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김활란, 모윤숙, 노천명과 그들의 말.
김활란: 아세아 10억 민중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결정이 최고조에 달한 이 때! 어찌 여성인들 잠자코 구경만 할 수 있겠습니까!이제 우리도 국민으로서의 최대 책임을 다할 기회가 왔다! 황국신민으로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노천명: 대동아 전쟁의 승패는 결국 적국 여성들과 일본 여성의 근로의 투쟁에 있을 것 입니다. 여자 정신대는 이 때 우리 여성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길인 줄 압니다.
모윤숙: 가난한 이 몸이 무엇을 바치리까. 오로지 끓는 피 한 목숨 축여 보태 옵니다.
얼마전 이화여대에서 김활란상을 제정해 수상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 여성 지도자(친일도 업적으로 본다면)인 김활란[1]이 태어난지 백주년을 기념해서 국제적으로 탁월한 업적(역시 친일이겠죠?)을 쌓은 전문여성을 선정, 시상하겠다는 것이다. 다음은 인터넷 반민특위에서 가져온 김활란의 약력이다.
김활란(金活蘭, 일본명 아마키 카츠란(天城 活蘭), 1899~1970)
- 1899년 인천 출생
- 1907년 이화학당에 입학, 1918년 졸업한 후 이화학당에서 교편을 잡았다.
- 1922년부터 4 년간 미국 오하이오 웨슬레안대학과 보스턴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1931년 칼럼비아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 이화학당, 이화여자 전문학교에 몸담았다.
- 귀국하여 한때 근우회와 YWCA 등 기독교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일제의 침략전쟁이 가속화되는 1937년부터 총독부가 주관하는 방송선전협의회, 조선부인연구회, 애국금채회 등에 참여
- 그 이후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 연맹, 임전대책협의회, 조선 교화단체연합회, 임전보국단 등 황민화 운동과 내선 일체운동 그리고 침략전쟁을 지원하는 각종 관변단체의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친일 행각
- 1939년 6월 「동양지광]에 게재된 「부인들끼리의 애정과 이해-내선 부인의 애국적 협력을 위하여」
- 1941년 12월 임전보국단결전 부인대회 및 강연회에 연사로 나서 「여성의 무장」이란 제목으로 강연
- 1942년 2 월 싱가포르 공략 대강연회에서 「대동아건설과 우리 준비」 강연
- 1941년 10월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평의원 및 참사를 지냄
- 이화여전 교장으로 있던 1942년 12월 「신세대」 잡지에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 라는 글을 써서 다시 한 번 열렬한 친일성을 과시
- 1943년 12월 「뒷일은 우리가」
- 1943년 12월 26일 매일신보, 「남자에 지지않게 황국 여성으로서 사명을 완수」
굳이 인터넷 반민특위의 글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그녀의 친일행각은 만인에게 잘 알려진 사실이 아닌가? 삼천만 동족이 일제의 앞제에 신음하고 있을 때 자신의 영화를 위해 동족을 팔고, 수많은 젊은이들을 전쟁으로 내몬 여자가 아닌가?
그런 여자를 기념해서 시상을 한다?
그러한 상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이 나라에는 딱 한사람밖에 없는 것같다. 친일행각으로 유명한 여자를 기념해서 주는 상이니 수상자도 친일행각으로 유명한 이완용의 직계 손자에게 주는 것이 가장 적당하지 않을까?
과거에 너무 연연해서는 안됩니다.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오기때문입니다.
그러나 과거를 잊어서도 안됩니다. 어제가 오늘의 초석이기때문입니다.
- 금란교회의 금란은 김활란의 '김'(쇠금)과 마지막의 '란'을 따와 만든 이름이다. 금란교회가 수구적 입장을 견지하는 이유도 김활란의 친일매국과 무관하지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