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고 넘는 박달재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로 시작되는 박달재 노래. 이 노래가 없었다면 박달재라는 이름도 방문할 일도 없었을 것 같다. '재'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주변에 비해 조금 높은 고개지만 풍광이 뛰어난 것도 고개가 가파른 것도 아니다. 아무튼 충주 인근에 있기 때문에 우연히 방문했다. 그리고 도착한 서원 휴게소. 천하 대장군, 지하 여장군과 같은 목상이 많았다. 그런데 이런 목상들이 이상하게 음산했다. 마치 휴게소 전체에 음기가 서린 것 같았다. 이런 느낌이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는 걸 나중에 알았지만 음산한 기운 때문에 다시 방문하고 싶지는 않았다.

청풍 문화재 단지

충주는 문화재가 많다. 고대 삼국시대 때는 전략적 요충지였고, 그 뒤에도 교통의 중심지 였기 때문이다. 지난 토요일 충주호를 나들이 한 뒤 일요일에는 충주의 문화재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래서 찾은 곳이 청풍 문화재 단지였다. 충주댐의 건설로 청풍이 물에 잠기게되자 이전 복원된 곳으로 한벽루, 금남루, 팔영루, 응청각 등의 고가와 지방유형문화재, 비지정문화재, 생활유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민속촌보다 낫다는 풍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차를 타고 출발하려고 하니 또 비가 질척 질척 내렸다. 집으로 갈까 그냥 출발할까 하다가 일단 출발한 뒤 날씨를 보기로 했다. 역시 가는 길은 파란의 미친 지도를 이용했다. 연수동에서 출발, 38번 국도를 타고 제천쪽으로 가다가 제천 IC에서 중앙 고속도로 갈아 탄 뒤 남제천 IC에서 빠져나와 청풍 쪽으로 향하면 됐다. 물론 이보다 짧은 길도 있지만 길을 모르기 때문에 주로 큰 도로를 이용하기로 했다.

박달재

막상 출발해서 제천쪽으로 가다 보니 날씨가 더 않좋았다. 결국 발달재 사거리에서 박달재를 넘는 구도로를 이용해서 박달재를 넘었다. 울고 넘는 박달재라는 이름 답게 길은 꼬불 꼬불 했다. 박달재 정상에 오르니 서원 휴게소가 나타났다. 그런데 이 휴게소에는 목신이 상당히 많았다. 천하 대장군, 지하 여장군처럼 눈에 익숙한 것들도 있지만 생긴 것 때문에 다소 기분이 나빴다.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처럼 이미 눈에 익은 목신들이지만 표정이 조금 이상하다.

박달재를 넘을 때는 이철수 선생님과 함께 갔던 백운의 손짜장 집을 염두에 두었지만 휴게소의 두부 전문집을 보니 두부 전골이 먹고 싶어졌다. 우엉맘과 상의하고 두부집에 자리를 잡았다. 가격을 보니 두부 전골이 7000원. 두부 전골 치고는 가격이 비싼 편이었다. 어른 둘에 아이 둘, 2인분이면 충분할 것 같은 데 바로 3인분을 가져오겠다고 한다.

그래서 전골 2인분에 감자전을 하나 시켰다. 감자전이 비교적 빨리 나와 몇점 먹어보니 감자전 특유의 맛이 없었다. 그리고 잠시 뒤 반찬보다 두부 전골이 먼저 나왔다.

도아: (에게,,, 7000원짜리 두부 전골이 왜 저래?)
우엉맘: (1일분인가?)

음산한 목신

뒤이어 반찬이 나왔다. 일단 반찬은 깔끔했고 맛은 괜찮았다. 그런데 문제는 두부 전골. 두부 전골 2인분에 들어간 것은 두부 반모, 콩나물 한 주먹, 느타리 버섯 4조각, 손가락 굵기의 팽이 버섯 두뭉치, 국물을 내기위한 살없는 꽃게 다리 두개가 전부였다. 정말 부실했다. 7000원짜리 두부 전골로 보기에는 너무 부실했지만 맛은 괜찮았다. 그런데 밥 한 공기를 다먹고, 반찬에 국물까지 쓸어 먹었지만 여전히 허기가 졌다.

밥을 먹고 나와 이 박달재의 목신에서 우영이 사진을 찍었다. 내려 오면서 보니 박달재를 넘자 마자 집 한채가 보였다. 이 집에는 바로 만든 것 같은 목신이 잔뜩 있었다. 아무래도 이 집에서 만들어 여기 저기 가져다 두는 것 같았다. 아무튼 다시 서점으로 갔고 서점 사무실에서 간단한 작업을 한 뒤 집에와서 우엉맘이 해준 닭갈비에 소주를 한잔 걸치고, 덤으로 맥주 한번(1.6L)를 마시고 잤다.

목신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기념으로 우영이 사진을 찍었다. 우영이 사진을 찍으면 왼쪽의 목신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형상은 여자 같은데 가운데 커다란 남성의 성기가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이 글을 쓰면서 박달재의 유래에 대해 찾다가 우연히 찾은 글에서 그 목신들의 정체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박달재 목조각 조각실에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박달재 목조각 조각실은 전통 목조각에 탁월한 재능과 집념으로 살아온 성각 스님이 운영하는 공방으로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고 한다.

출처: 충북 제천시 '박달재' 명소화 추진
목을 길게 빼고 박달을 그리워하는 금봉이, 임신한 금봉이의 풍만한 모습에서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모습의 안온한 풍경, 아기를 목마 태운 박달이와 금봉이가 환생한 듯 다정히 숲길을 거니는 모습, 일부 조각은 남근과 여성의 가슴이 너무 부각돼 있어 사연을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기도 한다. 이를 조각한 성각스님(54)은 "박달재가 있는 시랑산(侍郞山)은 말 그대로 남자를 모시는 산이다. 풍수학상 여자산으로 음산에 속하므로 남근을 세우는 것은 음양법의 조화다. 박달이와 금봉이의 애절한 사연이 두번 다시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뜻도 담겨 있다"고 설명한다.

박달재의 유래

출처: 충북 제천시 '박달재' 명소화 추진
이곳엔 박달도령과 금봉낭자의 애틋한 사랑이 전해져 내려온다. 조선조 중엽, 경상도의 젊은 선비 박달은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중 지금의 평동리에 이른다. 마침 해가 저물어 어떤 농가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이것이 '사건'이 됐다. 이 집의 과년한 딸 '금봉'이와 눈이 마주친 것이다. 금봉의 청초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은 박달, 박달의 의젓함에 마음이 동한 금봉. 그날밤 삼경(三更)이 지나도록 잠 못 이룬 이들은 밖으로 나와 서성이다 마주쳤다. 이들은 금세 친해졌다. 이튿날 떠나려던 박달은 며칠을 더 묵게 되었고 밤마다 두 사람은 사랑을 키워갔다.

과거급제 후 함께 살기로 굳게 약속하고 한양에 올라 온 박달은 자나 깨나 금봉이 생각뿐이었다. 과장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낙방한 박달은 금봉이 볼 면목이 없어 평동에 가질 못했다.

한편, 박달의 장원급제를 빌던 금봉은 박달이 떠나간 고갯길을 박달을 부르며 오르내리다 상사병으로 한을 품은 채 죽는다. 장례 사흘 뒤 풀이 죽어 평동에 돌아온 낙방거사 박달은 금봉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땅을 치고 목놓아 운다. 울다 얼핏 고갯길을 쳐다보던 박달, 금봉이가 고갯마루를 향해 너울너울 춤을 추며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뒤를 쫓아가 잡았다. 고갯마루에서 금봉을 와락 끌어안은 박달은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금봉의 환상을 껴안은 것이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사람들은 박달이 죽은 고개를 박달재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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