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성경은 읽지 않고 풀이본만 읽었었는데요, 역시 성경이란 책은 읽을 게 못된다는 생각도 듭니다. 한편 청소년인 저는 책을 읽고 '근친상간'등의 내용을 읽고 '어떻게 이런 책이 많이 팔릴 수 있지?'라는 의문을 품은 적도 있었습니다.
한편, 전 바이블이 한참 거짓된 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만 보자면,
1일 빛과 어둠
2일 하늘
3일 바다, 풀, 채소, 과일
4일 태양, 달, 별
5일 물고기 , 새
6일 동물, 사람
이렇게 만드는데요, 태양과 달과 별이 4일에 왜 가있는지부터 의문점이란 말입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이 책은 '사기'다라고밖에 해석되지 않는군요.. 그게 제가 무신론자인 이유이기도 하구요^^;;
"아무런 논리도 증거도 없이 마치 자신이 피해자인양,
=> 이 말이 아무런 논리도 증거도 없는 말이죠? 아닌가요?" : "과객"이라는 사람이 도아님의 성경에 관한 "논리적" 비판에 대해 아무런 논리적 대응 없이 무턱대고 "증오"라는 단어를 써가면서 비난한 것에 대한 얘기입니다. 그냥 "사실"에 대한 서술이지 논리가 들어갈 필요가 있는지 싶습니다.
"짧은 글 하나로 실제로는 교묘히 인신공격하는 댓글을 보고 있자니 짜증이 밀려오는군요.
=> 님이 글의 더 그렇다는 것은 잘 아시죠?"
네, 과객이라는 사람의 인신공격성 댓글에 대해 "고고한 척하며 교묘히 인신공격하지지 말고 자신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면 논리적으로 대응해보라"는 인신 공격성 댓글입니다.
링크로 달아 둔 반기독교시민운동연합에서 쓴 글만 읽어 봐도 성경의 폭력성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또 [url=http://offree.net/entry/Replay-on-Gangster-Yahweh]이 글[/url]을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야훼의 폭력성(성경)은 신부님도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개신교의 행태는 따로 이야기할 필요가 없는 부분입니다. 워낙 개판이라서...
참고로 [url=http://offree.net/entry/George-Dennis-Carlin]나는 개신교가 싫다[/url]는 글의 동영상을 보시면 아마 속이 시원해 지실 것입니다. 저도 자주 봅니다. 기분전환용으로...
아이들이 이 블로그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때문에 그렇게 당신이 기독교를 증오하게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알고 싶지도 않음) 당신아이들도 당신처럼 자라는 것을 바라진 않아요.세상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 아이들이 되었으면 좋겠네요.(진심)
컴퓨터에 대한 좋은 글이 있다고 해서 찾아오곤 하지만, 당신의 정신세계가 좋다고는 말을 못하겠군요. 이제 즐겨찾기에서 지워야 겠네요.
저질 블로그. 인정합니다.
한때 볼테르와 연관된 그 경구를 제 메일 서명으로 썼던 1인으로서 한마디 하자면,
"저 역시 당신들 - 기독교인들 - 이, 단지 기독교를 종교로 갖고 있다는 이유로 탄압받는다면, 당신들의 종교의 자유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입니다. 자, 그럼, 탄압받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어디 있습니까?"
조금 아쉬운 부분이 보입니다.
마지막 부분에 인용한 내용은...
굳이 비유하자면, 이명박이 시장가서 목도리 줬다고 이명박을 '서민을 생각하는 마음 따뜻한 대통령이다' 라고 말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mb 가 그렇게 한 정황, 그가 전후에 해 왔던 행태, 보도자인 언론.. 등등을 고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경(구약)은 노예제가 당연시되며, 신화가 아직 보잘것 없던 과학보다 더 현실에 가깝던 그런 시대의 이야기 입니다.
또 성경 자체가 많은 비유와 은유를 가지고 있다 들었습니다.
성경의 저 부분을 들어 굳이 장애인의 인권과 연관시키기엔 무리가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단체의 주장)
기독교人에 대한 호 불호를 떠나, '종교' 경전을 가지고 저런 논리를 펴는것은 맞지 않아 보입니다.
불교 경전을 가지고 비과학적이네 어쩌네 하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것은, 불교人에 대한 인식 때문이지(개신교人에 대치되는), 불교 경전 때문은 아닐테니까요.
p.s. '보수 이지만 한나라당은 싫어한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는 분은, 이 댓글은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 주세요.
'무식하고 무례한' (기독교)人 들은 싫어하지만, 기독교를 특별히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글 서두에 썼듯이 저는 열국지라는 책을 무척 좋아합니다. 당시에는 근친 상간이 지금처럼 문제가되는 시대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책을 청소년들에게 권하지 않는 것은 현재는 근친상간이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즉, 당시가 그런 시대였다는 것을 알고 읽는 사람에게는 별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권하지 않는 것입니다. 위의 문장도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근본적으로 성경에 얼마나 많은 폭력적인 묘사가 있는지를 예시하는 것일뿐입니다. 그래서 금서가 아니라 19금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고요.
구약은 경전이 아닙니다. 그 내용을 보면 절대 경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특히 [url=http://offree.net/entry/Antichrist]성경이 사실이면 고인돌 만화는 다큐다!!![/url]을 읽어 보면 아시겠지만 유대인에게 구약은 [b]"사막의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아주 멋진 옛날이야기야"에 불과[/b]하다고 합니다. 저 역시 이 의견에 동의하고요.
마지막으로 불교경전은 상당히 과학적입니다. 아울러 불교경전을 현대 물리학으로 해석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세상의 모든 진리는 변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불교경전의 해석 역시 현대 과학으로 하고 있습니다. 불교 경전이 비과학적이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과는 다른 문제인 것 같습니다.
또 성경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성경이 비과학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폭력적이기 때문이죠. 사실 창조론부터가 성경은 과학이 아닙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성경이 과학적이라고 주장하죠. 아주 모순되지만.
구약과 신약은 구별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유대교 또 하나는 기독교 경전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흔히 '개독'이라 일컫는 미국이나 남한의 주류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라 유대교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유대교에서도 '막가파'라 볼 수 있는 '초정통' 유대교파 카(차)바드 루바비치 입니다. (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624 여기 마지막 부분 참조) 신약은 구약(유대교)의 교리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인류 해방의 고전으로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트랙백을 걸 수가 없게 되어서 부득이하게 댓글로 남깁니다. 트랙백을 걸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주셨으면 합니다. 적어도 홈페이지 상단에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 의견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말할 자유를 위해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라는 볼테르의 말을 스스로 지키고자 노력하신다고 믿는다면 말입니다. 심지어 살인자라 할지라도 그에게 법정에서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답니다. 안티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신다면 반대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스스로를 변호할 기회를 주셔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많은 [근친상간, 강간, 동성애]에 대한 적나라한 표현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역사적 사실'들에 기초하여 기록된 역사적인 성격이 다분한 책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성경에 기록되어져 있는 '음란한 성행위'들은 당시에 가나안 인들의 생활 풍습을 드러내주는 좋은 지표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음은 제가 앞으로 올리게 될 글의 원고의 일부분을 잠시 발췌해 온 것입니다.
『레위기 18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살붙이'와 함께 성관계를 갖지 말 것을 지시하고 있다. [어머니, 아버지나 어머니의 딸, 손녀나 외손녀, 이모나 고모나 숙모, 며느리와 처제] 등 매우 노골적이고 구체적인 대상까지 명시해가면서 이런 '근친상간'을 금하고 있는 것은 매우 이색적인 표현이다. 달리 말하면, 당시 가나안 사람들이 이렇듯 '근친상간'의 나락에 떨어져 있었다는 반증이기도하다. 이밖에 22절에서는 '동성애'를, 23절에서는 '수간'(동물과의 성교)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가히 '성적 타락의 결정판'이라고 불러도 좋을만큼의 퇴폐적인 사회가 당시 가나안에서 벌어지고 있었음을 일련의 구절들이 증언하고 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인들의 이런 문란한 행습들을 이스라엘이 본받을까 두려워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대변하는 거룩한 민족으로서의 삶을 살아내야만 했으니까요. 하지만 훗날에 가서는 이스라엘 역시 가나안의 음란한 행위들을 따라 했고,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그렇게 소돔과 고모라의 음행을 쫓아 살았고, 삼손 역시 블레셋 여인들을 가까이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의 행위를 결코 지지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행위를 '악'한 것으로 묘사합니다. 다윗이 간음했을 때에도 그가 회개하지 않았다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한 논리로 "성경에 음란한 내용들이 포함됐으니 금서로 지정하자"라는 생각은 조금 모자란 생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성경은 위의 내용들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적인 입장에서 음란한 행위들을 혐오하는 입장을 지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지지하느냐의 문제는 싹 무시해버리고 오로지 성경에 언급되어 있다는 이유로 '금서'로 지정하자는 주장은 형평성에 어긋나는 행위라 사료되옵니다.
또한 그런 단순 무식한 논리로 따지자면 오늘날 우리 눈앞에 비춰지는 TV와 수많은 책들을 먼저 '금지'하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책들은 '금서'로 지정되어야 하며,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영화나 대부분의 막장 드라마(요즘 불륜 드라마가 인기 상승이라죠)들이 먼저 제거되어야 하겠죠. 하지만 다른 많은 책들과 방송매체는 무시해버린 채 유달리 '성경'에 있어서만 이런 '엄격한 성윤리적 잣대'를 들이대는 이유는 뭡니까? 성경에 대한 권위에 대한 의심과 이런 엄격한 검증의 요구들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되나요?
버나드 램은 "천 번도 넘게 성경의 죽음을 애도하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고 장래 절차가 결정되었으며 묘비에 비문이 세겨졌고 조사가 낭독되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그 시체는 꼼짝 않고 누워 있은 적이 없다. 다른 어떤 책도 그렇게 져며지고 베이지고 채로 걸려지고 샅샅이 조사되고 중상 모략된 적이 없다. 철학이나 종교나 심리학의 어떤 책이, 또는 고전 문학이나 현대 문학의 어떤 책이 성경만큼 그렇게 집중적인 공격을 받은 적이 있었던가? 그런 독설과 그런 의심을? 그렇게 철저하고 그렇게 해박한 지식을 통해? 모든 장과 모든 절과 모든 교리에 대해? 그러나 성경은 여전히 수백만 명의 사랑을 받고 있고, 수백만 명에게 읽혀지고 있으며, 수백만 명에 의해 연구되고 있다. 그것은 여전히 문학 세계에서 가장 많이 출판되고 가장 많이 읽히는 책으로 남아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에 대한 안티들의 공격은 역사속에서 수도 없이 반복되었습니다. 성경의 권위를 의심하고, 그 진정성을 무시하며,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성경의 확산을 막아보려고 했습니다. 위의 논증 역시도 그런 '성경에 대한 음해'를 위한 억지 논리라고 보여지는군요.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그런 시도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책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성경은 전 세계 언어의 ⅓이 넘는 언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세계 각 종족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6,500여 개의 종류라고 하는데 그런 세계 언어의 무려 ⅓에 해당하는 무려 2,454개 언어로 성경이 번역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철학적 신학적 통찰력을 얻어 위대한 위인의 반열에 올랐던 수많은 역사속 인물들이 있어 왔습니다. 그런데 금서로 지정하겠다니요.
확신하는데,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책을 금서로 지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성경에 대한 질투심으로 인한 안티들의 장난질로 비추어질뿐만 아니라, 전세계인들의 비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안티들을 자극하려면 위와 같은 '자극적인' 주제(떡밥)들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듯 성경의 문맥적인 의미(즉 하나님께서 성적 타락에 진노하시는)를 깨끗하게 무시한 채, '성적인 표현'들이 있는 구절들만 오려 붙이기하듯 모아놓고 "봐라, 기독교인들의 경전인 성경은 음란서적에 불과하다"라고 선전하는 모습은 '색안경'을 썼다고밖에 말을 못하겠네요. 그런식으로 필요한 구절들만을 채집해서 하나의 커다란 '대주제'로 엮어낸다면 이 세상에 '금서'로 지정 받지 않을 책은 없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4절에서 저자는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라고 말합니다. 이 밖에도 성경만큼 계속적으로 '성적 타락'을 경고하고 있는 책도 없습니다. 이런 성경을 '음란물'로 판정하는 것은 안티들의 명백한 잘못이며, 실수이자 심각한 '아이러니'(왜이러니? ㅡ_ㅡ;;)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금서' 지정에 대해 일부 몰지각한 안티 그리스도인들은 자제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님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느냐는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글 하나를 쓰고 그 글로 트랙백 10여개를 보내는 것은 분명히 옳지않은 일입니다. 기독교인들의 특징 중 하나는 자신들의 잘못을 전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님의 트랙백을 삭제했습니다. 이것이 제가한 전부입니다. 따라서 트랙백을 왜 보낼 수 없는 지는 저도 모릅니다. 휴지통에 갔을 수 있지만 굳이 살릴 생각은 없습니다.
[QUOTE]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 의견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말할 자유를 위해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라는 볼테르의 말을 스스로 지키고자 노력하신다고 믿는다면 말입니다. [/QUOTE]
기독경을 아전인수로 해석하는 것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말까지 아전인수로 해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말은 당신의 표현의 자유를 위해 싸우겠다는 뜻이지 개독교가 똥 싸지르고 다니는 것을 위해 싸우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목적이 정당하려면 그 수단도 정당해야 합니다. 당신은 이런 가장 기본적인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당신의 트랙백을 삭제한 것입니다.
또 개독의 논리를 일반인에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개독의 논리는 개독들에게 하시면 됩니다. 일반인과 이야기하고 싶다면 개독의 논리가 아닌 일반인의 논리로 접근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개독에게 기독경이 성경일지 모르지만 일반인에게는 쓰레기 만도 못한 책입니다. 2000천년 전에 쓰여진 아무런 가치없는 소설을 믿는 당신이 불쌍하다는 생각만 드는군요. 물론 그것을 성경이라고 생하각하면 최소한 그 성경의 가르침 정도는 따르시기 바랍니다. 물론 개독에게 이것을 바라는 것 자체가 환상이겠지만요.
제가 올린 하나의 글을 10여개의 트랙백으로 보냈다니요. 왜 이렇게 부풀려서 말씀하십니까? 이 자리에서 분명히 단언하건데, 저는 고작해야 한 글에 3-4개, 적게는 1-2개 정도의 트랙백을 보냈습니다. 그것도 '종교' 카테고리의 글들 거의 전부가 '반기독교'적인 성향을 보이는 내용인지라 부득이하게 그렇게 다중의 트랙백을 걸었던 것 뿐입니다. 그러니 3-4개를 10여개라고 '뻥튀기'하지 마십시오.
[신정론] 악과 고통의 문제 앞에서 침묵으로 일관하는 하나님(신)은 과연 선한가?라는 저의 글을 두고서 도아 님은 3개의 글을 트랙백 하셨더군요.
1) 법정 스님이 지옥에 간 까닭 2) 야훼의 폭력성에 대한 신부님의 답변 3) 죽으면 제발 지옥에 가게해주세요
위의 3개의 글과 제가 쓴 글의 주제인 '악과 고통'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을지라도 간접적으로는(우회적으로는) 상관성이 있는 글들이라 여겨 그대로 두었다는 사실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부디 도아님께서도 '글 대 글'의 상관성에 대한 규정을 소극적으로라도 적용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오해가 있다면 풀어야 마땅할 것이고, 오류가 있었다면 사과해야 마땅한 것 아니겠습니까? 나의 글을 지적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매우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란 모름지기 실수를 통해서 딛고 일어나 보다 더 고상한 존재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니까요.
제가 님의 글에 트랙백을 걸었던 이유는 이곳에 게시되어 있는 수많은 반기독교적인 글들에 반대하여 기독교적 입장을 정당하게 '변호'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걸 막자고 한다면 그것은 님께서 그렇게 싫어하시는 현 정권의 일방적(억압적 + 비타협적 + 배타적) 의사소통과 다를바가 없어 보입니다. '사해'가 왜 죽은 바다인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들어오고 나가기를 반복하는 입·출력 체계는 굳이 바닷물의 자연적인 흐름에 있어서만 국한되지 않으며, 종교적 대화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입장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정당한 반론을 거부한 채 '나의 논리'만 내세우시겠다면 '우물 안의 개구리'식의 편협한 논리를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싫다고 기독교인과의 대화조차도 막으시렵니까? 입을 막고 대화를 차단시키면 그건 독재가 아닐까요? 제가 알기론 안티들이 기독교인들의 맹목적인 믿음에 대해 진저리를 친다고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 지금 님의 태도는 안티들이 그렇게 혐오하는 '맹목적인 믿음'(무신론에 대한 또한 안티 기독교에 대한)을 고수하려고 하는 듯 보이네요. 님의 입맛에 맞는 일방적인 소통만을 하시겠다고요? 그럼 님들도 맹목적인 믿음을 고수하는 그리스도인들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그럼 기독교를 비판하는 일을 그만 그쳐주세요. 의사소통이 없고 대화를 단절하며 그렇게 내 세상에 바리게이트를 쳐놓고 기독교인들은 개독교인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말은 들을 가치도 없다고 치부하려거든 님은 그런 기독교를 비판할 자격이 더 이상 없습니다.
인터넷에서 가장 정확하고도 안전하며 예의적이고 올바른 경로를 통해서 '트랙백'을 건 것이 못마땅하시다면 블로그는 무엇하라고 있는거죠? 그렇다면 당신들이 혐오하는 방식대로, 피켓카드를 들고 머리에 띠를 두르고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면서 거리를 활보라도 해야 하나요? 그게 싫고, 정당한 방법과 절차를 따라 논리와 체계를 동반한 글도 싫다면 기독교인들의 '귀와 입'을 막자는 처사가 아닐런지요? 그냥 "그리스도인은 닥치고 엿먹어!"라는 식인가요? 이런 말까지는 하기 싫었지만... 안티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누가 더 공격적이고 상대방을 비난한다고 보십니까? 그리스도인이라구요? 천만에요. 한가지 예만 들어드리죠. 안티 그리스도인들은 왜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부르나요? 굳이 [犬 = 개견]자에 기독교를 갖다 붙여서 비난해야하는 이유라도 있는 건가요?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은 인터넷상에서 안티 그리스도인들에게 '개'라는 용어를 갖다 붙이며 인신공격을 일삼진 않습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안티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두고서 '개독교'니 뭐니 자극적인 욕을 일삼는 모습은 많이 보았습니다. 또한 기독교 교리에 있어서도 언제나 안티 기독교인들은 일방적으로 '공격'하고 그리스도인들은 그저 당하거나 소극적인 '방어'만을 일삼아 왔습니다.
'아전인수'로 해석하지 말라는 님께서는 문맥에 따른 저자의 의도는 무시해 버린채 님에게 유리한 '구절'들만 쭉 뽑아서리 성경을 금서로 지정해야 한다는 논리에 다다르셨습니까? 아차, 님께서 대한민국 공식 안티 기독교 단체인 'X-Bible'에서 많은 통찰력을 얻고 있었다는 사실을 깜빡 했군요. 그렇다고 치더라도, "나무를 보면서 숲을 보지 못하는" 님의 '균형성'에 대한 결여를 지적한 것 뿐인데, 왜 그걸보고 '개독의 논리'라고 펌하하시나요?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고 자신의 논리는 '일반인의 논리'이고, 저의 논리는 '개독의 논리'일 뿐인가요? 지극히 자의적인 분석이자, 객관성이 결여되었군요. 님의 논리는 '일반인의 논리'가 아니라 '독재자의 논리'겠죠. 그럼 지금부터 님께서 성경에의 한쪽면(폭력성에 대한 구절들)을 채집해서 "성경은 음란문서"라는 결론에 도달하셨으니, 저도 님의 논리를 따라 반박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성경에 나오는 [사랑,선,자비,행복,기쁨,구제,도움,친절,감사] 등의 단어의 수를 조사해 보겠습니다. 순전히 님의 논리에 따른 해석이니 '개독의 논리'니 '아전인수'니라고 이의 없으시겠죠? 위의 자료는 베들레헴과 Bibleworks 7 그리고 Biblerex 7.0 등의 성경 프로그램을 통한 [히브리어-헬라어] 원어 검색을 통한 분석입니다.
Ⅰ. '사랑' ― 총773회(추정치)
1) 구약 ― 총 417회
(1) 헨: 69회
헨(명남)은 하난(@n"j; , 2603: 호의, 은혜를 베풀다, 자비하다)에서 유래했으며, '호의, 은혜, 은총, 매력, 아름다움'을 의미한다.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의 총애를 받다' find favor in the eyes of라는 어구로 나오는 43회의 용례와 '주다' give라는 동사와 함께 나오는 7회의 용례, 그리고 '얻다' obtain라는 동사와 함께 나오는 3회의 용례(에 2:15, 에 2:17, 에 5:2)를 포함하여 69회 나온다.
(2) 아헤브: 200회 이상
동사 아헤브는 '사랑하다, 좋아하다'를 의미하며, 그 의미의 강도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 대한 무한한 애정에서부터 게으른 대식가의 육체적인 식욕에까지 이른다. 이 동사는 칼 어간의 모든 법(mood)과 니팔 분사형, 그리고 피엘 분사형으로 나온다. 16회의 피엘형은 강의적인 것이 아니라 대개 부정한 '연인' lover을 가리킨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00회 이상 나온다.
(3) 아하바: 14회
아하바(명여)는 아헤브(bhea; , 157: 사랑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사랑' love를 의미한다.
(4) 도드: 60회
도드(명남)는 '가장 사랑하는 자 beloved, 사랑 love, 아저씨, (외)삼촌 uncle'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60회 나온다.
(5) 에게브: 2회
에게브(명남)는 아가브(bg'[; , 5689)에서 유래했으며, '(감각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회 나온다.
(6) 라야: 10회
라야(명여)는 레이(y[ire , 7472)에서 유래했으며, '동료, 동무'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0회 나오며, '사랑하는 신부'(아 1:9, 아 1:15, 아 2:2, 아 2:10, 아 2:13, 아 4:1, 아 4:7, 아 5:2, 아 6:4), '시중드는 처녀'(삿 11:37)에 대해 사용되었다.
(7) 아하바: 14회 이상
아하바(명여)는 아헤브(bhea; , 157: 사랑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사랑' love를 의미한다.
(8) 예디드: 9회
예디드(형용사)는 사용되지 않은 어근 야다드(dd'y:: 사랑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사랑하는 be loved, 사랑스러운 lovely'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9회 나온다.
(9) 아흐마드: 14회
아흐마드(명남)는 하마드(dm'j; , 2530: 갈망하다, 즐거워 하다)에서 유래했으며, '바람, 소원, 바라는 것, 즐거운 일(것)'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4회 나온다.
(10) 하바브: 1회
하바브(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사랑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신 33:3에 한번 나온다
(11) 하샤크: 8회
하샤크(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에 애착하다, 사랑하다'를 의미한다. 하샤크는 어떤 것 혹은 어떤 사람에게 부착되는 것을 강조한다: 감정의 경우(성경의 용례는 이것에만 한정되어 있다)에 이것은 이미 대상에게 얽매인 사랑이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8회 나오며, 칼형으로만 사용되었다
(12) 예디두트: 1회
예디두트(형용사)는 사용되지 않은 어근 야다드(dd'y:: 사랑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사랑하는, 사랑스러운'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렘 12:7에서 한번 나온다
(13) 약키르: 1회
약키르(형용사)는 야카르(rq'y: , 3365)에서 유래했으며, (a) '매우, 귀중한, 값진', (b) '귀여운, 친애하는'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렘 31:20에서 한번 나오며, '귀여운'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14) 라함: 14회
라함(동사)는 라함(!j'r' , 7356)에서 유래했으며, '깊이 사랑하다, 긍휼히 여기다, 자비심을 갖다, 자비롭다'를 의미한다. 이 어근은 '자연적인' 유대에 뿌리를 둔 깊은 사랑(대개 윗사람이 아래 사람에 대해 갖는 사랑)을 가리킨다. 이 어근의 피엘형은 우리가 동정, 연민, 자비 등 여러가지로 알고 있는 깊은 내적 감정에 대해 사용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47회 나온다.
2) 신약 ― 총 356개
(1) 아가페: 116회
명사 아가페는 신약성경에서 116회 나오며, '사랑, 애정, 호의, 자비심'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2) 아가페토스: 60회
형용사 아가페토스는 신약성경에서 약 60회 나오며, '사랑하는, 친애하는, 좋아하는'을 나타낸다.
(3) 아가파오: 143회
동사 아가파오는 신약성경에서 143회 나오며, 요한의 기록(요한복음에 37회, 요한1-3서에 31회, 요한계시록에 4회)에 가장 자주 나타난다.
(4) 프로스필레스: 1회
형용사 프로스필레스는 신약성경에서 빌 4:8에 한번 나온다.
(5) 필레오: 25회
좋아하다 be fond of, 사랑하다 love. 동사 필레오는 신약성경에서 25회 나온다.
(6) 필라델피아: 6회
필라델피아는 신약성경에서 6회 나오며,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형제들인 서로를 향하여 품는 사랑'을 가리킨다.
(7) 필라델포스: 1회
형제를 사랑하는 loving one's brothe. 형용사 필라델포스는 신약성경에서 벧전 3:8에 한번 나온다.
(8) 필란드로스: 1회
자기 남편을 사랑하는. 형용사 필란드로스는 신약성경에서 딛 2:4에 한번 나온다.
(9) 필란드로피아: 2회
인류애, 친절. 필란드로피아는 신약성경에서 2회 사도행전과 디도서에만 사용되었다.
(10) 필란드로포스: 1회
자비롭게, 친절하게. 팔란드로포스는 신약성경에서 행 27:3에 한번 나온다.
(11) 떨거지 단어들: 너무 많아서 셀 수가 없음
찾기 귀찮아서 생략...
■ 이상 '사랑'이라는 단어를 [히브리어, 헬라어] 성경 원어로 검색만 해보아도 얼추 773개 정도의 단어가 검색되었습니다. 여기에 비슷한 의미나 뉘앙스나 문맥에 따라 '사랑'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어 여기에 추가될 단어들은 더 늘어날 수 있습니다(그런 의미까지 다 포함하자면 1,000개는 훌쩍 넘어가겠지요). 이밖에 다른 [자비,행복,선,감사,친절,은혜,복,기쁨,소망,도움]등을 검색하기에는 매우 번거로운 작업이므로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귀차니즘의 압박이 슬슬 밀려옵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단어들도 성경에 매우 빈번하게 사용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친절, 인자, 자비, 자애" 등의 복합적인 의미로 사용된 '헤세드'라는 단어만해도 구약에서만 약 240회 이상 나오니, 여기에 다른 광의적인 의미들까지 추가한다면 그 횟수는 더욱 늘어날 것이 뻔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꽉 쥐어 짜면(마치 빨랫감을 짜듯이) '사랑'이라는 한 방울의 눈물이 떨어진다고들 말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성경에는 [사랑,자비,행복,선,감사,친절,은혜,복,기쁨,소망,도움] 등의 '인류애'적인 뉘앙스를 가진 좋은 단어들이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님께서 언급했던 [진멸,전멸,노략,칼날,죽이다]라는 단어에 비할바가 못됩니다. 그리고 전에도 언급드렸듯이 님께서 말씀하신 단어들은 그 '문맥'에 따라서 의미가 매우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서, '칼날'이라는 단어는 '무기'로서 언급되기도 하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요리도구'로서 요리할 때나 또는 '짐승'을 제사하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되기도 할 것입니다. 또한 '죽이다'라는 단어 역시, 적과의 전쟁을 언급하면서 많이 사용되었을 것이 뻔합니다. 세상에 어느 역사가가 인류 역사에 있어서 문화적인 유산이 되는 고대의 '전쟁 기사'들을 언급하면서 "죽이다"라는 단어를 빼놓고 설명하겠습니까? 그것은 '앙꼬 없는 찜빵'에 불과합니다.
이상 님의 논리를 따라해 보았는데, 이래도 저의 논리를 '개독의 논리'라고 펌하하시겠습니까? 님의 말씀처럼 제 논리가 '개독'의 고유 산물이라면, 도아님 역시 본인이 그렇게 비난하시는 '개독의 논리'를 펼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양날의 검'인 셈이지요. 님께서 사용하셨던 '개독의 논리'라는 말의 의미는 '비이성적인 논리'라는 의미로 사용하시는 듯 한데, 지극히 편파적이고 위험천만한 발상이십니다. 기독교인들이 그런 성향에 치우쳐있기는 하지만 결코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실제로 인류 역사상 거대한 발자취를 남겼던 훌륭한 위인들 대부분이 '기독교'의 선한 영향력을 받았습니다. 물론 그 중에는 대다수의 '지성인'들이 포함되어 있고요. 우리는 이들을 두고 아직도 '위대한 사상가'라고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신과 다른 논리를 펼친다는 이유(선입견에 의거해서)로 상대방의 논리를 '개독의 논리'로 깔아뭉개시면서, 스스로는 '지성인'으로서 자처하시다니... '이중인격자'의 작태가 아닙니까? 블레이즈 파스칼은 언젠가 "몸이 굽으니 그림자도 굽다. 어찌 그림자 굽은 것을 한탄할 것인가?"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혹시 님께서 기독교인들에게 가지고 계신 '선입견'(기독교인들은 개독교인이라는) 때문에, 그들을 왜곡시켜서 해석하고 계시지는 않으신지요. 기독교인에 대한 본인의 의식이 이미 굽어 있기에, 기독교가 개독교로밖에 안보인다는 사실을 정녕 모르고 계십니까? 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세상의 색이 제대로 보일리가 없지 않습니까? 이미 님께서 '개독교'라는 기독교에 대해 모여져 있는 부정적인 인상들을 제거해버리지 않으신다면, 평생 '개독까'로서 살아가실 듯 보입니다.
[QUOTE]제가 올린 하나의 글을 10여개의 트랙백으로 보냈다니요. 왜 이렇게 부풀려서 말씀하십니까? 이 자리에서 분명히 단언하건데, 저는 고작해야 한 글에 3-4개, 적게는 1-2개 정도의 트랙백을 보냈습니다. 그것도 '종교' 카테고리의 글들 거의 전부가 '반기독교'적인 성향을 보이는 내용인지라 부득이하게 그렇게 다중의 트랙백을 걸었던 것 뿐입니다. 그러니 3-4개를 10여개라고 '뻥튀기'하지 마십시오. [/QUOTE]
뻥튀기 한적 없습니다. 예전에는 서너개씩 보내더니 ... 갑자기 서너개를 보낸 뒤 며칠 뒤 똑 같은 글로 또 다시 서너개를 보냈더군요. 그래서 이때 삭제했습니다. 참고로 글 하나 쓰고 한 블로그에 트랙백 서너개씩 보다는 것도 민폐입니다. 그러나 역시 민폐인줄 모르겠죠?
[QUOTE]평생 '개독까'로서 살아가실 듯 보입니다.[/QUOTE]
스스로 개독이라는 것을 인정하시는군요. 다행입니다. 스스로 인정이라도해서.. 다만 개독으로 사는 것 보다는 나은 삶이죠. 개독님... 또 이런 긴 댓글을 달지는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민폐입니다. 정 님의 글을 읽도록 하고 싶으면 님의 글에 대한 링크를 달면 되죠. 개독은 지들이 하는 행동이 민폐라는 것 조차 모릅니다. 그러면서 2000년전에 쓰여진 사기 소설만 이야기하죠. 그래서 개독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지만요.
참고로 저는 님같은 사람이 없는 지옥이 더 좋습니다. 알겠습니까? 개독들이 이런 식으로 문을 벌컹 벌컹 열고 들어와 싸지르는 것도 신물이 났고요. 다만 모르겠죠? 이것이 왜 민폐인지... 마지막으로
제가 이 곳에 장문의 글을 남기는 이유는 도아님의 '글'이 성경에 대한 균형잡힌 시각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글은 기본적으로 <아이들에게 해로운 책>에 대한 도아님의 글에 대한 반론입니다. 그러나 도아님께서는 저의 논리적인 댓글을 그저 한낱 '예의없는 행위'로 간주하고 계십니다. 왜죠? 왜 저의 글에 논리적인 반박이 아니라 '개독의 논리는 개독끼리'라는 원색적인 비난만 계속 하고 계십니까? 즉, 이 글의 주제에 대한 문제는 제쳐놓고 '개독'이라고 펌하하며, 장문의 글이라고 '무식하다'라고 깔보고, '예의없다'고 비난합니까? 저는 그런 원색적인 '비난질'하려고 이곳에 글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님의 글에 묻어있는 오류'들을 바로잡고 싶은 것입니다. 상대방을 비난하기전에 본인의 의사를 논리적으로 말씀해주신다면 좋겠어요.
지금 저의 심정은 마치 일본이 '독도'를 자기내들 땅이라고 우길 때, 한국인들 마음에서 공통적인 분노와 독도가 한국 땅임을 온전하게 '반박'하고자 하는 마음과 같습니다. 적어도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는 명백히 해야 하잖아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하나의 글을 그렇게 10여개씩 공수한 적은 없습니다. 잘 살펴보십시오. 제가 작성한 여러개의 글을 도아님의 여러개의 '반 기독교적'인 성향의 글에 '적합하다' 싶은 곳에 트랙백을 하나의 글당 1-2개 내지, 최고로 많게는 3-4개까지 걸었습니다. 도아님은 그 모든 것을 하나로 통합하여(즉 제가 트랙백 걸어놓은 모든 글들을 총망라하여 계산), 전체적으로 10개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그건 오해의 소지가 있어 보입니다. 정확히 말해드리겠습니다.
♠ 옳은길의 주장
옳은길의 글 1개 → [관련된 주제당 1-4개까지의 트랙백] → 웹 2.0 시대의 정당한 의사소통 방법 준수
♣ 도아님의 주장
옳은길의 글 3-4개씩(전체로서) → [관련된 주제고 뭐고 없이 무조건 10여개의 트랙백 공수 → 삭제조치] → 옳은길 "언론탄압"이라고 항변
오해의 소지가 있었기에, 또 부득이하게 글을 남기게 되는군요. 부디,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인정해 주십시오. 저 역시 기독교인이지만 또한 한 사람의 '이성주의자'이기에 온당한 비난이라면 충분히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QUOTE]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하나의 글을 그렇게 10여개씩 공수한 적은 없습니다. 잘 살펴보십시오. 제가 작성한 여러개의 글을 도아님의 여러개의 '반 기독교적'인 성향의 글에 '적합하다' 싶은 곳에 트랙백을 하나의 글당 1-2개 내지, 최고로 많게는 3-4개까지 걸었습니다. 도아님은 그 모든 것을 하나로 통합하여(즉 제가 트랙백 걸어놓은 모든 글들을 총망라하여 계산), 전체적으로 10개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그건 오해의 소지가 있어 보입니다. 정확히 말해드리겠습니다.[/QUOTE]
같은 글인 것을 확인하고 삭제한 것입니다. 워낙 여러개를 보내다 보니 보낸 것을 보고 또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
[QUOTE]옳은길의 글 1개 → [관련된 주제당 1-4개까지의 트랙백] → 웹 2.0 시대의 정당한 의사소통 방법 준수[/QUOTE]
글하나 쓰고 트랙백을 서너개씩 보내는 것이 소통의 방법 준수라고요? 어디에 나와있나요? 이것도 개독경에 나온 것인가요? 미리 이야기하지만 개독경에 나온 방법은 개독끼리만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QUOTE]오해의 소지가 있었기에, 또 부득이하게 글을 남기게 되는군요. 부디,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인정해 주십시오. 저 역시 기독교인이지만 또한 한 사람의 '이성주의자'이기에 온당한 비난이라면 충분히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QUOTE]
[b]개독의 논리는 개독끼리[/b]
개독끼리는 서로 이성적으로 보더군요. 다만 나머지 4분의 3이 이상하게 보니 문제라는 것이죠. 그러니 그 이성은 개독끼리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일반인과 이야기하고 싶다면 개독의 논리가 아니라 일반인의 논리를 사용하면 됩니다. 그리고 님의 잘못을 남에게 전가하지 마십기 바랍니다. 이것도 개독의 특징이죠.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 전가하는 것... 아니면 이단으로 모는 것.
제가 저의 글을 3-4개씩 트랙백을 걸어놓은 것은 님의 주제와 그만큼 겹치는 주제의 글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성경'에 대한 도아님의 비난의 글들에 대해 저는 "[성경신학] 성서는 과연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계시의 책(말씀)인가?"라는 글을 트랙백으로 걸어 놓았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성경'이라는 대주제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며, 소극적으로는 [기독교 ↔ 반기독교]적인 정서와 맞물렸고, 더 나아가서는 '기독교 진리에 대한 심한 왜곡'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 치더라도 저의 트랙백이 님께서 블로그를 운영하는데 있어서 심각한 '위협'이 되셨다면, 이 자리를 빌어 사과를 드립니다.
하지만 도아님께서 '기독교인'들은 '개독교인'들로 펌하하며, 지극히 논리적인 댓글에 심심찮게 감정적인 비난만을 일삼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위의 댓글들만 보더라도 도아님은 본인의 글에 대한 논리적인 '해명'은 전혀 없이 그저 '개독교의 논리'에 대해 딴지만 걸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분명히 균형잡힌 시각이 결여된 것 같아서 마음이 씁쓸하군요. ㅠㅠ
[QUOTE]제가 저의 글을 3-4개씩 트랙백을 걸어놓은 것은 님의 주제와 그만큼 겹치는 주제의 글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성경'에 대한 도아님의 비난의 글들에 대해 저는 "[성경신학] 성서는 과연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계시의 책(말씀)인가?"라는 글을 트랙백으로 걸어 놓았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성경'이라는 대주제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며, 소극적으로는 [기독교 ↔ 반기독교]적인 정서와 맞물렸고, 더 나아가서는 '기독교 진리에 대한 심한 왜곡'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 치더라도 저의 트랙백이 님께서 블로그를 운영하는데 있어서 심각한 '위협'이 되셨다면, 이 자리를 빌어 사과를 드립니다. [/QUOTE]
그런 논리면 모든 글에 트랙백을 걸어도 상관없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아울러 그런 것을 '위협'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민폐지.
[QUOTE]심각한 '위협'이 되셨다면, 이 자리를 빌어 사과를 드립니다. [/QUOTE]
저도 사과드리죠. 다만 받고 싶으시면 옆 가게에서 사과 사드세요.
[QUOTE]하지만 도아님께서 '기독교인'들은 '개독교인'들로 펌하하며, 지극히 논리적인 댓글에 심심찮게 감정적인 비난만을 일삼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위의 댓글들만 보더라도 도아님은 본인의 글에 대한 논리적인 '해명'은 전혀 없이 그저 '개독교의 논리'에 대해 딴지만 걸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QUOTE]
읽지 않았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죠. 님은 저것이 '지극히 논리적'이라고 생각하시죠. 저는 '개독의 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차이를 전혀 모르시겠죠? 그러니 '자신이 쓴 글은 논리'고 '남이 쓴 글은 감정'이 되는 것이겠죠. 기본적으로 저는 [b]개독의 논리는 개독끼리[/b]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런 문제 자체가 발생하지 않으니까요. 다만 님 스스로 개독이라고 인정한 부분이니 '폄하한다'는 표현보다는 '개독임을 인정한다'가 더 맞는 것 같군요.
[QUOTE]분명히 균형잡힌 시각이 결여된 것 같아서 마음이 씁쓸하군요. ㅠㅠ[/QUOTE]
간단합니다. [b]균형잡힌 시각 자체가 없는 개독들[/b]이 '개독의 논리'로만 말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나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b]개독의 논리는 개독끼리[/b]
이러면 세상은 정말 살기 좋아집니다. 부탁하건데 "민폐"끼치지 마세요. 기본도 안되있는 사람들이 개독이라 이런 글을 자꾸 쓰게되는 것입니다.
그대의 육신의 생각 - 정과 욕심[오욕칠정]의 노예로 사는 자 이것을 성경에서는 여자라고 합니다.
이 여자가 예수신랑[=이천년전 육으로 오신 분이 아니라 진리]를 만나서
진리의 씨를 잉태하여 해산하면 그 아기를 '영적 아기예수'[=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말한 '교회에서 잠잠해야 하는 여자'는 우리 인간의 몸으로 자신이 사람인줄 알고 사는 죄인들[=영적여자들]을 말합니다.
육신의 생각으로 보셨기에....그 여자가 성기의여자인줄 알고 여성비하발언이라고 하지요...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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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은 이스라엘의 히스토리를 표적으로 나타내어 그 안에 있는 기사를 보라고 주신 것입니다.
구약은 혼적인 얘기[=세상얘기,귀신들의 얘기] 입니다.
혼을 죽이면 [=혼은 죽지 않습니다,,,죽을 수 없는 존재이므로...그대의 생각을 그대가 죽인다고 그 생각이 안일어납니까?] 영이 삽니다.
신약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혼적인 생각]은 무익하니라" 하셨지요.
내안에 육신의 생각으로 , 표적으로 ,현상으로 보는 내밖으로 향하는 마음[=간음하는 여자, 다 깨달은척하는 오욕칠정의 노예로 사는 남자]을 죽이지 않으면 내안의 내면세계를 볼수 없지요.
지금 님이 보시는 상태가 선악과를 먹은 첫아담의 상태입니다.
곧 "정녕코 죽으리라" 하셨으니,.....그대의 육체가 죽은 것이 아니라 그대는 성경이 말하는 진리[=하나님]과
관계성이 끊어진 자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보시는 관점으로 인해 지금 온 기독교가 중세때만큼이나 암흑기인줄 모르시지요?
진리[=하나님,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가 내밖에 있으면 진리가 아니지요.
숙면을 취하는 그 순간에도 심장,폐 아니 내안의 모든 기관은 진리대로 움직이지요.
그 진리와 딱 붙어서 살면서도 죽어서야 자신의 존재를 아니...그것이 안타깝다는 말입니다.
육체가 나인줄 알고 올인하여 살았는데....죽는 육체를 보는 나라는 존재를 지금알면 이를 갈일이 없지요.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도아님이 말하고 싶은 '개념찬 기독교인'이란 뭔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저 본문과 덧글들을 보니 성경은 그저 찌라시일 뿐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만약 그렇다면, '기독교인이 성경을 읽으면 개독교인이 된다'는 말이 됩니다.
그럼 개념찬 기독교인이란 건 어떻게 설명해야 되나요?
그저 보이지도 않는 신은 믿되 성경이라는 이름의 쓰레기를 멀리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