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던 고향은 by 도아
고향의 명물, 돌담
내 고향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없는 명물이 있었다. 바로 돌담이다. 돌담이라고 하면 제주도 돌담을 떠 올리겠지만 설사 제주도 돌담이라고 해도 내가 살던 고향의 돌담만 못하다. 내 고향 돌담은 정말 돌담이다. 다른 것은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돌담. 보통 돌담이라고 하면 돌로 담을 쌓고 돌과 돌 사이는 진흑으로 매우는 곳이 많다. 그러나 고향의 돌담은 오로지 돌로만 담을 쌓는다. 따라서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돌담을 쌓는 숨은 기술이 따로 있다. 멋모르고 쌓은 담은 바로 무너지기 때문이다.
고향 가는 길
지난 8월 25일~26일에는 고향에 다녀왔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전라남도 곡성군 목사동면 월평리. 이 곳에서 나서 6살 때까지 살았다. 그 뒤 먼저 상경하신 부모님께서 누나의 학교에 입학에 맞추어 누나가 7살 때(내가 6살 때) 서울로 데려 갔다. 따라서 나는 전라도 '깽깽이'라는 소리보다는 서울 '뺀질이'라는 소리를 더 많이 듣는다. 서울에 온 뒤에도 거의 해마다 명절이면 고향을 찾았 던 것 같다.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 나는 것은 보성강. 당시 보성강의 다리가 장마로 끊어졌고 새다리는 아직 완공되지 않아 곡성역에서 보성강까지 버스를 타고 와서 나룻배로 보성강을 건너고 당시로는 꽤 긴 길을 걸어서 갔던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부모님이 서울역에서 차를 태워주시고 할머니께서 곡성역에서 마중 나오시는 방법으로 고향을 방문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많이 변해 버린 고향이지만 당시 고향은 산좋고 물좋은 전형적인 그런 곳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고향을 가는 횟수도 뜸해졌지만 아직도 많은 친척분들이 살고 있는, 그래서 언제나 정다운 곳이 바로 고향이다.
고향에는 '작은 할아버지댁 숙부님'과 '이모님'께서 살고 계신다. 선산도 여기에 있어서 벌초 때와 시제 때는 꼭 방문하지만 벌초하기가 힘들어서 올해에는 조금 일찍 가서 휴가를 겸해 아이들은 물놀이를 시키고 나는 벌초를 할 생각으로 고향으로 내려갔다.
충주에서 다른 곳은 비교적 가깝지만 전라남도에 있는 고향은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충주와 전라도를 연결하는 직선도로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충주에서 전라도를 가려고 하면 3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주덕 오거리에서 36번 국도를 갈아탄다. 증평을 지나 다시 34번 국토를 갈아타고 증평 IC에서 중부 고속도로를 갈아 탄다. 중부 고속도로는 남이 분기점에서 경부 고속도로와 만난다. 경부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회덕 분기점에서 호남 고속도로를 갈아 타고 광주를 지나 순천 방향으로 한 30여분 더 가면 석곡 IC가 나온다. 이 석곡 IC에서 구례, 압록 방향으로 가다가 다시 주암 방향으로 가다 보면 고향인 목사동이 나온다.
목사동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동네 주변에 18개의 절이 있었서라고한다. 즉, 십팔사(十八寺)가 줄어서 목사(木寺)동이 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인지 몰라도 어렸을 때 산에 올라가 보면 꼭대기에 절터가 남아 있는 것을 보곤 했다.
아무튼 25일 아이들과 함께 고향으로 출발했다. 출발한 시간이 12시라 아이들이 배고파 하는 것 같아 음성 청주본가에서 갈비탕을 먹고 출발했다. 청주본가는 충주에도 있는 왕갈비 집인데 갈비 맛이 괜찮고 양이 많아 자주 가던 곳이지만 쇠고기 통조림 때문에 발길을 끊은 곳이기도 하다.
내가 살던 고향은?
고속도로 휴게소 마다 들리면서 쉬었다 가다를 반복하다 보니 막상 고향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6시가 다된 시간이었다. 충주도 덥고 다른 곳도 덥기 때문에 고향도 더울 것으로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웠다. 아무튼 원정지에서 좌회전을 하고 다리를 건너 삼촌댁을 찾아 갔다.
새로 지은 뒤 한번도 가본적이 없지만 오리 축사 근처에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오리 축사 근처로 찾아갔다. 그런데 오리 축사 근처에는 생각과는 달리 상당히 예쁜 펜션같은 건물이 있었다. 우엉맘도 의외였는지 "여기는 아니겠지"라고 얘기했다. 혹시 하는 생각에 노크를 하니 반갑게 맞이 하는 사람은 사촌 동생이었다.
넓은 들에 한 1M 정도를 땅을 돋우어 집을 지으셨다. 그런데 지은 집이 꼭 펜션같다. 지붕을 보면 왼쪽보다 오른쪽이 더 높은데 오른쪽에는 거실이 있기 때문이다. 이 거실은 밖에서 볼 때도 마찬가지지만 안쪽에서 봐도 꼭 팔각정 같다. 창문이 있는 팔각정처럼 외부와 접촉되는 곳은 모두 창문이 달려있다. 특히 해가 떠서 질 때까지 창문을 통해 해가 비추는 구조였다.
거실의 천장은 다른 곳보다 훨씬 높다. 따라서 거실이 아주 넓어 보인다. 또 팔각정의 네면 정도를 모두 커다란 창문을 달았다. 따라서 해가 떨어지면 아주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온다.
거실과 연결된 집 뒷 마당이다. 뒷 마당도 모두 마루처럼 목재로 처리했다. 따라서 손님이 오면 한 여름에는 여기에서 찬지를 벌여도 될 듯했다. 또 이미 여러번 손님을 치룬 듯 오른쪽에는 술병이 잔뜩 놓여 있었다.
고향의 명물, 돌담
내 고향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없는 명물이 있었다. 바로 돌담이다. 돌담이라고 하면 제주도 돌담을 떠 올리겠지만 설사 제주도 돌담이라고 해도 내가 살던 고향의 돌담만은 못한다. 내 고향 돌담은 정말 돌담이다. 다른 것은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돌담.
보통 돌담이라고 하면 돌로 담을 쌓고 돌과 돌 사이는 진흑으로 매우는 곳이 많다. 그러나 고향의 돌담은 오로지 돌로만 담을 쌓는다. 따라서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돌담을 쌓는 숨은 기술이 따로 있다. 멋모르고 쌓은 담은 바로 무너지기 때문이다.
돌로만 쌓아 금방 무너질 것 같지만 어렸을 적에 돌담에서 뛰어 다닌 기억이 있을 정도로 의외로 튼튼하다. 특히 돌로만 쌓은 담이기 때문에 돌과 돌 사이의 틈이 많고 이 틈에는 족제비를 비롯한 각종 야생 동물이 터를 잡는 때가 많았다. 인간과 인간 사이트의 터울로 존재하는 담이지만 가장 자연 친화적인 담이기도 하다.
특히 이런 돌담이 온 마을을 감싸고 있다. 10여년 전인 것으로 기억을 하고 있다. 아마 할아버지께서 돌아 가셔서 방문했을 때였던 것 같다. 당시에는 아직 시멘트 집이 딱 한집 있을 때라 마을의 거의 모든 집이 돌담이었다. 이런 돌담길을 햇살을 받으며 걷다 보니 이 곳이 외국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이국적이며, 몽환적인 분위기가 연출됐다.
지금은 관리를 하지 않아 무너진 곳도 많고 이미 풀밭으로 바뀐 곳도 많다. 그러나 사진에서 알 수 있듯이 오로지 돌로만 쌓은 담이 이 마을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유독 이 마을만 이렇게 돌만 가지고 담을 쌓았는데 이런 돌담은 그 특성상 비가 많이 오면 여기 저기 무너진다. 따라서 젊은 사람들이 없으면 관리하기 힘들다.
목사동면 전체에 350가구 정도가 있으며, 총 거주 인원은 700명 정도라고 한다. 즉 한 가구에 두명 정도(모두 나이드신 분)가 거주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다 보니 담을 관리하기 힘들어 하나 둘씩 시멘트 건물로 바뀌었다. 문제는 사람이 살지 않는 돌담은 풀로 뒤덥히지만 사람이 살지 않는 시멘트 건물은 모두 흉물스럽게 바뀐다는 점이다.
아마 동네에 처음으로 생긴 현대식 건물로 기억한다. 이모님 댁이다. 할아버님께서 돌아가시던 당시에 새로 지은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의외로 시골에 사시는 분들은 셈이 많으시다.
따라서 누가 양옥을 지우면 바로 양옥을 지을 가능성이 많은데, 이모님댁이 처음 양옥을 지은 뒤 동네 곳곳에서는 양옥이 들어섰다. 그러나 앞에 설명했듯 돌담 집은 시간이 지나도 자연스럽고 고풍스럽게 유지가 되지만 시멘트 건물은 시간이 지나면 지난 수록 보기 좋지 않게 변하는 것 같았다.
오랜 만에 온 큰 조카라 삼촌께서는 토종닭 두마리를 잡으셨다. 암닭과 수탉을 잡으셨는데 백숙으로 내온 닭의 크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우영이와 다예는 휴게소에서 군것질을 한 덕에 백숙은 먹지 않았고 우엉맘과 나, 숙부님과 숙모님, 이모님과 이모부님, 그리고 사촌 동생이 함께 먹었지만 역시 양이 많았다. 그런데 토종닭이라서 그런지 역시 육질이 쫄깃 쫄깃하고 국물이 정말 시원했다. 토종닭의 국물맛은 먹어본 사람만이 그 맛을 안다.
다같이 돌자 동네 한바퀴
다음 날 아침은 조금 일찍 일어났다. 그리고 우영이와 다예를 데리고 동네 한바퀴를 돌면서 사진을 찍었다. 문제는 어제 저녁 사진을 찍으면서 조금 어두운 것 같아 ISO를 자동에서 1600으로 바꿨는데 이 사실을 잊고 사진을 찍은 덕에 사진들의 상태가 모두 좋지 않았다.
잘 알고 있겠지만 나팔꽃은 통 꽃이다. 따라서 나팔꽃을 들고 나팔꽃의 향기를 맡기 위해 숨을 크게 들여마시면 나팔꽃의 꽃잎에 코를 깜싼다. 멋모르고 따라하다가는 깜짝 놀라게 된다. 길 주변을 보니 이런 나팔꽃이 많았다. 우영이에게 이런 장난을 한 뒤 우영이와 다예에게 나팔꽃을 하나씩 따 주었다.
사진을 보면 알 수 있지만 논에 피가 잔뜩있다. 예전 같으면 사람이 모두 뽑았겠지만 지금은 인건비가 비싸서 피를 뽑지 않고 그대로 둔다. 예전에 우리 농업을 보고 원예 농업이라고 평했는데 다른 이유 때문이긴 하지만 이제는 이런 원예 농업은 벗어난 듯하다.
어렸을 적에는 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요즘은 마을에 이층짜리 건물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렸을 적에는 동네에서 유일한 이층짜리 건물이었다. 이 이층이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것 같다. 아무튼 내가 어렸을 적에는 여기가 이발소였고 이 이발소 아래층은 전방이었다.
지금도 아래층은 전방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 전방 주인 할아버지는 이미 고향을 떠난지 30년이 더된 상태에서도 나를 '누구 아들(아버님 성함)'로 기억하고 계셨다. 작년까지만 해도 가게를 보고 계셨는데 요즘은 보이지 않으신 것 같다.
삼촌이 사시는 용봉리에서 용봉리 안쪽의 집들은 모두 폐가이고 용봉리 바깥쪽의 집들만 사람이 살고 있다. 이 폐가 왼쪽이 원래 삼촌이 사시던 곳이었는데 삼촌이 이사하신 뒤로는 이 골목의 집들은 모두 폐가가 됐다.
바닥이 자갈이라 우영이와 다예는 자갈을 가지고 노는 것이 재미있는 듯했다. 왼쪽은 잔디밭이지만 아직 잔디가 다 자라지 않았고 오른쪽은 주차 및 다른 작업을 하기시기 위해 콘크리트로 발라 두신 것 같다. 잔디 밭에는 커다란 돌을 놓아 두셨다. 평상처럼 사용하시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돈을 주고 사셨다면 상당히 주셨어야 하지만 다행히 얻은신 것이라고 한다.
마당 앞쪽으로 보이는 비닐 하우스는 모두 오리 축사이다. 삼촌은 예전에 농약을 치시다 농약 중독으로 쓰러지신 뒤로는 농약도 사용하지 않고 논 농사의 비중도 줄이셨다. 대신에 오리를 키우시고 오리 똥과 퇴비로 농사를 짓고 계신다. 원래 사시던 곳에서는 오리 축사가 보이지 않으셔서 오리가 폐사하는 일도 많았는데 이사 하신 뒤로는 이런 일도 싹 줄었다고 하신다.
실제 마을을 돌아다니다 보면 농사 대신에 다른 일을 택하신 분들을 종종 보게된다. 농사만 짓는 것이 고향을 더 고향답게 유지할 수 있지만 농사만으로는 먹고 살기 힘드시기 때문에 다들 농사 이외의 일을 하시는 것 같았다.
아침을 먹고 벌초를 하려고 했치만 일단 함께 벌초를 하려고 했던 사촌 동생이 오지 않았다. 날씨가 너무 덥고 혼자서 벌초하기에는 봉분이 많아 아버님 묘소만 보고 절을 드리고 왔다. 아버님 봉분은 떼가 자라지 않아서 얼마 전 다시 떼를 입혔는데 이번에는 봉분 윗부분을 빼고는 떼가 잘 자라 있었다.
다시 여수로...
외삼촌께서 얼마 전에 간암 수술을 받으셨고 친하게 지내던 사촌 여동생도 남편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보지 못해서 일단 삼촌댁에 인사를 드리고 이모님댁에 들린 뒤 여수로 향했다. 예전에 선배 형 때문에 여수에 들린적은 있지만 경황이 없어서 그냥 올라왔었는데 이번에는 외삼촌댁에 들려서 외삼촌과 사촌 여동생을 모두 만나 볼 예정이었다.
어차피 주암 IC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순천으로 가면 되기 때문에 일단 주암으로 간 뒤 고속도로를 타고 순천으로 향했다. 숙부님께서 여수에 가려고 하면 순천에서 외곽 순환을 타면된다고 해서 순천 IC에서 외곽 순환도로를 타는 방법을 물어본 뒤 외곽을 타고 여수로 향했다.
예전의 기억으로는 여수에 가기전 여천 공단을 지나 여수에 갔던 것으로 기억하고 외삼촌 역시 여천에 계신다고 해서 가는 내내 이정표를 살펴봤지만 여천에 대한 이정표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여수 시청 근처에 차를 주차한 뒤 PC 방에서 지도를 확인해 보니 여천과 여수가 합쳐진 것 같갔다. 외삼촌께 번지를 물어본 뒤 지도를 확인하고 외삼촌댁에 찾아갔다.
외삼촌께서 이미 연락을 하셨는지 외삼촌 댁에는 이미 사촌 여동생이 와있었다. 외숙모님께서는 시장에 계신다고 하셔서 외숙모님이 계신 시장으로 가서 사촌 여동생네, 외숙모, 외숙부님, 우리 내외가 함께 식사를 했다. 족발집이었는데 매일 아침 족발을 삶아 직접 만들기 때문에 '족발이 상당 쫀득 쫀득하고 맛있었다'. 또 순대국인지 아니면 돼지국밥인지 모르겠지만 이 국밥은 입맛에 맞지 않았다.
외삼촌, 외숙모님과 여동생을 보고 길이 멀기 때문에 다시 길을 나섰다. 사촌 여동생에게 해줄말도 있었지만 선뜬 입이 떨어지지 않아 가볍게 안아 준뒤 길을 나섰다. 목사동까지 올 때 한 6시간 정도 걸렸고 목사동에서 다시 한 시간 넘게 달려서 온 곳이 여수라 출발한 시간은 오후 2시 정도였지만 빨라야 오후 8시 정도에나 충주에 도착할 것으로 생각하고 길을 나섰다.
이젠 집으로...
가는 길은 오는 길을 따라 가는 것이라 큰 문제는 없었다. 또 아이들이 모두 잠이 든 상태라 휴게소를 들리지 않아서 인지 생각보다 빨리 증평 IC를 빠져나왔다. 증평 IC를 빠져나와 34번 국도를 타고 가다 보니 가면서 봤던 칼국수집이 보였다.
고향으로 가는 길에 우연히 이집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조립식 주택 전시장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의외로 '해물 칼국수 집'이었다. 맛이 괜찮을 것 같아 오면서 한번 들리기로 했었다. 막상 방문해보니 역시 손님이 아주 많았다. 해물 칼국수가 4500원이라 해물 칼국수 두개에 만두 하나를 시켰다. 그리고 잠시 뒤 해물 칼국수가 먼저 나왔다.
간판의 이름은 동천 24시 해물 칼국수이다. 정말 24시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진처럼 정말 예쁘게 지은 건물이다. 마치 펜션같다. 또 언제부터 생긴 집인지 모르겠지만 의외로 알고 찾아오는 사람도 많은 듯 했다. 우리 내외가 먹은 것은 해물 칼국수이지만 해물 샤부샤부, 해물탕 등 다른 메뉴도 있었다. 우리 가족이 해물탕집에 들어섰을 때는 그림처럼 해물탕집은 만원이었다.
사진이 모두 흔들린 듯하다.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먼저 칼국수 육수가 나오며 이 육수에 이른바 시원하다는 해물을 모두 넣는다. 꽃게, 새우, 황태, 바지락. 이외에 버섯도 들어간다. 그러나 이런 해물을 넣지 않아도 국물은 아주 시원하며 맛이 있었다. 반찬으로는 김치와 노란무가 나오고 칼국수를 칼칼하게 먹을 사람을 위해 청양 고추로 만든 다데기가 제공된다. 다데기를 넣고 먹는 맛과 그냥 먹는 맛이 다르다.
우연히 찾은 집이지만 나중에 지나가다 다시 한번 들려 보고 싶은 집이었다. 칼국수 국물이 아주 시원하고 맛있었고 겉절이 역시 맛이 좋았다. 이번에 먹은 것을 칼국수이지만 다음에는 샤브샤브나 해물찜이 먹고 싶어졌다. 그 이유는 칼국수에 들어간 해물이 의외로 싱싱했기 때문이었다.
칼국수 집을 빠져나와 다시 집으로 향했다. 칼국수를 먹기 시작할 때는 그나마 해도 있고 비도 오지 않았지만 칼국수 집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날도 저물고 비까지 부슬부슬 오고 있었다. 밤 길이라 오는 것이 여의치 않았지만 집에 도착하니 오후 9시 정도 된 것 같았다.
더운 여름, 아이들과 함께 간 고향은 "내가 살던 고향은"아닌 것 같았다. 맑은 물은 저수지 공사 때문에 흙탕물이 내려오고 있었고 이국적 풍광을 자랑하던 돌담은 이끼가 끼거나 여기 저기 무너져있다. 또 이런 돌담보다는 흉물스런 시멘트가 곳곳에 보였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예전에는 인근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던 용봉에 사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내가 태어난 월평은 5~6가구가 살던 원래 작은 동네였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이 살던 용봉까지 이렇게 점점 사라지는 것을 보면 우리 아이가 자랐을 때는 아이가 찾아갈 고향이 아예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한미 FTA를 얘기한다. 나도 얘기하고 싶은 주제이긴 하지만 적어도 농사에 비교무역 우위론을 주장하지 않았으면 한다. 농사나 농촌은 이런 이론으로 다룰 수 있는 주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농사를 짓고 계신 삼촌도, 이모부님도 자식들이 농사를 짓기는 원하지 않으신다. 언제가 우리 농촌이 모두 사라질 수 있다는 걱정은 바로 여기에서 오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