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도시부평 민중가요 아카이브 시리즈 <#3 손호준>

2022/08/08 07:11

민중가요 아카이브

노래는 알아도 작곡가는 몰랐던 꿈찾기, 손호준

문화도시부평과 함께하는 <민중가요 아카이브>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중가요 가수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인터뷰 운영은 국내 최대 민중가요 아카이브 사이트 PLSong.com의 운영자 ‘단풍’이 참여했다.

3회는 민중가요 밴드 <바람> 출신 손호준님이 참여해주셨다.

“노래는 태어난 순간 세상에 나가 자유로워야한다”고 생각했기에, 지금까지 얼굴 없는 가수로 남아있는 손호준을 인터뷰했다. 희미하게 지워져 버린 어릴 적 소중했던 꿈을 찾아 떠나자는 손호준은 인천에서 태어나 인하대 노래패 <출정>에서 민중가요 활동을 시작했다. 밴드 <바람>을 거쳐 지금은 <마장피>로 활동하면서 지금도 인천에서 살아가고 있는 민중가요 뮤지션이다. 대학 노래패 활동에서부터 전태일을 노래하던 밴드 <바람>, 그리고 세월호를 노래하는 <마장피>에 이르기까지 그의 음악적 행보는 민중가요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가 1996년 만든 대표곡 ‘꿈찾기’는 대학생 노래패들 사이에서 최근까지 불리고 있다.

Q. “꿈찾기”가 만들어진 이야기부터 부탁드립니다.

A. 제대가 8개월쯤 남은 군악대 병장 시절이었는데, ‘앞으로 뭘 해야 되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꿈들, 어렸을 때 꿈들, 그리고 지금부터의 꿈들 말이죠. 그러다보니 또 그 꿈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고민하다 만들어진 노래죠. 그래서 알려진 것처럼 신나는 노래는 아니었어. 느리고 듣다보면 조금 슬퍼지기도 하는 그런 노래였어요. 군 입대 전부터 학교 중앙노래패 출정에서 활동했는데, 평소 후배나 친구들에게 우리 생각을 표현하는 노래들을 만들고 불러야 한다고 말하곤 했었어요. 1997년 노래패 정기공연 준비과정에서 우리의 생각과 고민을 표현하는 창작곡으로 공연하자고 제안하면서 군에서 만들어뒀던 “꿈찾기”를 내놓게 됐어요. 정기공연 분위기에 맞춰 좀 신나게 편곡도 했고요. 그때 공연을 보러 온 서울지역대학생노래패협의회(서대노협) 친구들의 제안으로 서대노협 창작곡 발표회에서도 불렀고, 서대노협 음반인 서울하늘 3집에도 실렸고요. 2002년 전교조 서울지부 노래패 ‘해맑은 웃음을 위하여’ 선생님들이 다시 불러줘서 또 음반에 실리게 되었고요.

Q. 인하대 중앙노래패 출신이시군요. 노래패 활동으로 음악을 시작하시게 된 건가요?

A. 아니에요. 어렸을 때 옆집 사는 누나가 가르쳐주곤 했어요. 그 누나 어머님이 제가 피아노 좀 치는 것 같다고 저희 집에 말해서 피아노학원을 다니기도 했고요. 그땐 피아노학원 다니는 게 싫었거든요. 피아노학원 가방이 분홍색이어서 남자애들이 놀리기도 했고, 짬뽕이나 발야구 같이 놀고 싶은데, 학원에 가야하니까... 중학교 때 기타를 독학으로 배우기도 했는데, 고등학교 1학년 중퇴하고 검정고시 준비하면서 집에 있는 피아노로 작곡도 좀 해보고 그러면서 음악에 대해 알아가게 된 것 같아요. 그러는 와중에 인하대학교에 1994년에 입학하게 된 거죠. 출정(인하대 중앙노래패)은 어떤 목적의식이 있어서 들어간 건 아니었어요. 인하대 3학년이던 저희 형이 제 의지랑 상관없이 노래패로 보냈어요. 민중가요를 하는 동아리인지도 몰랐어요. 그치만, 제 성향하고 비슷하긴 했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도 노찾사 노래를 좋아하긴 했거든요. 그렇게 노래패 활동을 하게 된거에요.

Q. 원래 인천 출신이신거죠?

A. 네. 맞아요. 태어나서 지금까지 계속 인천에서 살았어요. 남인천우체국 근처에서 태어났고, 대학 때 부평으로 이사했죠. 산곡동 현대아파트에 살면서 밴드 바람을 하다가 음악을 접고, 직장생활하다 결혼도 하면서 그렇게 살고 있어요. 지금은 중구 영종도에 살고 있고요.

Q. 밴드 바람에 대해서도 말씀 부탁드려요.

A. 서대노협 창작곡 발표회 뒤풀이에서 서울대 메아리 출신 김병오 선배가 함께 활동하자고 제안을 했어요. 김병오 선배의 제안을 받아들여 전교조 서울지부 교사 노래패 ‘해맑은 웃음을 위하여’ 공연 세션으로 시작했어요. 김병오 선배의 제안으로 베이스는 김병오 선배, 기타는 김현석 씨, 드럼엔 김영직 씨, 그리고 건반을 제가 맡아서 밴드 바람을 결성하게 됐어요. 밴드 바람의 음악은 우리 생각을 표현하는 그런 작업이었어요. 사회적 의식보다 개인적 고민들을 풀어내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조금 모호한 색깔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긴 했어요. 하지만 의미를 알고 나면 좀 달라지죠. 예를 들면, 1집 엔딩 곡으로 있는 “오 나의 젊은 사람아”의 경우,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그냥 사랑 노래로 들리지만, 의미를 전해주면 아, 전태일 열사에 대한 노래구나 하는 거죠. 정확하게 누군가를 대변하면서 우리의 색깔을 드러냈으면 오히려 대중들한테도 이 사람들이 이런 노래를 부르는 거였구나 그랬을 텐데, 그 색깔을 보여주는 건 무대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오 나의 젊은 사람아

작사 김병오
작곡 김현석
세상은 슬픈거라고 그렇게 믿던 나에게
세상의 아름다움을 사랑을 보여준 그대
그대여 나의 꿈이여 내일로 트인 하늘 위
고요한 별빛의 노래 내 마음속에 흐르고
때론 비바람도 불겠지 그 길 위에도
아마 눈물도 흐를거야 언덕에 서면
하지만 기억해야지 그대가 전해준 노래
그대 일생을 모두 불태워 세상에 뿌렸던
밝은 진실과 참된 용기와 슬픈 사랑과
그대 가슴에 담겨져 있던 꿈 모두 이제는 내 가슴속에
우린 잊지 않으리 잠시 떠난 그대를 우린 잊지 않으리 잠시 떠난 너
오 나의 젊은 사람아 내일로 트인 하늘 위
아침이 밝아올 때 더욱더 투명한

Q. 그럼 밴드 바람 시절의 음악은 어떤 거죠?

A. 그냥 우리는 우리가 하고 싶은걸 그냥 음악으로 표현할 뿐이었어요. 밴드 바람이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걸 더 많이 시도했다면 밴드가 잘되고, 그런걸 떠나서 음악적 색깔이 사람들에게 밴드 바람의 노래는 이런 노래야 하고 알 수 있게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시도를 잘 안했던 것 같아요. 밴드 바람을 시작하면서 음악적으로 큰 꿈을 가지고 계획적으로 시작한 것도 아니었고, 우연치 않은 기회에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의 연장선과 딱 맞물리면서 한 번 해보자 이런 식이었던 거죠. 전 그냥 사람들이 노래를 들을 때, 의미를 알고 아, 이런 거였구나 하는 것이 어필하는 측면에서는 더 좋았던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이선희의 “그리운 나라”라는 노래를 보면 ‘진달래꽃 유채꽃 한 아름을 가슴에 품어보면 언제나 꿈을 꾸네’라고 시작해요. 이게 노래를 만든 송시현 씨의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진달래꽃과 유채꽃이 엄청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이건 북한을 상징하는 거다. 유채꽃은 한라산. 저는 그런 느낌을 받았는데 사람마다 다를 순 있겠죠. 현실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보다 그냥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잘 표현해 놓으면 된다. 굳이 우리가 ‘이렇게 돼야 돼’라고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던 거죠. 은유적으로 좀 많이 표현하고 싶었어요.

Q. 그러다 밴드 바람 활동을 중단하면서 음악도 중단하신 거죠?

A. 밴드 바람 활동을 정리한 것이 2005년 7월이었어요. 결혼도 하고 했으니까 생활을 위해 직장을 다녀야 해서 활동을 중단한 거죠. 하지만, 개인적으로 곡은 계속 썼어요. 생활하면서도 멜로디가 떠오를 때도 있고 그랬거든요. 예를 들면 세월호 사건 같은 경우, 그냥 사건을 딱 접하는 순간 먹먹해졌거든요. 저거 어떻게 해야지 이런 생각이 들고, 실시간 중계를 보면서 가슴이 너무 아팠어요. 이대로는 출근을 못하겠다 싶어서 피아노 뚜껑을 열고 모티브를 좀 만들어서 노래를 만들었어요. 그 노래가 “나를 잊지 말아요”에요. 아주 퀄리티 있진 않지만, 조금씩 만들어 놓았던 나만의 음악세계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유튜브에 올렸어요. 그냥 사람들이 들었을 때 위로가 되면 더 좋고, 힘이 되면 더 좋은 그런 것들이죠.

Q. 직장을 그만 두셨다고 들었어요.

A. 많이 아팠어요. 4년 전 어느 날 잠에서 일어나려는데 몸이 새우처럼 휘면서 경련이 일어나고,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엄청난 고통이 왔어요. 병원에 가보니 모든 수치가 정상인데 당만 너무 높대요. 아마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는 것 같으니 쉬어야 한대요. 내 몸이 아프다는 신호를 보내는 거였죠. 이걸 무시하면 돌연사할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내가 써놨던 것들을 언젠가 좀 정리를 해줘야지 했는데, 이러다 정리도 못하고 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음악들은 제가 지금까지 해왔던 음악과 전혀 다른 색깔이나 정신세계에 대한 것들이 많아요.

Q. 최근에는 ‘마장피’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시고 계신 거죠? ‘마장피’가 무슨 뜻인가요?

A. 그냥 ‘마장’과 ‘피플’의 합성어에요. 마장은 말들이 모여 있는 곳, 경마장 할 때 그 마장이에요. 예전에 멜로디는 계속 나오는데 가사가 잘 안 나와서 술을 한 잔 하는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왜 옛날 사람들이나 시인들은 호가 있는 걸까? 이름이 달라지면 내가 좀 달라질 수 있을까? 웨인이 배트맨으로 사는 것처럼 다른 이름으로 살아가볼까 할 때 생각났던 게 ‘마장’이었어요. 인디언 부족에서 쫓겨났던 한 남자 주인공이 나중에 돌아와서 히어로가 되는 그런 영화를 어렸을 때 본 적이 있어요. 주인공이 타고 온 검정색 말이 백마하고 사랑에 빠지는 것 같은 그런 장면이 있었어요. 그 모습이 너무 인상 깊었는지, 다른 이름을 생각했을 때 ‘마장’이라는 말이 딱 떠오르더라고요. 저렇게 순수하게 열정적이고 아름다우면 좋겠다. 그런 마음으로 ‘마장 손호준’으로 했어요. 그러다 말들이 저한테 보여줬던 그 모습처럼 사람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싶어서 피플과 합성해서 ‘마장피’로 정한 거죠.

Q. 최근에도 파업 현장이나 투쟁 현장에서 공연을 하시기도 해요. 앞으로 어떤 활동들을 해 나가실 계획인가요?

A. 제 노래가 힘이 될 수 있다면, 그런 자리에서 내가 노래를 부르는 것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말은 잘 못하지만 그래도 그게 힘이 된다면 그런 것이 연대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활동 자체만으로 제가 규정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밴드 바람 속의 제 음악이 있고, 일상생활에서 하는 제 음악이 또 있고 그런 거죠. 유튜브를 시작하고 나서부터 오히려 저를 알게 됐다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전까지 보여주는 것만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제가 파업현장에서 노래한다고 하면 그냥 저 친구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구나 이 정도면 좋은데, 또 어떤 사람들은 저건 빨갱이야 할 거. 뭐 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면 그런 거구, 저는 그냥 함께한다는 것에 만족해요. 아마 직업이었다면 만족 못했을 수도 있고요.

인터뷰, 사진, 정리 : 단풍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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