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김씨 시조는 일본인?
김해김씨(우록)
내 본관은 '김해김씨'다. 잘 알다시피 김해김씨는 가야의 김수로왕을 시조로 한다. 나도 이렇게만 알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뿌리를 찾아서'라는 싸이트에서 김해김씨는 '가락'과 '우록' 두 파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 우록은 김수로왕이 아니라 가등청정의 좌선봉장이었다 귀순한 김충선을 시조로 한다고 한다. 따라서 오늘은 김해김씨(우록)의 시조와 '뿌리를 찾아서'라는 좋은 사이트를 소개한다.
김해김씨(가락)
왼쪽의 사진은 평민당 창당준비위원장 시절 김수로왕과 왕비 묘소를 찾아 참배하는 장면이다. 오른쪽 사진은 1987년 5.18민주묘역을 참배한 뒤 유가족과 오열하는 모습이다. 고 김대중 대통령이 그리워 지는 것은 본관이 나랑 같은 김해김씨(가락)여서가 아니라 평생을 바친 민주화에 대한 열정 때문일 것이다.
김해김씨(우록)
다음은 뿌리를 찾아서 따온 김해김씨(우록)에 대한 정보이다. 2000년에 약 20만명 정도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한다.
출처: :: 김해김씨(金海金氏)[우록] :: - 뿌리를 찾아서
시조 김충선(金忠善,1571~1642, 자는 선지, 호는 모하당)은 본래 일본인으로 성은 사(沙)씨이며 이름은 야가(也可)이다. 그가 임진왜란 때 21세의 나이로 일본군 가등청정(加藤淸正, 가또오 기요마사)의 좌선봉장(左先鋒將)으로 삼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4월 13일 부산 동래에 상륙 했다.
조선의 문물과 인정, 풍속에 감탄하여 상륙한지 1주일만인 4월 20일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朴晋)과 김응서(金應瑞)에게 "내가 못난것도 아니요, 나의 군대가 약한 것도 아니나 조선의 문물이 일본에 앞서고 학문과 도덕을 숭상하는 군자의 나라를 짓밟을 수 없어 귀순하고싶다."라는 편지를 보내 귀순의 뜻을 밝힌 후 귀순하였다.
귀순 후 조선의 장수로 울산과 경주, 영천 등지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특히 그는 조선에 화포와 조총을 만드는 법과 사용술을 보급하였고, 18개 지역의 왜적의 성을 탈환하는 등 눈부신 업적과 전공을 세우자 권율장군과 어사 한준겸(韓浚謙)이 왕에게 간청하여 정이품 자헌대부에 올랐으며 선조가 그를 친히 불러 이름을 김충선으로 하사 하였다.
1603년(선조 36년) 북방에서 여진족이 국경을 어지럽히자 국경방어를 자청하여 10년간 국경을 지키다 물러났고,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는 다시 출정해 부장(副將) 서아지(徐牙之)의 목을베어 평정에 공을 세웠다. 1627년(인조 5년)의 병자호란 때는 의병을 모아 경기도 광주의 쌍령(雙嶺)에서 매복작전으로 대승을 거두어 무훈을 떨쳤다.
그는 서른살이 되던 해 진주 목사(晋州牧使) 장춘점(張春點)의 딸을 아내로 맞아 경북 달성군 가창면 우록동(友鹿洞)에 뿌리를 내리고 충효의열(忠孝義烈)의 가풍(家風)으로 살다가 1642년(인조 20년) 72세로 세상을 마쳐 가창골에 세워진 녹동서원(鹿洞書院)에 배향되었고, 정헌대부 지중추부사(正憲大夫 知中樞府事), 병조참판(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지금 그의 후손들은 경북 달성군 가창면에 많이 살고 있으며 우록동에 살았기 때문에 우록김씨라고도 불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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