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사람

나는 전라도 사람은 보기만 해도 그 사람 전라도 사람인지 아닌지 안다. 물론 능숙하게 서울 말을 구사해도 그 말속에 남아있는 정겨운 사투리도 잘 잡아낸다. 내가 태어난 곳은 전라남도 곡성군 목사동면 월평리라는 벽촌이다.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아 대밭로 변했지만 이 곳에서 나서 6살 때까지 살았다. 6살 때 서울로 상경했으므로 전라도 '깽깽이'라기 보다는 서울 '뺀질이'에 더 가깝다.

전라도 사람

나는 전라도 사람은 보기만 해도 그 사람 전라도 사람인지 아닌지 안다. 물론 능숙하게 서울 말을 구사[1]해도 그 말속에 남아있는 정겨운 사투리도 잘 잡아낸다. 내가 태어난 곳은 전라남도 곡성군 목사동면 월평리라는 벽촌이다.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아 대밭[2]로 변했지만 이 곳에서 나서 6살 때까지 살았다. 6살 때 서울로 상경했으므로 전라도 깽깽이라기 보다는 서울 뺀질이에 더 가깝다.

서울로 상경한 뒤 매년 한번씩 고향에 내려갔다. 곡성역에 내려서 하루에 두번 운행하는 버스를 타고 고향으로 가곤했다. 환경을 무시하고 세워진 땜 때문에 지금 보성강은 얕은 개울처럼 변했다. 그러나 어렸을적 기억으로는 꽤 수량이 풍부했던 강이었다. 가끔 장마로 보성강 다리가 끊어진 경우도 있었다. 이때에는 나룻배를 타고 보성강을 건너 걸어서 갔다. 어린 나이에 꽤 긴 거리지만 하나밖에 없는 손자를 끔직히도 아끼시던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난다는 기대감에 힘든줄도 모르고 걸어갔던 것 같다.

나이가 들고 세상에대해 조금씩 알아가던 시절, 우리 사회는 전라도 사람에대한 수많은 편견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은 거주지에서 신체검사가 가능하지만 고등학교 시절에는 신검 통지서를 받으면 본적지로 내려가 신검을 받아야 했다. 이 것을 불편하게 여긴 아버님께서 본적지를 당시 거주지였던 서울시 동대문구 휘경동으로 변경해 놓으셨다. 동사무서에서 서류를 발급받던중 본적지 얘기가 나왔다. 본적을 옮긴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원래 본적을 서울로 옮겼다고 하자 대뜸

전라도 사람이죠?

라고 되묻는 것이었다. 그렇다.

전라도 사람으로 산다는 것

전라도 사람, 여지껏 이 땅에 살면서 한국 사람과 전라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지금은 많아 달라졌겠지만 예전에는 본적이 전라도면 취직도 잘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편견은 어디에서나 겪을 수 있었다. 나를 아껴주시던 친구 아버님도 아무런 이유없이 전라도 사람을 싫어했다. 장인어른도 마찬가지이다. 전라도 사람 얘기만 나오면 곧잘 전라도 사람을 나쁘게 얘기하곤 하신다. 하루는 애 엄마가 장인 어른께 전라도 사람한테 피해를 입은 것이 있냐고 여쭌적이 있다. 장인 어른 답은 '없다'는 것이었다. 전라도 사람한테 아무런 피해를 입은적은 없어도 전라도 사람은 싫어하신다. 그래서 전라도 사람들은 본적을 많이 바꾼다.

김대중씨[3]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일이이다. TV에서 한 시장 아주머니가 나와 흐느끼면서

이제는 원도 한도 없다

고 하신 모습을 본적이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광주의 맺힌 한을 풀수 있기때문도 아니다. 이제 '전라도 사람'도 전라도 사람이 아닌 한국 사람으로 대접받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전라도 사람으로 산다는 것

이 것은 지역 감정의 벽[4]을 타고 수많은 편견을 등에지고 산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나도 본적을 옮겼다. 그러나 본적을 옮긴 수 많은 전라도 사람들이 그렇듯 전라도 사람이라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자랑스럽다. 묻힐 땅이 있어서도 아니고, 그 곳에서 태어나서도 아니다.

그냥. 전라도가 좋다.

전라도 사람에대한 편견과 압제는 고려 태조 왕건부터 비롯됐다는 견해가 있다. 태조 왕건은 끝까지 자신에게 항거한 전라도 도민을 절대 등용하지 말것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 역시 이러한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아 1000여년간 전라도는 비주류로서 수많은 편견속에서 살아왔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단순한 설에 불과하며, 태조 왕건이 그런 유언을 남겼다는 증거는 없다. 최항이 죽은 뒤 발견된 시무이십팔조가 그 근거라고 생각된다면 역사 공부를 조금 더 해보기 바란다.

전라도 사람에 대한 편견은 남에게 지기 싫어하며, 강한 생활력으로 빠른 시일내에 자리잡는 전라도 사람들의 자립심생활력, 여기에 전라도 사람 특유의 반골 기질이 더해져서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TV에서 방영했던 5공화국을 보면 '전대(머리)통령'이 공수부대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일반 시민일 수 있냐고 묻는 장면이 있다.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두려움을 이긴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렇다
반골기질이 강해 평상시에는 다른 사람들의 말도 듣지 않고 백가쟁명(百家爭鳴)을 일삼기도 하지만 어려울 때면 함께 뭉처 일어날 수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전라도 사람들이다[5].

전라도 사람은 보면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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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 말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경상도 사람은 흔치 않아도 서울 말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전라도 사람은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사투리가 가지고 있는 언어적 구조의 차이 일 수도 있지만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함으로서 알게 모르게 받을 수 있는 피해 때문이기도 하다. 
  2. 일반적으로 쑥대밭이 된다고 한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에는 처음에는 쑥이 자라고 나중에는 대밭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대나무는 뿌리를 땅속으로 뻗고 사람이 사는 동안에는 올라오지 못하지만 사람이 살지 않으면 이내 콘크리트를 뚫고 올라온다. 
  3. 가끔 전라도에서 김대중씨에 대한 얘기를 하다보면 난감할 때가 많다. 전라도 사람이면서 김대중씨를 지지하지 않는 몇안된는 사람중 한사람이다 보니 김대중씨라는 표현보다는 '대중이가'라는 표현을 더 잘 쓴다. 그런데 나이 지긋하신 분들은 김대중씨 이야기가 나오면 옷 맵시를 다듬고, 우리 김대중 선생님께서라고 말을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4. 지역 감정은 오래된 전통이 아니다. 박정희와 김대중씨가 대선 후보로 나섯던 시절 박정희가 당선되기 힘들 것 같자 김대중 씨 측근(엄창록)[6]을 매수, 부산에서 "호남인이여 단결하라라!"는 전단을 뿌리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물론 박정희는 지역감정 자극과 부정 선거를 통해 당선됐다. 그 이후 많은 정치꾼들이 당선을 위해 지역 감정을 자극해왔다. 한나라당이 여당으로 다시 설수 있었던 그 배경에도 지역 감정이라는 두터운 벽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5. 그렇기 때문에 통치권자에게는 가장 불편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6. 엄창록은 김대중 씨의 최측근으로 DJ의 제갈공명, 선거판의 여우로 불린 사람이다. 신출귀몰한 선거운동 전술로 당시 중정조차 혀를 내둘렀던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