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백골단

나타나면 모두 벌벌 떤 다는 공포의 백골단. 80년대만 해도 이런 백골단과 학생들의 쫓고 쫓기는 장면은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파란색 청자켓에 청바지를 입고 공사장 쇠 파이프를 들고 달려가는 백골단은 사실 공포 그 자체였다. 또 잡히면 실제 초죽음이 됐다. 이런 백골단을 이명박 정부가 되살린다고 한다. 잃어버린 10년을 말하며 역사의 시계추를 30년전으로 되돌리는 이명박 정부. 이것을 추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백골단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공포의 백골단

청바지에 청자켓을 입은 공포의 백골단

당시에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그러나 잡히면 죽는다. [그림출처]

지금은 예전 만큼 시위가 심하지는 않다. 그러나 내가 대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거의 매일 시위가 있었다. 대학 3학년 때는 학기초 중간 고사를 한번 보고 나머지는 모두 리포트로 대치됐다. 수업 거부와 시위 때문에 수업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대학생 중 시위를 하지 않은 학생이 없다고 할 정도로 시위는 일반화되어 있었다.

극렬한 시위 현장에는 꼭 나타나는 것이 있다. 바로 백골단이다. 나타나면 모두 모두 벌벌 떠는 마징가Z처럼 시위 현장에 나타나면 모두 벌벌 떠는 것이 바로 백골단이다. 청바지에 청자켓을 입고 검은색 테잎을 감은 쇠파이프를 들고 서있는 백골단의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다.

나타나면 모두 모두 벌벌 떠는 마징가Z

마징가 Z를 보고 떨지 않는 사람도 백골단을 보면 떤다. [그림출처]

알렉산더 대왕, 한니발, 스키피오 모두 고대 명장들이다. 이 고대 명장들의 전술은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기동대(기마대)를 이용해서 적의 후면과 측면을 공략하는 전술이라는 점이다. 이런 전술은 지금도 아주 유효적절하게 사용된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 작전도 보급로를 끊고 후미를 공략하는 전술이었다.

백골단 전술도 똑 같았다. 일단 시위 현장 뒷편으로 봉고차가 여러 대 이동하면서 10m 간격으로 백골단을 내려놓는다. 배치되는 인원은 시위하는 사람들의 수에 따라 결정된다. 이렇게 도로에 올라선 백골단은 우렁찬 기압을 지르며 시위대의 뒷편으로 몰아 닥친다. 앞에서 전경이 쏘아되는 최루탄을 피하던 시위대는 도망갈 퇴로를 차단 당하면 당연히 우왕 좌왕하다 흩어진다. 이 흩어진 시위대를 붙잡아 죽지 않을 정도로 때린 뒤 닭장차에 태우는 임무가 바로 이 백골단의 임무였다.

남자, 그냥 두들겨 팬다. 남자는 어디가 부러저도 되기 때문에 살려달라고 빌어도, 발을 붙잡고 애원을 해도 그냥 팬다. 입에 거품을 물 정도가 되면 머리채를 잡아 질질 끌고 간다. 여자, 똑 같다. 백골단은 남녀의 구분을 안 한다. 걸리면 똑 같이 잎에 거품을 물어야 한다. 노인, 똑 같다. 백골단은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는다. 백골단이라는 명칭은 초기 이들이 걸친 옷에서 나왔지만 사람을 뼈도 못추릴 정도로 두들겨 패기 때문에 나온 명칭이기도 하다.

닭장차

사람들을 닭 새끼 몰아 넣듯 몰어 넣고 싣고 다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그림출처]

소설쓰는 형사

종로와 같은 가투에서는 닭장차에 태우지만 학교에서 시위를 하다 붙잡히면 조금 다르다. 당시 학교 근처에는 경찰들이 아지트로 사용하는 공간이 따로 있었다. 항상 같은 공간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한번 경찰의 아지트로 사용된 집은 학생들이 다시는 가지 않기 때문에 빈 가게를 주로 아지트로 이용한다.

붙잡은 학생은 일단 이 아지트에 가둔다. 아지트에 들어가면 첫번째로 당하는 일이 최루탄을 쏘다 돌을 맞아 열이 받은 정경들의 집단 구타이다. 경찰 간부는 이런 모습을 보고 희희낙낙하며 웃는다. 그 이유는 이런 일이 일상이기 때문이다. 전경의 분풀이가 어느 정도 끌나면 그 다음은 바지와 신을 벗긴다. 바지와 신을 벗기는 이유는 도망가지 못하도록 조치한 것이다. 그리고 이 아지트에서 기다리는 동안 시시때때로 들어닥치는 전경의 분풀이를 당해야 한다.

일단 이렇게 붙잡히면 경찰서로 이송된다. 닭장차가 있으면 닭장차로 이송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경찰차를 타고 이동한다. 보통 승용차에 5명 정도가 타지만 시위대를 이송하는 경찰차에는 뒷자리에 다섯명, 앞자리에 세명이 탄다. 뒷 자리 가운데에 세명의 시위대를 끼워 태우고 양 문쪽에는 백골단이 탄다. 이송 중 문을 열고 도망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앞자리 운전석은 경찰이 타고 또 한명의 시위대를 가운데에 태우고 문쪽에는 또 백골단이 탄다. 역시 같은 이유이다. 이송할 사람이 많은 경우도 똑 같다. 가운데에 끼어타는 시위대의 숫자만 늘뿐 경찰과 백골단의 배치는 똑 같다.

경차서에 가면 조서를 받는다. 보통 조서라고 하면 피의자가 의자에 앉고 앞자리에 경찰이 앉아 피의 사실을 물어 보며 타이핑을 친다. 그러나 시위하다 붙잡힌 학생은 인간이 아니다. 따라서 인간처럼 의자에 앉아 심문을 받지 못한다.

일단 무릅을 꿇고 손을 들고 앉아 있는다. 그러면 형사가 구둣발로 허벅지를 마구 잡이로 걷어 찬다. 맞아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렇게 맞으면 일어 서지 못한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따귀를 때리고 주먹으로 머리통을 갈긴다. 이렇게 한 10분 두들겨 맞는다. 그리고 조서 작성이 시작된다.

형사: 너 시위 며칠이나 했어?
시위대1: 오늘이 처음인데요?
형사: 이새끼가 정신을 못차렸구만!!!

그리고 또 한 십분을 두들겨 팬다.

형사: 너도 쉬어야 되고 나도 바쁘니 우리 빨리 끝내자.
형사: 일주일, 일주일 어때? 일주일로 하자.
시위대1: (두려운 눈초리로) 정말 오늘이 처음이예요?

또 한 십분 두들겨 팬다.

형사: 좋아. 내 인심썼다. 그러면 3일, 3일 어때?
시위대1: 예.

형사: 돌은 몇개 던졌어?
시위대1: (역시 두려운 눈초리로) 오늘이 처음이라...

형사: 이새끼 안되겠군만. 인간적으로 대해 주니...
형사: 야!, 전경, 이새끼 교육 시켜와

백골단은 시위대를 잡을 때는 쇠파이프로 무자비하게 패지만 교육을 할 때는 이렇게 패지 않는다. 상처가 나면 문제가 되기 때문에 서너명이 급소만을 골라 죽도록 팬다. 살려 달라고 애원을 해도 패고 다불겠다고 애원을 해도 팬다. 다른 방법은 없다.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랄뿐. 일단 교육을 받고 나면 사정이 완전히 달라진다.

형사: 돌 몇개 던졌어?
시위대1: 10개요.

형사: 이 새끼가,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네. 전경!!!
시위대1: 아니, (손으로 빌며) 50개요.

형사: 그래, 그러지 말고 백개로 하자. 백개 좋지?

조서가 아니라 소설이다. 자신이 쓰는 소설대로 쓰지 않으면 무조건 맞는다. 그래도 자백하지 않으면 백골단에 넘겨 죽도록 맞게 한다. 이렇게 맞고 나면 경찰이 원하는 그대로 진술하고 지장을 찍게 된다.

백골단과의 인연

학창 시절 시위를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각종 모임에 참석하고 시위도 했다. 당시 "학생 치고 시위하지 않은 학생이 없다"는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상황은 학생이 시위하지 않고는 배겨낼 방법이 없었다.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박종철 열사, 연세대에서 시위 도중 경찰의 최루탄을 맞고 숨진 이한열 열사. 작은 땅덩어리에 일제 시대도 아닌데 열사는 정말 차고 넘쳤다.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박종철 열사, 경찰의 최루탄을 맞고 숨진 이한열 열사

그런데 문제는 요즘도 이런 아쉬운 죽음이 많다.

나 역시 화염병도 던저 봤고 반대로 최루탄에도 맞아 봤다. 학교 과학관 근처에서 전경과 대치하고 있을 때였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시위에 참석하고 있었다. 보통은 교문 앞에서 기독교 박물관 쪽으로 치고 들어오면 학생들은 공학관 쪽으로 도망을 간다. 학생들이 돌을 던지며 나오면 전경은 다시 교문 쪽으로 후퇴한다. 이 상태가 계속된다.

당시 과학관은 신축 공사중이었고 기독교 박물관도 상당히 오래된 건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현대식 건물로 바뀐 듯하다.

그런데 백골단이 위험을 무릅쓰고 공사 중이던 과학관 뒤를 돌아 시위대의 뒤를 친 것이다. 당황한 학생들은 분산했고 기독교 박물관 옆에 숨어서 화염병을 던지던 학생들과 나는 전경과 백골단에 그대로 포위되었다. 기독교 박물관 뒷편을 타고 과학관으로 도망을 하려고 했지만 화염병을 들고 당황하던 학생의 화염병을 뺏아 숨기느라 도망갈 기회를 놓쳤다.

길거리였다면 죽도록 맞았겠지만 학생들이 보고있고 백골단의 입장에서는 적진 깊숙히 침투한 상황이라 팔을 꺽고 교문으로 끌고 갔다. 끌려 나오는 나를 본 전경(열이 받을 대로 받은)이 방패를 새로로 세워 가격했다. 그 덕에 안경이 박살나서 떨어졌다. 먼저 학교 근처의 아지트로 이동해서 신발과 옷을 벗고 경찰차를 타고 경찰서로 이동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나를 심문한 대공계 형사분은 그나마 인간적인 분이었다. 일단 내의 주변에 전경이 오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 조서를 작성했다. 조서는 바로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진술서를 쓰게한다. 보통은 이 진술서를 수도 없이 작성한다. 그 이유는 그날 하루에 있었던 일을 쓰면서 거짓말로 여러 번 쓰다보면 진술서 마다 달라지고 이 달라진 부분으로 심문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진술서를 쓰면서 시간 배치를 고려했다. 10분단위, 20단위처럼 끊어서 쓰면 형사가 바로 눈치챈다. 그래서 사용한 것이 간단한 군수열이었다. 적당한 군수열을 생각해 내고 군수열에 따라 시간을 배치한 뒤 배치한 시간에 따라 오늘 한 일을 적었다. 진술서를 읽던 형사분이.

형사: 김재박이 누구야, 이 새끼도 같이 데모했어?

진술서의 내용 중 도서관에서 친구와 "김재박의 노화가 너무 빨랐다"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고 썼는데 당시 그 유명한 프로야구 선수인 김재박도 모르는 듯했다.

도아: 프로야구 선수인데요.
형사: 프로야구는 또 뭐야?

도아: 보통 고등학생들이 하는 야구는 아마 야구라고 하고요.
도아: 청룡기와 같은 대회를 통해 시합을 합니다.
형사: 그렇지

도아: 프로야구는 아마 야구와는 달리 선수가 년봉을 받고 특정 구단에 속해서 직업으로 야구를 하는데 이런 야구를 프로야구라고 합니다.

전두환의 우민화 정책으로 도입된 3S. 그리고 그 선두 주자가 프로야구였는데 대공계 형사분은 프로야구도 모르는 듯했다. 다시 진술서를 썼다. 그리고 이 진술서를 읽어본 형사분은 나를 전적으로 신뢰하게 된다. 그 이유는 첫번째 진술서와 두번째 진술서가 완전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즉, 거짓말을 하지 않는 녀석으로 본 것이다. 따라서 진술 중에 시위 이외의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내 옆으로 다가온 전경이 머리채를 뒤로 제껴 목을 꺽어 누르며, "이 개새끼 뼈를 갈아 즙을 내 마셔버릴까보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물론 형사분이 말렸다. 착하고, 공부도 잘하는 녀석이라고.

조서는 오늘 처음 시위에 참가했으며, 돌을 들다가 잡힌 것으로 마무리됐다. 그리고 다음 날 법원에서 약식 재판을 받고 구류 2박 3일을 받았다. 다시 노량진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됐다. 태어나서 처음 조서를 받고 유치장에 갇히니 감회가 또 새로웠다. 구치소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지하 유치장에서는 누울 수도 없고 걸을 수도 없었다. 오로지 양반 다리를 하고 앚아 있어야만 했다.

이런 콩밥으로 착각하지 마시길

노란색 양은 도시락에 순보리밥과 콩이 서너알 정도 있다. 그리고 도시락 한켠에 쉬어 터진 듯한 말랑 말랑한 노란무가 세조각 포함되어 있다. [그림출처]

그리고 처음 먹어본 콩밥. 왜 콩밥이라고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밥 때가 되니 노란색 양은 도시락에 누런 꽁 보리밥이 나왔다. 보리밥에는 콩이 몇개 있고 한 쪽으로 쉬어 터진 듯한 노란무가 세조각 놓여있었다. 노란무를 따로 준다면 그나마 씹는 맛이라도 있을 텐데 뜨거운 밥과 함께 나온 노란무는 물렁 물렁했다. 정말 구치소에서도 이런 밥을 먹고 사는지 궁금해졌다.

이렇게 첫 경찰서와의 인연은 2박 3일로 막을 내렸다. 유치장에 갇힌 사람 중 대부분은 시위로 온 사람이고 한 사람은 폭력이었다.

백골단

참 오랜만에 들어본 이름이다. 그런데 백골단을 2mb 정부가 부활 시킬 것이라고 한다. 내가 경험한 백골단과 2mb의 백골단은 분명 다를 것이다. 또 달라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사고이다.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백골단을 투입하겠다는 사고. 이 사고는 분명 군사독재유물이다.

아무리 조심을 한다고 해도 시위대와 진압대의 싸움은 폭력이 수반될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 전경으로도 모자라 특수부대까지 투입된다면 이들에 의해 자행되는 폭력은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다. 이러한 폭력을 단순히 시위를 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묵인한다면 우리의 역사는 1980년대로 되돌리는 것이다.

한나라 당은 잃어버린 십년을 말한다.
그러나 나는 잃어버릴 오년이 더 걱정스럽다.

남은 이야기

지금은 내가 충주에 살고 있지만 학창 시절 친한 친구 중 하나가 충주 출신이었다. 숭실대 전자공학과를 수석으로 입학한 녀석이다. 학사 경고만 받지 않는다면 4년 내내 장학금을 받기로 하고 입학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어떻게 됐을까?

1학년 때 학사 경고 두번을 맞고 짤렸다. 학사 경고를 두번이나 맞은 이유는 바로 여자 때문이다. 서울로 유학 와서 자취를 하면서 여자를 사귀었다. 이 여자 때문에 수업을 자주 빼먹었다. 들리는 얘기에 의하면 '국어도 F를 맞았다'고 한다. 이 녀석과 절친했던 근종이라는 녀석이 이 녀석을 학사 경고에서 모면할 수 있도록 함께 다른 교수님을 찾아 다닌 모양이었다.

이미 성적이 나온 상태라 성적을 고치려면 교수님이 시말서까지 써야 하는 상황. 당연히 성적을 고치기는 불가능했다. 기계과 교수님은 "내가 고처 주어서 학생을 구할 수 있다면 시말서를 써서라도 고처 주겠다. 그러나 봐라. 내가 고처 주어도 학사 경고는 면할 수 없다."

당시에는 시위하는 학생을 추출하기 위해 학사 경고 두번이면 학생을 퇴학시키는 제도가 있었다. 결국 녀석은 학사 경고로 퇴학을 당했다. 그리고 4학년이 되었다. 전두환 정권에 이어 물태우가 집권하면서 학사 경고로 잘린 학생들을 복학시키도록 정책을 바꾸었다.

녀석과 친한 친구는 이 점을 이용해서 녀석을 복학시켜주기로 했다. 나는 시위 중 붙잡힌 기록이 있지만 녀석은 여자 때문에 학사 경고를 받은 상황이라 이런 기록도 없었다. 따라서 복학시킬 증거가 불충분했다. 결국 친구는 사람들의 서명을 받는 방법을 택했고 친구 덕에 녀석도 학교에 복학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렇게 고생해서 복학해서도 여전히 여자만 밝히고 공부에는 관심이 없다는 점. 이렇게까지 고생해서 복학을 시켜준 친구에게 아직도 연락이 있는지 궁금해진다.

유치장에 함께 있다가 함께 나온 녀석 중 시골에서 올라와 권투를 하는 녀석이 있었다. 지금은 권투의 인기가 거의 없지만 당시에는 최고 인기 스포츠였다. 권투를 하는 녀석이다 보니 당연히 주먹을 휘둘렀고 그 때문에 폭력으로 일주일간 구류를 먹은 모양이었다. 녀석 도장이 학교 근처라 다음에 술이나 한잔 하자고 하면서 이름을 물어봤다. 그런데 김씨였다. 나 역시 김씨라 본관을 물었다. 녀석의 답은 의외였다.

비룡체육관인데요.

관련 글타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