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지 않고 타자

이때까지 "글을 읽지 않고 타자하는 비밀"은 몰랐다. 보통 일반인 타자 속도의 한계는 300타에서 400타라고 한다. 즉, 이 단계까지는 '글을 읽고 타자하는 단계'다. 글을 눈으로 보고 머리로 이해한 뒤 머리의 명령을 받아 손가락으로 글쇠를 친다. 따라서 이런 전파속도 때문에 이 이상의 속도는 나오기 힘들다고 한다.

전산사식

꽤 오래 전의 일이다. 대학원 1년차 2학기 때니 벌써 십칠팔년전의 일이다. 당시에는 워드가 많이 보급되지 않아서 프로젝트 보고서를 만들려고 하면 전산사식을 해야 했다. 충무로의 영세 업체들이 다 비슷하지만 이들 업체는 전산사식용 매킨토시만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매킨토시로 워드 작업을 하고 필름 작업 및 인쇄는 다른 업체[1]에서 했다.

이렇기 때문에 보고서를 인쇄하기 전에는 몇번의 교정 작업이 이루어 진다. 또 필름 작업에 들어가면 이때는 교정 자체를 할 수 없었다. 이때 교수님이 하신 이야기.

교수님: 도아야, 교정 잘해야되. 게네들은 써준대로 치거든.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설사 보고서의 내용을 모른다고 해도 "나는 어제 학교에 갈 것이다"라고 써 준다면 '어제'라는 과거형에 '갈 것이다'라는 미래형이 붙었기 때문에 "둘 중 하나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정상이다. 물론 이 글은 '어제'가 틀린 것인지 '갈 것이다'가 틀린 것인지 모를 수 있다.

그러나 "보고서의 제목이 '무선기기 형식검정'[2]인데 본문 중에 '무산기기 헝식감정'이라고 써놨다"면 당연히 찾아 고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교정지를 받고 보니 '무산기기 헝식감정'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처음에는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산사식 업체에는 세명이 일하고 있었다. 사장님인 교수님 친구분, 워드 작업을 주로 하는 딸과 직원 한명. 사장님은 타자가 늦은 편이라 틀리게 입력해도 대부분 알아서 교정[3]을 해 주셨다. 다만 타자 속도가 엄청나게 빠른 딸과 직원은 틀리게 써주면 틀린 그대로 입력했다.

교정 때문에 이 업체에 방문했다가 처음 본 물건이 매킨토시다. 전산사식을 주로 하기 때문에 모니터도 눞혀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세워서 사용했다. 그리고 그 '매킨토시' 화면 가장 위에는 매킨토시를 인상적으로 기억하게 만든 눈(Eyes)이 있었다. 문서작업을 하지 않으면 눈을 감고 자고 작업 중에는 마우스의 이동에 따라 눈동자가 움직이는[4]...

그러나 더 놀란 것은 아가씨들의 타자 속도였다. 워낙 빠르게 입력하기 때문에 화면에 글자가 표시되지 않았다. 그리고 엔터키를 치면 한줄씩 화면에 표시[5]됐다. 도대체 얼마나 빨리 입력해야 '글자 단위'로 출력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줄 단위'로 이루지는 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읽지 않고 타자

그러나 이때까지 글을 읽지 않고 타자하는 비밀은 몰랐다. 보통 일반인이 타자 속도의 한계는 300타에서 400타라고 한다. 즉, 이 단계까지는 '글을 읽고 타자하는 단계'다. 글을 눈으로 보고 머리로 이해한 뒤 머리의 명령을 받아 손가락으로 글쇠를 친다. 따라서 이런 전파속도 때문에 이 이상의 속도는 나오기 힘들다고 한다.

이 이상의 속도가 나오기 위해서는 글자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바로 타자를 해야 한다. 이때는 글을 이해하는 부분이 빠진다. 글자의 모양에 따라 손가락이 바로 반응하는 단계[6]이기 때문이다. 머리로 이해하는 시간이 사라졌기 때문에 타자 속도는 당연히 올라간다.

대신에 틀린 내용이 있어도 그 내용이 틀렸다는 것을 모르게 된다. 즉, 전산사식을 하는 아가씨들이 틀린 내용을 그대로 입력한 것은 글을 머리로 읽은 것이 아니라 글자의 모양에 손가락이 바로 반응했기 때문이었다.

요즘은 다른 사람의 문서작업을 해주지 않기 때문에 내 타자 속도는 빨라야 300타 정도 나온다. 또 생각하며 글을 쓸 때는 이 이상 나올 필요도 없다. 그러나 한참 프로젝트 보고서를 작성할 때는 나도 오륙백타가 나왔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글자를 보고 손가락이 반응하도록 연습했기 때문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렇게 타자한 뒤에는 다시 교정을 봐야했다. 틀린 내용을 그대로 입력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300타로 글을 이해하면서 입력하는 것 보다는 이 방법이 속도면에서는 더 나았다. 그 이유는 300타로 이해하면서 입력해도 교정은 필요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참깨군의 글, 타자에 대한 추억... 그리고 한메타자교사을 읽다가 불현 듯 떠오른 타자에 대한 추억이다.

관련 글타래


  1. 영세 업체였기 때문에 레이저 프린터가 없어서 인쇄도 다른 업체에서 했다. 
  2. 내가 처음으로 진행한 프로젝트이다. 보통 정부에서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이런 보고서를 학계에 작성하도록 하고 이 보고서를 토대로 필요성을 언급한 뒤 일을 진행한다. 이 보고서는 업계에서도 명작으로 취급받은 보고서이며, 업계 관계자들이 얻으러 오는 때도 많았던 보고서다. 내가 맡은 파트는 일본 전파법이었다. 
  3. 교수님은 내용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교정을 해 주신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읽고 타자를 하기 때문에 교정이 가능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4. 당시 PC는 DOS 기반이었다. 마우스가 없는 PC도 많았다. 이런 상황에 맥킨토시는 GUI 기반 컴퓨터였고 악세사리로 움직이는 '눈'은 '신기 그 자체'였다. 
  5. 당시에 주로 사용되는 컴퓨터는 XT, 가끔 AT가 사용됐다. 따라서 매킨토시 사양도 그리 높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울러 저사양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발생한 것으로 생각한다. 
  6. 타자속도가 500타 이상 나오지 않으면 이 단계를 이해하기는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