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리더

이런 복장으로 학교에 다녔다. 다른 점은 신발이 운동화가 아니라 슬리퍼나 고무신이었다는 점. 다만 복장이 이렇다 보니 아직 전근대적인 학풍이 그대로 남아있던 당시 사회에서 용납이 될리가 없었다. 그래서 항상 지적당하는 것이 복장이었다. 당시 국어 시험 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답을 다 쓰고 나가는데 조교가 부른다.

패션 리더

요즘 입고 다니는 복장을 보면 '패션을 선도한다'는 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그러나 나도 한때 패션을 선도한 패션 리더였다. 무슨 말인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이다.

나는 이른바 두발, 교복 자유화 세대다. 고등학교 1학년까지는 교복(승복)을 입었고 2학년 때부터 두발, 교복이 자유화됐다. 당시 서슬 퍼런 전두환 정권이었지만 이런 독재의 틈바구니에서 조금씩 던져준 자유라는 미끼를 먹은 첫 세대였다.

대학교에 입학할 때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기지 바지에 대학생 가방으로 불린 황토색 가방을 들고 다녔다. 나도 이 가방이 있었다. 아마 대학교에 입학한 기념으로 누군가 사주신 것 같다. 그러나 이 가방을 들고 다니지 않았다. 들고 다닌 가방은 등산용 배낭이었다.

지금은 등에 배낭형 쌕을 메고 다니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당시에는 전국적으로 따져도 배낭을 메고 다니는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 쌕으로 표현하지 않고 배낭으로 표현하는 이유는 당시에는 요즘 학생들이 메고 다니는 배낭형 쌕이 없었다. 그래서 어머님께서 등산하실 때 가지고 다니시던 배낭을 책가방으로 사용했다.

완전한 등산용 배낭이 아니라 가벼운 산행용 배낭이고 그래서 인지 몰라도 이 배낭에는 병따개가 달려있었다. 술을 좋아하기 때문에 술에 대한 사연이 많은데 배낭에 병따개가 달려 있으니 금상첨화였다.

요즘은 술을 마신다고 하면 대부분은 술집으로 간다. 그것도 소주잔을 기울일 수 있는 선술집이 아니라 맥주나 양주집. 그러나 당시에는 선술집에 갈 돈도 없었다. 따라서 술은 대부분 학교 원형잔디나 교문 옆 잔디 밭에서 마시곤 했다. 가방에 병따개가 있으니 항상 술마실 준비가 되어 있는 셈이었다.

이 배낭을 꿰매가면서 1학년 때부터 4학년 때까지 메고 다녔다. 재미있는 것은 내가 졸업할 때 쯤에는 배낭 또는 배낭처럼 생긴 쌕을 메고 다니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점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배낭을 가방으로 사용한 것은 내가 처음이 아닌가 한다.

들고다니는 가방보다 배낭을 좋아한 것은 배낭이 편하기 때문이다. 일단 가방을 들고 다니면 두 손중 한손은 사용할 수없다. 반면에 배낭은 메면 두손 모두 사용할 수 있다. 한손과 두손. 두손이 얼마나 편한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추리닝에 슬리퍼

따라서 옷도 편한대로 입었다. 그래서 주로 추리닝을 입고 다녔다. 추리닝을 입은채로 자고 추리닝을 입은채로 학교에 간다. 신발은 슬리퍼가 아니면 고무신이었다. 두 신발의 공통점은 양말이 필요없다는 점. 이런 모습이 쉬 상상이 되지 않는다면 김치, 치즈, 스마일의 엄기준 아나운서가 고시에 떨어졌을 때 복장을 상상해 보면 된다.

이런 복장으로 학교에 다녔다. 다른 점은 신발이 운동화가 아니라 슬리퍼나 고무신이었다는 점.

복장이 이렇다 보니 아직 전근대적인 학풍이 그대로 남아있던 당시 사회에서 용납이 될리가 없었다. 그래서 항상 지적당하는 것이 복장이었다. 당시 국어 시험 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답을 다 쓰고 나가는데 조교가 부른다.

조교: 도아, 이리와봐?
도아: 왜요?

조교: 너, 학생이 이게 뭐야! 추리닝에 슬리퍼?
도아: 학생이 이니까 이러죠, 교수가 이래요?

조교: 뭐? 그래! 두고 보자. (학번을 외운다)

그리고 국어 점수는 B가 나왔다. 고등학교 때부터 적어도 국어는 90점 이하로 내려가 본적이 없고 학력고사에서도 국어는 한자에서만 틀렸기 때문에 조금 의외였다. 그러나 어차피 전공 과목이 아니었기 때문에 큰 신경은 쓰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전공 교수님이 시험 감독을 들어오면 조금 불안했다. 과목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교양 과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보통 공부를 하지 않아도 컨닝은 하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유일하게 컨닝을 하는 과목이 두 과목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영어고 또 하나는 기독교 과목이다.

컨닝의 원칙

이 두 과목을 컨닝하는 이유는 F를 맞으면 다시 들어야 하고 다시 들어도 F를 맞을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차피 전공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많았다. 아마 기독교 개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교생이 이 과목을 들어야 하기 때문에 이 과목의 감독은 보통 전공 교수님이 들어오신다. 이날 감독을 들어오신 교수님은 전자과 교수님 중에서 가장 까탈스러운 교수님으로 소문난 양모 교수님.

컨닝의 제 1원칙 - 등잔 밑이 어둡다.

보통 컨닝을 하는 사람들은 교수님이 멀리 있을 때 컨닝을 시도한다. 그러나 나는 교수님이 지나가면 바로 컨닝을 한다. 이 것이 멀리 있어 교수님이 보이지 않을 때 컨닝하는 것 보다 훨씬 안전하기 때문이다. 컨닝 페이퍼를 보고 시험지에 답을 적고 있는데 그때 들리는 소리.

교수: 자네!!!
도아: (윽, 걸렸다. 증거인멸을 해, 말어?)

교수: 집이 어딘지 모르겠지만 추리닝에 슬리퍼가 뭐야?
도아: 죄송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페이퍼가 들통난 것이 아니라 복장을 문제 삼은 것이었다. 증거 인멸을 하기위해 페이퍼를 입으로 가져가다가 바로 내려놓고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바로 "주의하겠다"고 대답한 것이.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부터. 당시 나는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는 볼펜이나 만년필을 사용하지 않았다. 글을 쓰면 꼭 붓글씨처럼 써지는 후리펜이라는 펜을 사용했다. 이 펜으로 필기도 하고 시험도 봤다. 그런데 전공 교수님은 내가 사용하는 후리펜이 못내 신기한 모양이었다.

교수: 글씨가 참 예쁘네. 꼭 붓글씨 같은데.
도아: 예. 후리펜이라고 붓글씨처럼 써지는 펜입니다.
교수: 그래. 잠깐 줘바.
교수: (그리고 종이에 써본다)

교수: 나는 잘 안써지는데.
도아: 예. 쓰다보면 펜이 갈라지기 때문에 갈라진 곳을 알고 써야 붓글씨처럼 써집니다.
교수: 그래(그러면서 계속 구경한다)

요즘도 파는지 알고 싶어서 찾아보니 요즘도 팔고 있었다. 가격은 1200원. [그림출처]

목적이 컨닝이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된덕에 페이퍼는 사용하지도 못하고 시험을 봤다. 그리고 교수님은 내가 쓴 답안지의 글씨가 못내 신기한 듯 시험지를 걷둬 가면서 보고 있었다. 물론 수업이 끝나고 동기들의 "고맙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리고 나온 점수는 60점. 원래 출석다하고, 레포트 제출을 다하고 시험을 다 보면 나오는 최소 점수다. 그러나 다시는 듣기 싫은 기독교 개론을 통과했기 때문에 큰 신경을 쓰지 안았다.

이미 퍼진 명성

술을 좋아하기 때문에 술에 얽힌 이야기도 많다. 그러나 워낙 복장을 신경쓰지 않고 살다 보니 복장에 얽힌 이야기도 이에 못지 않다. 이렇게 대학 4년을 보냈다. 그덕에 당시 나를 모르면 간첩이라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아마 대학교 4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상도 시장에는 순대집이 상당히 많았고 돈이없는 학생이라 여기서 술을 자주 마셨다.

고등학교 동문 선배가 전산과를 다녔고 이 선배와 함께 술을 마실 때였다. 건너편 자리에 있던 전산과 학생들이 인사를 왔고 선배가 상대를 소개시켜줬다.

도아: 안녕하세요. 도아라고 합니다.
학생: 알고 있습니다.

도아: 잉, 어떻게요?
학생: 추리닝에 슬리퍼신고 배낭메고 다니죠?

요즘도 추리닝에 슬리퍼 신고 배낭메고 학교에 다니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양아치 페션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또 이렇게 하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눈쌀이 찌프려진다. 세상은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과는 아주 많이 변했다. 그리고 나이를 먹었다. 그런데 이런 복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전근대적인 사고가 지배하던 시절, 나이드신 분들이 나를 어떻게 봤을 지 짐작이 된다.

돌발퀴즈

Q: 깡패와 양아치의 차이는?
H: 모래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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