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의 탈을 쓴 토착왜구

우리나라는 토착왜구가 보수의 탈을 쓰고 있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보수'인 나도 좌파, 진보로 불린다. 그러나 난 정확히 보수다. <그림 출처: 고군 트위터>

나는 보수

내 이전 글에 있듯이 나는 정확히 보수다. 나를 진보 또는 좌파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나는 지킬 것은 지키고 버릴 것은 버린다는 보수의 가치[1]를 좋아한다. 여기서 버릴 것과 지킬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무조건 내 기득권을 지키려고 하는 수구[2]와 보수는 구분해 주어야 한다.

내 어머님이 항상 후회하시는 일이 하나 있다. 누나가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테니스 동아리에 들었다. 테니스 동아리니 당연히 테니스채가 필요하다. 지금은 테니스라고 하면 개도 소도 안하는 운동이지만 당시는 지금의 골프[3]처럼 고급 운동[4]이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부자집 딸은 다 테니스를 했다.

당연히 우리집 능력으로는 테니스채가 부담이 됐다. 그래서 어머님은 테니스채가 비싸다는 이유로 테니스채를 사주지 않으셨다. 그리고 누나는 대신에 민족문화연구 동아리에 가입했다. 지금은 별것 아니지만 독재의 사슬이 시퍼런 당시에는 이름부터 위험한 동아리였다. 또 이름에서 알 수 있지만 학교에서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동아리였다.

이후의 이야기는 하지 않아도 뻔할 것 같다. 소위 말하는 운동권이었고 회장이 구속된 상태에서 시위[5]를 주도하다 결국 시국사범으로 체포됐다. 그러나 이때는 소위 '족보'가 누설되지 않아 누나는 쉽게 풀려났다. 그러나 이때부터 형사가 따라 붙었다. "옷을 사준다", "구두를 사준다"등등 갖가지 회유책이 있었지만 그것을 거부한 누나는 6.10 평화대행진이 시작되기 얼마 전 구속됐다.

"그때 테니스채만 사줬어도"

어머님께 항상 하시는 이야기였다. 테니스채를 사주었다면 "테니스 동아리에서 다른 여대생처럼 놀러 다니며 인생을 살지 않았을까"하는 후회셨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 집안의 영향, 특히 누나의 영향을 많아 받아 내가 "진보 또는 좌파적 성향을 가진 것" 같지만 '아니다'. 나는 그 당시도 보수였고 지금도 보수다. 누나도 운동권이고 매형도 운동권이지만 항상 나와는 의견이 달랐다. 내가 한 주장은 학생운동의 대중성이었다.

운동권에서는 탄압받는 소외 계층과 반독재 투쟁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계층을 멀리서 찾을 이유도 없다. 바로 내 부모님이 이 계층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대학교까지 보내는 것이 내 부모의 유일한 소망이었다.

이런 사정을 뻔히 알면서 "부모조차 설득하지 못하는 학생운동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 내 주장이었다. 물론 부모님은 학생운동에 공감하지만 자식에게 피해가 오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지적한 부분은 이 부분이 아니다. 만약 학생운동이 정말 옳다면 학생운동과 부모님의 지지를 함께 끌어낼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설사 방법이 없다고 해도 노력은 해야 한다는 것이 내 주장이었다.

지금은 이런 제도가 사라졌지만 당시에는 학사경고 두번이면 퇴학을 당했다. 이 제도는 운동권 학생을 제재하는 수단으로 만들어진 제도다. 이런 제도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학생운동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적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생운동과 학업을 함께 하는 것은 힘들다. 단순히 생각해도 두가지를 동시에 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끼리 모여 술마시고 성토할 시간만이라도 학업에 쏟으라고 했다. 그래야 학사경고라는 덫에 벗어날 수 있고 최소한 부모님의 공감이라도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학교 교수님들께도 자신들이 하는 학생운동의 당위성을 말하기 더 쉽기 때문이다. 자신의 본분은 지키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한다는 것의 허구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운동권 중 잠자는 시간, 술마시는 시간을 쪼개 학업에 할당하는 사람은 거의 찾을 수 없었다. 시위의 세대라는 386 세대이지만 데모를 한적은 별로 없다. 그리고 세월은 그 이름 만큼이나 쉽게 흘렀다. 그러나 학창시절 내 주장을 불혹을 넘긴 지금도 그대로 한다.

나는 진보

그런데 이런 내 보수적인 관점을 이제는 많은 사람들은 진보적이라고 생각한다. 보수적 관점을 유지했던 나와 진보적 관점을 견지했던 누나와 비교하면 현재 내 관점이 훨씬 진보적이다. 나는 바뀐 것이 없다. "지킬 것은 지키고 버릴 것은 버린다"는 보수의 가치를 지금도 추구하고 있다. 따라서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 또 지켜야 할 것 역시 늘지 않았다.

가족과 나, 그리고 사회.

반면에 당시 학생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바뀌었다. 특히 이들 역시 이제는 "지킬 것이 많아졌다". 나는 386세대의 몰락이 학생운동에 열중하던 그 시절부터 이미 시작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419세대라는 이명박이나 386세대라는 80년 학생운동권이나 공통점이 하나 있다. "지킬 것이 너무 많아졌다". 이승만 독재와 싸운 419세대가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독재의 길을 걸었듯,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권과 싸운 386세대는 자신의 것을 지키기위해 가장 먼저 썩었다.

과거의 진보는 진보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수구에 더 가깝다.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떨어져도 민주당의 지지율이 답보 상태인 이유도 간단하다. 민주당의 성격 역시 진보도 보수도 아닌 수구에 가깝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이것이 사회이기도 하다.

두개의 대립되는 개념이 싸우다 결국 하나가 되고, 또 다시 대립되는 개념이 발생해서 다시 싸우고 합쳐지는 것이 세상이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불교의 사상이나 변증법이 아직도 타당한 이유는 과거의 진보가 보수가 되고, 어느 덧 수구가 되는 것을 이미 역사는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련 글타래


  1. 지킨다는 관점에서 보면 보수와 수구는 같은 말이다. "무조건 지키는 것"을 '수구'라고 한다면 "버릴 것은 버리는 것"이 보수다. 아울러 우리나라에서 보수와 수구는 서로 다른 뜻으로 쓰인다. 
  2. 그래서 한나라당을 보수라고 부르지 않는다. 한나라당은 수구도 아니다. 매국독재 잔당일 뿐이다. 
  3. 우리나라에나 골프가 고급운동이지 외국에서는 상당히 대중적인 운동이다. 
  4. 아마 이 당시 골프를 치는 사람은 극소수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5. 엔싸이버 백과사전에 기록되어 있을 만큼 큰 사건이었다. 전국 26개 대학 2000명이 '애학투' 결성식을 갖고 발대식을 벌이던 중 교내로 진입한 경찰에 의해 총 1525명이 연행되고 1289명이 구속된 사건이다. 아울러 이 사건은 발대식이 있기 며칠 전부터 야간에 경찰이 시위진압 훈련을 한 정황도 있다. 또 이 사건을 덮기 위해 금강산댐이라는 희대의 사기극이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