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을 사랑한 변희재 by 도아
진보를 사랑한 수구, 변희재
'변희재'가 활동한 매체는 대자보, 서프라이즈, 브레이크뉴스, 빅뉴스, '미디어워치' 등이다. 대자보는 진보를 지향하는 매체고 서프라이즈는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노무현 전대통령에 대한 지지성향이 강한매체다. 반면에 빅뉴스와 미디어워치는 보수성향이 강한 매체다. 여기에 최근 조중동은 변희재의 말과 글을 심심치않게 보도하고 있다.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가 미학의 길라잡이였다"는 변희재. <사진: 의도한 건 아지만 결국 '똥들의 사랑'이 됐다.>
상황극
어두운 사무실. 변희재, 그는 조용히 사무치게 사랑하는 진중권을 기다렸다[1].
'오늘은 꼭 보여 주고 말리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 꼭 보여 주고 말리라'
변희재는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토각 토각 토각'
멀리서 들리는 발소리. 그였다. 그리움이 넘치는 변희재는 그의 발소리 조차 구분할 수 있었다. 떨렸다. 마치 심장 한켠에 구멍이 난듯 맥박이 빨라지고 호흡이 가파졌다.
'덜컹'
문이 열렸다. 그였다. 단 둘이, 단 한번만이라도 단둘이 있기를 바랬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러면 닫힌 진중권의 "마음을 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서서히 일어난 변희재. 입고 있던 옷을 한올 한올 벗어 던졌다. 부모외에 남에게는 단 한번도 보여 주지 않은 자신의 나신을... 마지막으로 쫄사각만 남았다. 떨리는 손. 그때 들리는 한마디.
누구세요?
그리고 왜 옷을 벗고 계세요?
'변희재'가 원한 것은 '한윤형'이었다. 변희재는 정말 한윤형처럼 되고 싶었다. "책이 나왔다"고 진보신당 홈페이지에 한윤형의 책을 홍보하는 진중권. 변희재도 진중권에게 이렇게 인정받고 싶었다. 그러나 진중권은 변희재를 인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시했다. 상처받은 변희재. 흔히 변희재를 '진보에서 변절한 수구'로 본다. 그러나 나는 변희재를 진보를 사랑한 수구라고 생각한다.
살다 보면 이런 사람이 있다. 나한테 잘못한 것도 없고, 나한테 피해를 준 적도 없다. 아니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 보다 나에게는 오히려 더 살갑게 대한다. 그런데 그냥 그 사람이 싫다. 서로의 성향이 틀리기 때문이다. 진중권이 변희재를 무시한 것이 아니다. 서로의 성향이 틀리기 때문에 관심이 없었을 뿐.
진보를 사랑한 수구, 변희재
'변희재'가 활동한 매체는 대자보, 서프라이즈, 브레이크뉴스, 빅뉴스, '미디어워치'등이다. 대자보는 진보를 지향하는 매체고 서프라이즈는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노무현 전대통령에 대한 지지성향이 강한매체다. 반면에 빅뉴스와 미디어워치는 보수성향이 강한 매체다. 여기에 최근 조중동은 변희재의 말과 글을 심심치않게 보도하고 있다.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가 미학의 길라잡이였다는 변희재.
'변희재'가 빅뉴스에 2009년 1월 27일에 올린 "언론노출 장사꾼, 진중권은 늙은 강의석"(실력없이 불러불러주는 대로 방송출연하는 비즈니스맨)라는 글을 보면 '변희재의 진중권에 대한 애증'이 그대로 들어난다.
진중권은 나에 대해 듣보잡이라 불렀다. 쉽게 말하자면 자신이 나보다 더 유명하다는 것이고, 다르게 표현하면 언론 노출도가 높았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386의 대표적인 좌파 지식인의 수준이다. 누가 누가 언론에 많이 나왔냐 가지고 서열 가르고 계급 가르겠다는 이 발상, 수구세력들도 하지 않는 짓이다. 언론 노출도로 계급을 갈라버리는 정신상태이니, 학력과 학벌로 사람 차별하는 거야 오죽 하겠는가?
사실 좌파 386세대들 중에서도 언론노출도를 갖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진중권만의 독특한 행태이다. 왜 그럴까? 진중권 스스로 학벌과 전문성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서울대 출신이기는 하지만 미학 분야에서 그다지 뛰어나지도 않은 독일의 자유베를린 대학에서조차 박사 학위 취득에 실패했다. 미학분야에서 독일이나 유럽권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은 넘쳐난다. 진중권은 이 부분에서 처절하게 실패했기 때문에 학력 가지고 말빨 세우기 어렵다는 것이다. 빅뉴스
까가 된 빠, 변희재
진중권은 삼인 출판사의 {자유주의라는 화두}라는 책에서 강준만 교수를 비판한 적이 있었다. 그가 진보적 지식인을 비판할 때 잣대가 공정하지 않다라는 것이었다. 거기에 대해서는 강준만 교수가 반론하기 앞서 내가 먼저 반박을 했었는데 그는 내 비판에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글 자체가 너무 정치적이었어요. 저의 텍스트를 하나도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고 정치적이고 선정적인 표현을 썼길래 이것은 토론하자고 쓴 글 아닌 것 같았어요[2]. 특히 복제인간 부분은 너무 심했어요. 저는 학생운동권 쪽에서 쓴 글인 줄 알아서 반론을 했는데, 아닌 줄 알았으면 아마 그냥 놔뒀을 거에요. 저는 아직도 학생운동권에 대해서는 애정과 애증을 함께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 문제는 이렇다. 나는 올 초에 대자보를 통해 처음으로 공적매체에다 글을 쓰기 시작했고 PC통신에다 자유롭게 글을 쓰는 습관이 몸에 배어있었다. 그러니 내 글을 진중권이 직접 본다는 것은 예상하지도 못했다. 진중권이 반론을 하고나서야, "아, 진중권이 볼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텍스트 문제는 그렇다 치더라도 복제인간 운운하는 표현은 지나쳤다. 진중권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나는 그 글을 인물과 사상 6월호에 실은 것이 더 큰 잘못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때는 어차피 진중권도 봤고 대자보라는 너무나 작은 매체에 실린 글인데 뭐 어떨까 했지만 지금와서 생각하면 그 글은 인물과 사상에 실어서는 안 되는 글이었던 것 같다. 대자보라는 매체에서 시작했으면 대자보라는 매체에서 끝냈어야 했다. [출처: 상식적인 좌파, 진중권]
'까'는 처음부터 '까'가 아니다. 물론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성향 때문에 처음부터 싫어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노까'나 '진까' 중 상당수는 '노빠'나 '진빠'에서 출발한다. 변희재처럼. 이런 '빠'는 무조건 대상을 동경한다. 그리고 그 대상이 자신을 알아 주지 않으면 상처를 받는다. 그 상처가 깊어지면 누구 보다 심한 '까'[3]가 된다. 마치 자신이 빠로 지낸 모든 세월을 보상 받으려는 듯 '훨씬 심한 까'[4]가 된다.
지지와 추종
내가 항상 하는 이야기 중 하나는 '지지자가 되어야지 추종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지지와 추종을 구분하지 못하면 "'빠'가 '까'가 된다". "멀정한 사람을 '까'로 만든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빠'를 '까'로 만든다".
2007년 대선 때 이야기이다. MBC 백분토론에 문국현 후보가 나왔을 때이다. 패널로 나온 권영준 교수님이 문국현 후보의 답변을 답답해 하며 몰아 부친적이 있다. 이 백분토론이 끝난 뒤 블로그스피어는 '권영준 교수님의 성토장'으로 변했다. 이때 권영준 교수님께 수업을 들었던 제자 한 분이 '권영준 교수님에 대한 교수 지질론을 거론하지 말라.'는 글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
결과는?
문빠의 융단폭격이 시작됐다. 그리고 미칠듯한 인기, 감사합니다. 몸둘바를 모르겠네, 젠장., 권영준 교수의 교수 자질 논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부모욕까지 할 이야기인가., 블로거뉴스는 블로고 스피어의 매력을 잃어가고 있다., 당신의 정치적 성향은 '중도' 기능을 지원하는 버전입니까?라는 네 개의 글을 추가로 쓰고 블로그를 접었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추종자(빠)는 다르면 틀린 것으로 여긴다.
나 역시 당시 문국현 후보의 지지자였다. 그러나 난 "권영준 교수님이 문국현 후보만 유독 심하게 대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토론 중 의사 전달에 문제가 있었고 이로인해 후보자와 패널의 감정이 격해져서 발생한 문제였다. 그러나 인터넷에는 '권영준 교수님을 비난하는 문빠의 글로 도배'가 됐다. 그리고 어쩌면 문국현 후보의 지지자로 끌어들일 수 있는 한 사람을 '문까'로 만들었다.
지금은 글이 사라져 확인할 수 없지만 나 역시 "권영준 교수에 대한 교수 지질론을 거론하지 말라."는 글에 다음과 같은 취지의 글을 달았다.
권영준 교수님의 토론 태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의사 전달이 원활하지 않아 발생한 문제다. 나 역시 문국현 후보를 지지하지만 문국현 후보가 동문서답하는 것은 종종봤다. 보호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잘못된 것은 바로 잡고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지지자의 몫이다.
그리고 이 글에 비밀글로 또 다른 댓글이 다시 달렸다. 이 비밀글은 "내게 전하는 글 같다"며 그 분이 댓글의 내용을 알려 주었다. 정확히 기억하지 않지만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문함대의 힘이 느껴집니다. 멋집니다.
멋진 이유는 간단하다. '추종자가 아닌 지지자를 봤기 때문'이다. 추종자는 지지자 마저 도망가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빠'와 '까'는 모두 똑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서로 달리는 방향만 다르다. 그래서 조금 달리다 보면 서로 머리를 부딪히며 쓰러진다. 이것이 '빠'와 '까'의 운명이다.
남은 이야기
태터앤미디어에서는 대선후보 간담회를 진행했다. 문국현 후보의 지지자였기 때문에 나 역시 문국현 후보 간담회에 패널로 참석했다. 당시 내 질문은 "경제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에 관련된 정책은 무엇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여기에 대한 문국현 후보의 답변은 "왜 나쁜 정치인을 따르냐"는 것이었다. 완전한 동문서답이었다. 그런데 문국현 후보를 비롯한 CEO 출신의 정치인은 이런 동문서답[5]을 자주한다. 토씨 하나가 같는 미세한 차이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