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도시부평 민중가요 아카이브 시리즈 <#2 하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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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최초의 노래패 노래이야기, 하태준
문화도시부평과 함께하는 <민중가요 아카이브>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중가수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인터뷰 운영은 국내 최대 민중가요 아카이브 사이트 PLSong.com의 운영자 ‘단풍’이 참여했다.
2회는 '노래이야기'로 활동한 하태준님이 참여해주셨다.
Q. 대학 시절에도 노래패 활동을 하셨던건가요?
A. 음악은 옛날부터 좋아했어요. 기타도 좀 쳤구요. 선배 형이 노래패를 만들려고 준비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 형이 노래패를 같이 만들자, 그래서 시작을 한 게 88년도에요. 인천대에 노래패가 만들어졌고, 인문대에도 노래패가 없길래 89년 90년 즈음에 인문대 노래패를 만들었어요. 인천대 노래패는 처음에 이름을 ‘아침이슬’이라고 했는데, 이름이 운동성이 좀 약한 것 같다 그래서 중간에 이름을 '함성'으로 바꿨어요.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박은영이라는 가수가 있는데, 그 친구가 우리 노래패 출신이에요. 함성은 지금도 인천대에 남아 있어요. 지금은 민중가요를 부르는 것 같지는 않아요. 인문대 노래패는 해체됐어요. 캠퍼스를 송도로 옮기면서 동아리방이 없어졌어요. 동아리방이 없고 그러니까 지지부진하다 없어졌다는 이야길 들었죠.
Q. 노래이야기를 어떻게 만들게 되신건가요?
A. 대학을 졸업할 즈음은 노동 현장에 대한 투신을 권유하는 분위기였는데, 저는 창작활동을 하고 싶었어요. 제 생각에 노동운동은 대학 졸업한 뒤 감성적으로 공장에 취직하고 해서 하는게 아니라, 미싱을 배우든 용접을 배우든 배워서 뼈를 묻을 각오로 해야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저는 시를 좋아하고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창작을 하고 싶은 사람에게 노동운동을 하라고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해요. 내가 부문 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계급 운동을 하는 사람을 도와주고 옆에서 보조해줄 순 있지만, 섣불리 노동을 운동을 한다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저는 창작활동을 하고 싶었고, 잘하는게 그거니까 창작활동으로, 전문노래패 활동으로 기여하고 싶었던거죠. 그래서 노래하는 후배들과 1년 정도 열심히 준비해서 95년 가을쯤 음반을 냈어요. 인천대 노래패 후배들만 있었던건 아니에요. 성신여대나 다른 학교들고 있었고, 당시 인천에 있던 학생조직 중에 인천사랑학우회라고 있었는데, 그쪽 출신도 있었고요. 그래서 사실 인천에서 노래 쫌 한다는 학생들이 다 모였었죠.
Q. 노래이야기가 인부총련(인천부천지구대학총학생회연합) 노래패라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건 아니었나 봅니다. 학생노래패가 아니면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을텐데요.
A. 네. 사회인 노래패, 그러니까 전문 노래패였어요. 저는 원칙이 자력생생이거든요. 간혹 소위 운동권들 가운데 스스로 노동하지 않고 활동비를 받아서 대단한 일 한답시고 으스대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는 기본적으로 노동을 해서 돈을 벌고, 그러면서 활동을 해야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노래이야기도 그런 고민이 있었죠. 월급 받는 가수를 만들고 싶었고, 공연장과 연습실이 있는 공간을 만들고 지역에서 활동하는 그런 꿈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노래활동만으로는 한계가 있었어요. 그래서 앰프를 대여해보자하는 생각이 들었죠.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앰프와 조명을 다루기도 했고, 당시 학교 행사들이 커지다 보니까 학생회 자체 장비로는 감당이 어려워 수요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음향사업을 해보자 이랬어요. 노래패 노래이야기의 경제사업단처럼 음향사업을 시작했죠. 음향사업이 생각보다 잘 됐어요. 초기 자본금 200만원으로 시작해서 매출액이 2억 가까이 났으니까요. 제가 나름 당시 대학생들 사이에서 유명해서 영업이 잘된 편이었거든요. 하하하.
Q. 대학생들 사이에서 유명하셨다구요?
A. 제가 원래 국문학과였잖아요? 북한 소설 중에 ‘꽃파는 처녀’라고 있어요. 이 소설을 보고 너무너무 슬프고 감동을 좀 받았어요. 그래서 이거를 노래극으로 좀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89년 즈음에 노래극으로 창작을 했어요. 북한 노래는 잘 모르니까 아는 노래들로 노래를 배치하고 무용도 좀 만들고 그리고탈패들하고 함께해서 만들었는데, 학생들이 굉장히 좋아했어요. 노래를 잘한 학생들이 굉장히 많기도 했고, 꽃파는 처녀가 워낙 슬픈 소설이기도 했고요. 그래서인지 여학생들은 공연을 보고 많이 울었죠. 울었다는 건 감동을 많이 받았다는 거겠죠? 그러다보니 초청을 좀 다니고 조금 유명해졌고, 전대협 문화부 회의도 다니고 하다 보니 여기저기 인맥들이 많이 생겼죠.
Q. 노래이야기를 인천에서 시작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A. 저는 원칙이나 기준이 단순한 사람이에요. 당시 서울엔 문화활동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인천에는 사람도 없고 전문적으로 노래하겠다는 사람도 없는데 나라도 좀 남아서 해야되지 않나?'하는 생각이었어요. 인천에서 좀 역할을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거죠. 뭐 인천에 있지만 전국으로 공연다니는데는 큰 문제가 없기도 했구요.
Q. 인천에서 활동도 많이 하셨겠어요.
A. 인천 지역에 무슨 행사가 있다고 하면 거의 다닌 것 같아요. 부평에 있는 미군기지 관련 싸울때도 많이 갔어요. 너무 많이 가서 일일이 기억을 못하겠네요. 전국활동도 많이 하면서 인천에서도 많이 활동했죠.
Q. 노래이야기의 노래는 당시 유행했던 민중가요들이랑 좀 달랐어요.
A. 많이 달랐을거에요. 작곡가들이 멜로디를 가져오면 제가 가사를 붙이는 방식으로 노래를 만들었죠. 그때 작곡가들에게 마음 가는대로 만들라고 했었어요. 우리한테 작곡가가 두 명이 있었는데, 모두 클래식을 전공했거든요. 그러다보니 민중가요풍의 가사를 붙이기가 굉장히 난해했어요. 그래도 결과물들이 좋아서 어떤 즐거움이 있었어요. 서로 합이 잘 맞아서 노래를 만드는 일이 즐거웠어요. 당시에 민중가요 작곡가들은 전공을 했다기보다는 개인적 역량에 근거했다고 봤고 그래서 좋은 노래도 많았지만, 음악적 완성도나 뭐 이런 거로는 우리가 좀 충분하다 그런 자신감이 있었어요. 그래서 어떤 면에서 단점이기도 한데, 우리 노래가 좀 따라 부르기 어려운 면도 있죠.
Q. 노래이야기의 대표곡이라면 단연 ‘투쟁은 끝났다 말하지 말라’입니다. 특히, “내 조국은 아직도 식민지 우리가 할 일은 미국놈 몰아내는 것” 이 부분이 인상적입니다.
A. 당시, 그러니까 1995년 즈음엔 정권과 유화분위기가 좀 있었어요. 아무것도 된 게 없었는데 갑자기 통일운동도 안하고 국가보안법 철폐투쟁도 안하고 그랬어요.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미국에 종속되어 있는 그런 상황이 하나도 바뀌지 않았는데, 갑자기 싸움은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당시에 제가 활동하던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하고도 거리를 두는 것 같았구요. '왜 사람들이 투쟁 투쟁이 끝났다고 말하지?' 하는 생각이 들고 해서, '니들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라' 뭐 이런 식의 생각을 드러낸거죠.
'우리나라가 이제 선진국인데 왜 미국 식민지라고 해?'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거에요. 그런데 제가 보기엔 아직도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서 거의 반식민지 상태라고 봐요. 사실 저 노래를 만든지 25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현실이 슬플 뿐이죠. 한국이 발전하기 위해서라도 중국, 북한과 가깝게 지내야 한다고 봐요. 그런데 얼마전 한미안보협의회의에서 대만을 언급하면서 중국쪽 반발을 불러 일으켰잖아요? 과연 이게 한국에게 이익이 되느냐라고 봤을 때 아니라고 봐요.
이러니 미국에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종속적이라는거죠. 단어들이 약간 과격하긴 한데, 노래를 만들땐 머리에 콱 박힐만한 단어를 써야 하거든요. 그때 작곡가들은 그 부분보다 “죽지도 말아라 투쟁을 끝내기 않고서는” 이 부분이 더 좋아했어요. 되게 과격한데 괜찮은 것 같다고, 약간 머리가 쭈뼛 섰다고 그러더라고요.
Q. 통일운동을 주로 노래하는 줄 알았는데, 음반을 보면 노동에 관련된 노래들, ‘우리 노동자’라든지 ‘잔업을 마치고 난 밤에’ 같은 노래들 말입니다. 노동에 대한 노래들을 만드신 이유가 있나요?
A. 대단한 생각을 가졌던 건 아니고요. 노동운동과 통일운동이 서로 다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노동운동이 전체 남한 운동의 큰 축 가운데 하나잖아요. 그래서 노동자의 정서를 이해하고 그 사람들을 위한 노래도 만들어야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노래들 가운데 ‘우리 노동자’는 약간 관념적인 노래인데, ‘잔업을 마치고 난 밤에’ 같은 경우에는 실제 노동하는 사람들이나 잔업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그 정서에 다가가려고 많이 노력한 작품이에요. 하지만, 내가 직접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물론 잠깐의 경험은 있지만 노동을 통해 생활을 영위하는 그런 경험은 없기 때문에 무척 조심스러웠어요. 이런 저런 책들을 바탕으로 해서 공감하려고 노력해서 만든 노래였어요.
Q. 노래이야기 이후에는 어떻게 살고 계시나요?
A. 제가 국문과 출신이어서 25년정도 학원강사를 했어요. 거기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구요. 수업 준비를 엄청 열심히 해서 나름 유명한 강사가 됐습니다. 한 달에 몇 천만원씩 벌었어요. 그러다가 사실 제가 노래보다 대본을 잘쓰거든요. 그래서 영화공부를 하기위해 한예종에 진학하려고 했는데, 집의 반대와 건강이 안 좋아져서 포기했어요. 신장이 망가져서 신장이식을 했습니다. 앞으로는 글을 써볼까 해요. 그때는 노래로 이야기했으면 이제는 소설이나 시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원래 전공이 문학이니까 문학으로 이야기해보자라는 생각이에요.
인터뷰, 사진, 정리 : 단풍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사업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