전한 시편, 모세가 전한 토라(Torah, 구약), 예수가 전한 인질(Inzil, 신약), 무함마드가 전한 꾸란 모두 경전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무하마드 이전에 전한 경전들은 번역 과정에서 변질되었거나 정치적 또는 다른 목적으로 내용에 수정을 가했다고 생각한다.
또 이슬람은 유대인들이 신의 선택을 받은 민족으로 만들기 위해 구약(Torah)의 몇 구절을 바꾸었고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신으로 만들기 위해 복음서를 다시 썼다[7]고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꾸란만이 변질없는 순수한 알라(유일신)의 말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꾸란은 경전 중 알라의 말씀에 가장 가까운 경전으로 생각하는 것 뿐이다[출처: 6신(六信) : Iman]
이슬람 근본주의
이슬람은 앞에서 이야기했듯 배타성이 없는 상당히 평화적인 종교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체계에서 이슬람은 테러를 일삼는 아주 극단적인 종교다. 실제 종교의 모습과 인식체계의 차이를 만드는 근본적인 배경에는 바로 이슬람 근본주의가 있다. 이슬람에는 6신 5행이 있다. 6신은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슬람이 믿는 6개의 믿음을 말하며 5행은 이슬람이 꼭 해야 하는 다섯가지 의무을 말한다. 신앙고백, 기도, 자선, 단식, 메카 순례로 이바다라고 한다. 이 5행은 믿음과 실천이라는 이슬람 교리의 핵심이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이 5행에 하나를 더해 6신 6행을 믿는 집단을 말한다. 추가된 1행이 바로 성전(Jihad)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 볼 부분이있다. 이슬람 근본주의 등장 배경이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은 모두 한뿌리에서 시작한다. 아브라함의 본처가 이삭을 낳았고 이삭의 후예가 유대인이다. 또 아브라함의 몸좀이 이스마엘을 낳고 이스마엘의 후손이 바로 아랍인이다. 여기에 다시 유대교에서 기독교가 파생되고 이 기독교가 결국 한국의 종교[8]가 되었다.
"유대교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여호와와 이슬람에서 말하는 알라는 정확히 같은 존재"다. 그런데 서구의 역사를 보면 이른바 성전으로 불린 기독교의 끝없는 침공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런 성전은 여러가지 다른 가면을 뒤집어쓰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그 핵심을 들여다 보면 미국 상류층을 점령한 유대교와 그 하층부를 구성하는 기독교가 한편이 되어 이슬람을 침공한 형태다. 여호아와 알라는 같은 신이다. 그런데 그 신을 믿는 사람 중 기씨와 유씨가 같음을 인정하지 않고 여호와와 알라의 싸움을 붙인 형국이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기독교의 이러한 패권주의에 대한 반발로 등장했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이슬람 교도와 이슬람 교도 간의 대립을 초래하는 모든 외세의 이념을 악으로 규정, 이들과의 성전(Jihad)을 의무화한 것이다. 성전의 첫번째 대상으로 개종 이슬람 교도나 이슬람 신앙이 투철하지 않은 이슬람 교도를 꼽는다. 따라서 공격적인 선교를 일삼으며 개종을 강요하는 기독교와 서구 기독교의 정치제도에 따르는 모든 이슬람 국가의 정치 지도자가 성전의 대상이 된다[출처: 위키백과 이슬람 원리주의 발췌 요약].
이슬람 근본주의는 성전(Jihad)으로 '관용과 평화의 종교'라는 이슬람의 모든 가치를 무너트린다. 그런데 이슬람의 성전은 한국 개신교의 죽음을 각오한 선교와 너무 닮아 있다. 차이가 있다면 무력의 형태가 다르다 정도다. '이슬람 근본주의'의 무력이 '군사'라는 형태로 나타난다면 '한국 개신교'의 무력은 '자본'의 형태로 나타난다. 따라서 한국 개신교의 예수 장사와 목숨을 건 선교는 자본을 취하기 위한 '시장개척'이라는 필연성을 갖는다.
꾸란 한글판
한글로 번역된 꾸란을 읽어 보고 싶다면 아래 링크에서 PDF 파일을 받을 수 있다. 파하드 국왕 꾸란 출판청에서 나온 한글 꾸란으로 최영길 박사가 번역했다. 총 1426쪽에 달하지만 양은 많지 않다. 한글 번역문과 원문이 함께 실려 있고 종종 원문 해석을 돕는 해제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많아 보인다.
남은 이야기
- 종교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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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트위터(Twitter)에 이슬람에 대한 글을 여러 개 올렸다. 그러자 자신이 알고 있는 이슬람과 다른 정보라며 근거를 요구하는 분들이 있어서 이글을 쓰게됐다. 여기에 한가지 더 추가하고 싶은 것이 있다. 바로 진화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진화를 우월로 생각한다. 원시인 보다 현대인이 더 우월한 존재라는 생각이다. 기독교가 지배한 서구 유럽의 관점에서 진화가 우월일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를 벗어나면 진화가 우월을 의미하지 않는다.
유럽의 중세는 기독교가 지배했다. 기독교가 지배한 유럽은 세계사적으로 가장 암울한 시기였다. 봉건 영주와 그 일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노예와 비슷한 농노였다. 이런 시대는 니체가 신을 죽임으로서 개화를 맞이한다. 즉, 서구 유럽은 노예제로 대별되는 고대, 봉건제로 대별되는 중세 암흑기를 거처 근대로 넘어오게 된다. 기독교가 지배한 유럽에서 진화는 발전과 나은 삶을 의미했다.
그러나 기독교의 지배를 격지 않은 더 넓은 세상에서는 진화가 나은 삶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 옛날이 좋았는데. 요즘 것들은 싸기지가 없어."와 같은 우리의 언어 습관에도 이런 현상은 그대로 남아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살기 좋은 세상은 몇천년전 요순시절이다. 서구 유럽이나 기독교 세계관에서 진화가 우월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의 인식체계에서 진화는 우월과 연관성이 없다.
개신교는 카톨릭에서 나왔다.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개신교가 카톨릭보다 더 진화한 종교다. 개신교도 초기에는 이슬람처럼 신의 매개체를 거부하고 기독경만으로 신을 만나려 했다. 그렇다고 "더 진화한 개신교가 카톨릭 보다 우월한 종교다"라고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진화가 우월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는 진화의 정도차가 있다. 이슬람을 기독교 보다 더 진화한 종교로 보는 이유는 유일신을 모신 종교이지만 기독교가 가진 유일신관의 모순을 벗어낫기 때문이다. 이런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이슬람교가 가장 진화했고 개신교, 카톨릭, 유대교의 순이 된다. 그러나 이들 종교 중 어떤 종교가 더 우월하다고 할 수는 없다.
모두 종교란 거창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종교란 나에게 기쁨을 주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나는 내 아이들을 보면 기쁘다. 자는 모습을 봐도 기쁘고 웃는 모습을 봐도 기쁘다. 심지어 우는 모습을 봐도 기쁘다.
내 삶에 기쁨을 주는 것.
이것이 나는 종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슬람교, 기독교, 유대교 모두 내 종교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예수의 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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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형상을 보면 대부분 곱슬머리, 파란눈의 서양인이다. 기독교가 가진 모순은 상당히 많지만 예수의 모습 역시 이런 모순의 방증이라고 생각한다. 인류는 한 아프리카 흑인 여성으로 부터 비롯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신이 자신의 형상을 빌어 인간을 창조했다면, 에덴 동산에 살았다는 최초의 여성 아담은 흑인일 수 밖에 없다. 인간의 형상을 닮은 여호와 역시 흑인이며, 그 아들인 예수 역시 흑인이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의 모습 어디에도 흑인을 닮은 부분은 없다. 예수가 곱슬머리의 파란눈을 가진 서양인인 이유는 "예수는 신의 아들이 아닌 유대인 선지자였기 때문이다". 유대인 선지자의 모습에 서구 유럽의 이미지가 덧쒸워진 것이 오늘 날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의 모습인 셈이다.
- 이전에는 코란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원래 발음이 꾸르안이고 국내에서 꾸란이라는 이름을 자주 사용하기 때문에 꾸란으로 적는다. 참고로 꾸란은 '읽기'라는 뜻을 갖는다. ↩
- 이 말은 "나를 믿어라! 그러면 영생을 얻으리라!"라고 국내 개신교에서 왜곡하고 있는 예수의 말, "나를 따르라! 그러면 평안을 얻으리라!"와 완전히 일치한다. ↩
- 영어 번역에는 God과 Idol로 다르게 쓰고 있다. 그러나 히브리 원전에는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영어 번역에서 God과 Idol이라는 다른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정치적 목적의 계산된 오역일 뿐이다. ↩
- 이런 모순된 종교관이 가장 극단적으로 발현하는 곳이 바로 우리나라다. 그래서 우리나라 개신교도는 단군 동상 목을 자르고 장승 목을 자르는 일을 천연덕스럽게 하고 그것을 자랑스러워한다. 심지어 일국의 대통령까지 절이 무너지라고 기도하고 좋아한다. ↩
- 꾸란 42:11. 알라와 비유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 천부경은 신화 속에 등장하는 경전일 뿐 아직 실체가 증명된 경전은 아니다. 일부 단체에서 천부경이라고 주장하는 경전과 혼동하지 말기 바란다. ↩
- 신약을 성서문학으로 보는 이유는 복음에는 어떠한 일관성이 없고 여러 사람에 의해 편집된 흔적이 많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나중에 '도아복음'으로 답하도록 하겠다. ↩
- 기독교는 세계적으로 소수 종교로 전락하고 있다. 기독교의 성세가 이어지는 유일한 나라가 우리나라다. 물론 이런 성세가 계속될 걸로 보지는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