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월드컵 때.. 군대에 있었는데 하필 월드컵 기간에 훈련을 뛰게 되었다.

땡볕이 내려쬐는 철원땅에서 8사단 오뚜기 부대와 2박3일간의 치열한 전투훈련을 마치고 부대에 복귀하는데 우리 소대원이 타고 있던 트럭이 논두렁에 쳐박히는 사고가 있었던 것이다..
사고의 정황은 이랬다.
그날이 이탈리아16강이 있던 날이었는데 경기가 끝나고 너무 흥분한 동네 아저씨가 용달에 태극기를 꼿고 도로를 질주하다가 우리 소대원들이 타고 있던 트럭을 보기 좋게 들이 받은것이다. 거기다 술까지 먹고..

그때 난 밥이 안되서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군장위에 있었는데 떨어지자 마자 하늘을 날아 진흙탕 웅덩이속으로 쳐박히고 말았다.. 진흙탕속에서 허우적 거리고 있었는데 바로 윗 고참이 총을 내밀어 겨우 붙자고 빠져 나올수 있었다. 그런 기억 때문에 아직도 월드컵 16강의 밤을 잊지 못한다.

월드컵이 시작되기 직전 행정보급관이 매일 아침 가져오는 신문을 보면 세상은 온통 월드컵 들떠 있었던 같다... 군대에서도 당연 월드컵에 대한 이야기 뿐이었고.. "설기현은 흐느적 거리니 기용하면 안되네.. 이을용이는 세트피쓰가 약하니 차라리 하석주를 데려오는게 났네.. 폴란드는 반드시 이겨야 하네.."등등

그런데 어느날 신문 모퉁이 사설란에 "집단주의를 경계하자는.." 내용의 그런 글이 올라와 있었다. 간단한 내용은 "월드컵에 미쳐있는 대한민국의 집단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월드컵 때문에 피해보는 사람들도 있으며 이런 사람들의 아픔도 챙겨줘야 한다" 라는 그런 요지의 글이었다.. 월드컵 기간중 서해 교전도 있었고.. 아무튼 개인적 성향으로 봤을땐 참 일리있는 글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군대에서 이런 애길 밖으로 꺼냈다간 마주 보이는 북한 GP로 전출될수도 있다는걸 잘 알기에 찍소리도 못하고 그저 머릿속으로 생각만 했었다..

어쨌든 월드컵이 시작되자.. 신문에서는 미친듯이 월드컵과 히딩크를 찬양하는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고, 월드컵 없는 세상은 지옥인것처럼 분위기를 몰아가는것 같았다.. 누구도 이러한 열기에 찬물을 끼얹을수는 없었다..

나는 축구를 좋아했지만 애써 월드컵을 외면하며 대신 월드컵 때문에 사회에서 사라진 노숙자들, 철거된 노점상들, 쉬고 있는 일용직 인부들, 서해교전으로 전사한 부대원들까지...이런 문제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핀트가 영 맞지 않는다는 기분이 내내 찝찝하게 들었다..


훈련이 끝나고 물품 정비시간에 마침 고향 광주에서 열리는 스페인전을 볼수 있었다. 훈련준비다 뭐다 해서 경기를 첨부터 끝까지 제대로 본 건 아마 그날이 처음이었다.

경기가 끝나고 나니 왜 이렇게 스스로한테 쪽팔리는지.. 월드컵의 이면을 보겠다고 나름 눈을 부릅뜨고 있었지만 사실 월드컵의 단면조차 제대로 봤나, 싶은 거였다.. 경기는 재밌었고, 반칙하는 스페인 선수들은 모두 패고 싶었고 이기니까 열나고 신났고... 그게 전부였다..

물론 진짜 그게 전부는 아니다.. 그 이면엔 우리가 고민해야 할 근대적 집단주의와 국가의 이익에 침해당한 개인의 인권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과 함께 중요한 것은, 내가 과연 월드컵이라는, 축구라는 스포츠의 본질을 알고는 있는가, 즐겨 봤느냐, 하는 스스로에 대한 의문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눈이 사시였다. 사시인채로 딴것만 보다가는 안 보인다고 입만 나와 있었던것이다.. 사물의 이면을 꿰뚫는 시선을 가지겠노라고.. 두 주먹 불끈 쥐고 살아왔건만 사실은.. 그것이 정작 강박이 되어 시야를 흐렸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런 깨달음과 함께 월드컵은 막을 내렸다.

그때의 깨달음은.. 모든 벽은, 문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뚫으면.. 모두 문이 될수 있다고 본다.. 현재 살면서 느껴지는 벽 같은 상황, 벽같은 현실... 자세히 보면 그 사시인척 하는 사람들의 한곳에 틈이 보일것이다. 뇌 구석 한구탱이속에서 다른 시각으로 보자면서 애써 외면하던 비굴한 나같은 인간의 그 헛헛한 공간이 보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문이다. 열고 들어가야 비로소 공간이 합쳐진다고 생각한다..

덧,
DMZ 에서 찍은 사진. 뒤로 보이는곳이 북한땅이다. 우리 섹터에 땅굴 징후가 있어 공병들 경계하러 들어갔다가 찍은 사진이다.

인상좀 피라마~ㅎㅎ

덧2,
음악은 그린데이의 볼룬 바드 어브 브로큰 드림스 라는 곡인데.. 구글 번역기를 돌려 보니 "다름은 꿈이 깨져" 라고 나온다.. 정확히 뭔 뜻인지는 모르겠다.. 흔히들 그린데이 하면 딱 떠오르는곡이 바스켓 케이스인데.. "두유 언더스텐~" 시작하는 노랫말이 귀에 익숙한 곡이다..이곡도 요란하지 않으면서 굉장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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