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홍명보인가?
내가 이 질문을 던진것은 이 물음이 우리 축구의 현실, 참담한 현실을 잘 반영하기때문이다. 이번 튀니전의 평가는 홍명보의 등장으로 인한 수비진영의 안정이 큰 소득이라고 한다. 무엇이 소득일까? 그의 건재가? 한국 축구의 미래가?
다음은 한겨례신문 2000년 10월 25일자 기사, "[기영노의스포츠파일] 홍명보를 보면 난 되레 우울하다"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바로 한국축구다. 한국축구가 벌써 10년 넘게 '흥부타령'을 부르고 있다. '흥부' 홍명보(31·가시와 레이솔)가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단 것은 90년 1월이다.
한국과 몰타 대표팀과 친선 경기였다. 그 후 한국 축구는 최정민 우상권 이회택 차범근 최순호 등 과거의 스타플레이어들이 국가대표에서 차지했었던 비중 이상으로 홍명보에 의지해 오고 있다. 홍명보를 처음 국가대표로 발탁한 이회택부터 이차만, 박종환, 김호, 차범근 허정무에 이르기까지….
국가대표팀 감독은 수시로 바뀌었지만 홍명보는 '전가의 보도'처럼 부름을 받았다. 그 결과 홍명보는 한국축구 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쌓았다. 오늘 벌어질 사우디 아라비아와의 준결승전까지 포함하면 A매치만 112경기. 최순호(현 포항감독)씨가 세운 '한국 선수 A매치 최다 출전 113경기'에 1경기만을 남겨놓고 있다.
홍명보의 컨디션에 따라 한국축구는 희비가 엇갈렸다. 대표적인 예가 2000시드니올림픽 첫 경기인 스페인전과 지금 진행중인 아시안컵 쿠웨이트 전이었다. 스페인전에서 홍명보는 허벅지 부상이 회복되지 않아 막판에 와일드카드 엔트리에서 빠졌다.
허정무 감독은 강철(부천 SK)을 긴급 투입했으나 졸전 끝에 0대3 참패를 당했다. 쿠웨이트 전 결장은 중국과의 첫 경기에서 레드카드를 받는 바람에 생긴 악재였다. 홍명보가 없는 한국은 무기력한 경기를 펼치며 0대1로 패했다.
한국축구는 홍명보가 뒤에 있으면 수비가 안정되고, 미드필더나 공격으로 나오면 공격이 살아난다. 94미국월드컵축구대회 본선과 98프랑스월드컵 아시아지역예선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다. 홍명보는 94미국월드컵축구대회 본선 첫 경기 스페인전에서 팀이 0대2로 뒤져 패색이 짙어지자 수비에서 공격으로 전환해 무승부를 이끌어냈다.
세 번째 경기인 독일 전에서는 전반전을 0대3으로 뒤지자 후반전에는 아예 공격수로 변신해 30여m 초장거리 슛을 성공시켰다. 또한 98프랑스월드컵 아시아지역 예선 일본 원정(97년 9월28일)경기에서는 0대1로 뒤지는 상황에서 공수를 안정감 있게 조율해 역전승의 발판을 놓았다.
이처럼 홍명보의 존재 여부는 한국축구의 성적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홍명보의 나이는 벌써 30대 중반으로 치닫는데, 그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높아가고 있다. 이대로 가면 2002년 월드컵도 홍명보에게 맡겨야 할 판이다. 이것은 그동안 한국축구가 홍명보의 후계자를 키우지 못한 데 따르는 피치 못할 후유증이다.
아마추어 지도자들은 선수가 자질이 있어 보이면 우선적으로 공격수로 키웠고, 상급학교나 프로팀들도 공격수 위주로 선수를 스카우트한 결과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음지의 수비수'가 되겠다는 꿈을 키우겠는가.
한국 축구의 대들보 홍명보. 그의 건재는 역설적으로 한국축구의 한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잣대나 다름없다. 레바논에서 날아온 승전보가 그래서 더욱 씁쓸하기만 하다.
나도 홍명보를 사랑하는 팬의 한사람으로서 그의 복귀가 반갑고, 그의 역할의 큰 기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또 홍명보인가?"하는 물음 역시 우리 축구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우리 축구의 참담한 현실앞에 던질 수 밖에 없는것 같다. 만연한 계보주의으로 재능있는 인재를 죽이고, 이유없는 마녀사냥으로 국민적 영웅을 역적으로 만드는 우리 축구계에 과연 어떠한 비젼이 있을까?
4년뒤에도 이와 똑같은 글을 적고있을 날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