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 전도는 한국교회의 축소판 by 도아
방송 요약
얼마 전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길거리 전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는 기독교인에 대한 내용(거리에서 신앙을 파는 사람들)을 방영했다. 일가친척 중에도 교회에 다니시는 분이 많고 또 교회를 통해 광신도가 되고 한동안 정신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으신 분이 있다. 따라서 길거리 전도는 광신도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던 나도 무척 관심이 있는 내용이었다. “SBS에서 방영된 길거리 전도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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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요약
얼마 전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길거리 전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는 기독교인에 대한 내용(거리에서 신앙을 파는 사람들)을 방영했다[1]. 일가친척 중에도 교회에 다니시는 분이 많고 또 교회를 통해 광신도가 되고 한동안 정신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으신 분이 있다. 따라서 길거리 전도는 광신도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던 나도 무척 관심이 있는 내용이었다. SBS에서 방영된 길거리 전도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진정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
일반적으로 길거리 전도를 하는 사람들은 미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기독교도 보다 더 진정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이들의 진정성은 의심할바는 없다. 다만 개신교도는 성당에 다니는 사람도 구원의 대상으로 본다는 것이 아주 의외였다. 이 아주머니를 보면 개신교에게 하나님은 교회인 것같다. 만약 교회가 아니라면 같은 신을 모시면서 천주교도의 개종을 바랄 일은 없기 때문이다.
사회와 교회 모두에서 배척 받는 사람
길거리 전도를 좋게 보지 않는 사람들이 많고 길거리 전도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에 사회의 배척은 당연한 것 같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이들은 교회에서도 배척당한다는 점이다. 내가 아는 한분도 교회에서 출교됐다.
오른쪽은 두타스님의 모욕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진 사진이다. 두타스님은 사이비 스님으로 모 프로에서 판명났다. 그러나 이 일을 한 사람은 스님은 불쌍한 사람이며 따라서 개종의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교회에서는 성도 취급도 받지 못했다. 아울러 교회는 책임 회피에만 급급했다.
전도사라는 명칭도 없었고 우리 교회 평신도로서 출석하는 그거 뿐이지...
끝나고 바깥에 나가서 주일 외에 나가서 어떤 일을 하는지 우리는 모르죠
의미있는 판결
지난 2007년 10월월 5일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며, 학교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대해 학생측의 승소 판결이 났다. 어찌보면 당연한 내용이지만 무분별한 종교 교육에 경종을 울릴 수 있는 의미있는 판결이었다. 학교에서 종교교육의 자유는 그것이 학생의 신앙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을 때만 허용될 수 있다고 그 한계를 분명히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 것 같다.
학교에서도 종교교육의 자유가 있지만 그것이 학생들의 신앙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을 경우에만 허용될 수 있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혀주셨어요. 그런 것처럼 자기 종교도 분명히 소중하지만 다른 사람의 종교도 소중한 것이고 그 사람들을 존중할 때 오히려 그 종교도 존중받을 수 있다.
길거리 전도는 한국교회의 축소판
강의석군이 종교교육 거부로 단식 투쟁을 할 때 교목실장으로 강군을 지지하다 20년간 다닌 학교를 나오고 목사 신분을 반납한 전 대광고 교목실장 유상태 전목사님은 길거리 전도는 한국교회의 축소판이라고 실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형태만 다르지 본질은 똑 같은 거예요. 길거리에서 예수 안 믿으면 당신들 지옥갑니다. 이러게 하는 거나. 학교에서 너희들 예배드려야 한다. 학교지만 너희들 국어 영어 수학보다도 예배 드리는 게 더 중요하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어요. 이 사람들이... 이 사람들이 지금 이런 생각을 진정으로 갖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는 거죠.
그러나끼 이 사람들... 우리는 그렇게 무식하게 전도 안 한다. 뭐 요즘에 관계전도 해야 한다. 그건 겉으로 하는 이야기이고... 방법론상의 문제이고... 저 친구가 갖고 있는, 예수 안 믿으면 구원 못 받는다고 하는 그런 독선을 너는 안 갖고 있느냐... 똑 같이 갖고 있다는 거예요. 그 사람들도... 이게 문제가 있는 거죠. 이건 기독교의 중심의 문제이지 변방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타종교를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전도
방송 내용에도 있지만 이들에게는 딱 두종류의 사람이 존재한다.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따라서 개신교에서 전도의 의미는 모든 믿지 않는 사람에 대한 정복이며, 아프가니스탄의 선교도 같은 맥락으로 봐야한다.
다 뿌리를 보면 결국은 그 이원론적인 세계관(지옥과 천당)에 입각한 개종을 노리는 선교활동 내지는 전도행위... 그러니까 끊임없는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거죠. 주로 한국 기독교가 그 신학을 포기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얘기를 안하는 거죠. 사실은...
전도는 사명이 아님 I
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기독경[2]을 근거로 전도가 하나님의 사명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복음주의 진영의 가장 전초적인 '선교 대 명령어'가 마태복음 28장
"내가 하늘의 권세를 가졌으니 너희는 세상 끝까지 가서 모든 사람을 제자로 삼아 가르치고 지키게 하라"
이지만 이 부분은 예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한다. 세례가 기독교 내부에서 실천됐던 아주 후세에 추가된 것이라고 한다.
마태복음 28장이 복음주의 진영의 가장 전초적인 선교 대 명령어로 자주 인용되는 말씀입니다.
"내가 하늘의 권세를 가졌으니 너희는 세상 끝까지 가서 모든 사람을 제자로 삼아 가르치고 지키게 하라 세례를 주고"
이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그건 명백하게 예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중에 세례가 기독교 공동체 내부에서 실천됐던 아주 후기의 발전이 예수님 말씀인 것처럼 덧붙여진 것입니다.
그러면 봐라, 성경에 있지 않냐 이건 하나님 말씀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성서 근본주의자라고 얘기하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성서가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쳐서 기록되고 편집되고 그리고 전승됐는지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성서는 오랜 역사를 거쳐서 기록되고 전승되고 또 편집되는 과정에서 편집자의 의도가 반영된 겁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편지가 아니다라고 학문적인 연구결과, 그렇습니다.예날에는 위서라고 본인이 안 썼는데도 마치 바울이 쓴 것처럼 그런 편지들이 아주 광범위하게 흩어지고 그렇게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3]였어요.
전도는 사명이 아님 II {##evangelize2}
전도를 사명인 것처럼 언급한 마가복음의 내용 중 8절까지는 원래 있는 것이고 나머지는 덧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오래된 사본에는 없고 문체도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기독교도에게는 이 말이 누구의 말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기독경에 있다는 것. 그러나 무조건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이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요 8절, 요기까지는 이제 원래 마가복음에 있는 거고... 이 뒷부분은 나중에 덧붙여진 부분으로 보거든요. 그건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오래된 사본에는 이게 없어요. 그리고 또 문체도 좀 다르고요. 이게 누가 말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성서에 있다는 게 중요한 거죠. 한국 기독교인들한테...
종교법 제정 움직임
미국에서 우리나라처럼 무례하게 전도를 하면 촣을 맞아 죽을 수도 있다고 한다. 우리 기독교를 보면 당연한 것 같다. 길거리에서 무례하게 전도하는 사람을 보면 울컥 솓아 오르는 사람은 아마 나만은 아닐 것이다. 총기 휴대가 가능한 미국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있는 얘기다.
그러나 가장 동의한 부분은 "총은커녕 대꾸하기도 힘들어요"라는 부분이었다. 전도가 정말 기독교인의 사명이라면 전도를 입으로 하지 말고 몸으로 하라고 충고하고 싶다. 올바른 행동, 남을 돕는 삶이 세치 혓바닥과 주둥아리도 하는 전도보다는 훨씬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미국 같으면 우리나라 같이 저렇게 무례하게 또 공격적으로 전도를 하다 잘못하면 총을 맞아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총도 없지만... 총은커녕 대꾸하기도 힘들어요. 공공장소를 사적으로 이용한 겁니다. 그걸 허용한 게 누군데요. 국가가 허용한 겁니다. 국가가 공공장소는 지켜줘야 하는 거거든요. 개인이 지키려고 하면 안됩니다, 이거는... 그렇지 않습니까?
일본에는 종교법인법이 있고 미국에는 연방법이 없지만 각 주마다 종교 법인법이 있습니다. 종교에 어떤 사회성이라든지 공익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거든요. 그런 것들이 우리도 좀 그런 걸 제정할만한 시기에 오지 않았는가
기독경은 기록, 전승, 편집된 것 I
기독경은 기록, 전승, 편집된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것은 신학을 공부할 때 다 배우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목사들이 교인에에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고 한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아는 것과 믿는 것이 이 다른 반지성주의에 기인한다고 한다.
신학공부 할 때는 다 배우지요. 그러나 목사들이 교인들에게는 그렇게 안 가르친다 이겁니다. 안 가르쳐요. 한국교회 오늘의 현실 문제는 한국교회의 반지성주의가 아주 결정적이다. 아는 것과 믿는 것, 이것이 사실은 같이 가야 하거든요.
기독경은 기록, 전승, 편집된 것 II
힘없는 학생의 편에 끝까지 남은 류상태 전 대광고 교목실장. 용감하다, 저런 목사도 있구나 하는 막연한 생각만 했지만 이 프로를 통해 끝까지 학생의 편에 남은 이유를 알았다. 어쩌면 한국 기독교는 이런 분들을 통해 다시 국민에게 다가올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목사들이 기독경에 대한 진실을 가르치지 않는 이유로 "약간만 비겁해지면 인생이 행복해진다"는 얘기는 정말 마음에 와 닿았다.
신학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들은 이걸 알아요. 이것을 이야기하면 교인들이 확 깨이는 거예요. 이거를... 어? 이게 이렇게 되네? 성경을 가려 읽어야 하겠네! 왜 이 이야기를 안 하냐는 겁니다. 이 사람들이... 안 하는 이유는 딴 거 없어요. 나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내가 이 이야기 하면 내가 한국교회에서 쫓겨나니까... 약간만 비겁해지면 인생이 행복해진다고... 그거예요. 그게 자기 개인에 그치는 거라면 이해해 주겠는데. 그 사람이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서 이 사람의 말을 듣고 여전히 교리에 속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뭐가 되느냐는 거죠.
길거리 전도, 목사의 가르침
기존 교회의 입장은 개인이 선택한 전도를 교회가 제재할 수 없다는 것이고 국내 최대의 기독교 단체인 한기총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사람, 그리고 교회에 의해 광신도가 되버린 사람은 교회의 가르침(하나님의 가르침이 아닌)을 가장 잘 따른 사람들이었다.
2000년 전 이땅에 온 예수가 가르치려고 했던 나눔과 사랑, 타인에 대핸 배려와 포용, 그 참 정신이 예수천국, 불신지옥의 큰소리에 묻혀버리는 것은 아닐지, 이제 그들과 한국교회는 세상과 올바르게 소통할 방법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SBS의 마지막 구절이다. 그러나 나는 이 구절보다는 류상태 전 대광고 교목실장의 기독교관이 훨씬 더 인상적이었다. 어떤 목사에게도 들어보지 못한 어찌보면 기독교의 참모습을 보여준 설교로 보인다.
하나님은 악인이나 선인이나 똑같이 햇볕과 비를 내려주신다. 이거 무슨 뜻인가? 이거 엄청난 말씀이예요. 윤리적인 잣대까지도 내려놓으시다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는 선인도 악인도 없다는 거예요. 천국 가고 지옥 가고 이런 거 없다는 거죠. 기독교인이고 아니고 이런 거는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조건없이 품어준다는 거죠. 그런데 그런 하나님을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가는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렸어요.
이 프로를 보면서 얻은 것은 한국 기독교의 개혁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는대 있는 것 같다. 전반부에 진행된 거리 전도자의 모습은 지금까지 보아온 광신도의 모습과 별 다른 차이가 없었다. 사회에서도 배척 받고 교회에서도 배척 받는 이들은 프로그램 중간에 나오듯 어찌보면 교회의 가르침을 가장 충실하게 따른 사람으로 보인다.
- SBS에서는 보수교회의 입장은 나오지 않았다. 나온다고 해도 그간 한국교회가 보여준 입장에서 한 걸음도 더 가지 못했겠지만 조금 아쉬웠다. ↩
- 본문에 '기독경', '성경', '성서'가 혼용되어 있다.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성경'과 '성서'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난 Bible를 기독경으로 번역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 하는 성경과 성서까지 바꿀 수는 없기 때문에 이 세 단어를 혼용했다. ↩
- 무협지 생각이 난다. 한때 모든 무협지는 와룡생저, 김아무개역으로 출간됐다. 중국의 유명한 무협 작가가 쓴 것처럼 함으로 책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것인데 이 덕에 만화가게의 수천질이 넘는 무협지는 와룡생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