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 알게됐다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알게된 블로거의 홈페이지를 방문해 보면 예상외로 국내 개신교도와는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되는데 세기연도 국내 개신교와는 다른 입장의 단체였다. 장로교의 교파가 48개나 된다고 해서 정말인지 궁금해서 자료를 찾다가 알게된 단체이다.
세기연을 통해 기존의 보수 기독교와는 다른 진보 기독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이것은 기존 기독교에 대한 안좋은 이미지를 완화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됐다. 또 세기연에 대한 소개 글에는 필자가 바라던 기독교관이 상당히 드러나 있었다. 다음은 세기연 소개
의 21세기 새롭고 건강한 기독교 변혁를 위한 패러다임 대전환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기초전제 - 관념적 이원론에서 [현실적 관계론]으로
- '무조건 믿어라'의 기독교에서 [깨달음의 기독교]로
- 문자적 성서해석에서 [사건적 성서해석]으로
- 초월적 유신론에서 [포월적 유신론]으로
- 교리적 예수에서 [역사적 예수]로
- 이웃종교에 배타적인 기독교에서 [함께 가는 기독교]로
- 가부장적 기독교에서 [상호평등의 기독교]로
- 숭배하는 예배에서 [닮으려는 예배]로
- 서구식 목회문화가 아닌 [우리식 목회문화]로
- 수직적 구조의 교회에서 [수평적 구조의 교회]로
- 죄의식의 종교에서 [이웃과 함께 성찰하는 종교]로
- 영혼구원의 강조에서 [총체적인 생명구원의 강조]로
- 저 세상이 아닌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기독교가 배척받는 이유중 하나는 어떤 깨달음없는 믿음의 강요라고 본다. 물론 일부 기독교도는 맹종을 당연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모든 믿음에는 반드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맹종이 맹목을 낳고, 그 맹목이 광신을 낳는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다. 우리의 교회가 미친 신도를 양산하는 이유 역시 목사와 교회에 대한 맹종 때문이라고 본다.
두번째로 우리 기독교는 사실 너무 배타적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기독교를 울타리 종교(울타리 안쪽에 있는 사람에게는 뭐든 해주지만 울타리 바깥쪽에 있는 사람에게는 돌을 던지는)라고 얘기해왔다. 따라서 이웃종교에 배타적인 기독교에서 [함께 가는 기독교]라는 대목도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단순히 이웃이 아니라 이웃종교라고 명시하고 있다. 즉, 원수를 사랑하라는 교조의 가르침조차 따르지 못하는 종교에서 최소한 교조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교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세번째로 우리 교회는 사실 너무 서구적이었다. 카톨릭이 순교를 비롯한 뿌리 깊은 전통으로 우리 문화에 상당히 토착화된 반면 교회는 너무 이질적이었다. 아버님이 돌아 가셨을 때의 일이다. 필자는 천주교 신자가 아니지만 아버님을 위해 연도를 하고 있었다. 연도에 오신 한 신자분께서 필자에게 넌즈시 말을 건네셨다.
연도를 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연도라는 풍습이 그리 낮설지 않았다. 불교에서 스님이 지내는 49일제를 신자들이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아마 더 잘했던 것 같다.
네번째로 죄의식의 종교에서 [이웃과 함께 성찰하는 종교]라는 대목도 인상적이었다. 이전에 쓴 글의 댓글에도 있고 필자 역시 계속 의문이었지만 장로교도들의 주장중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주장은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지옥에 간다는 주장이었다. 이 주장의 근간은 바로 원죄설이다. 즉,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원죄때문에 지옥에 가며, 구원을 받으려고 하면 교회를 다녀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런데 이젠 이런 논리조치 펼치지 않겠다는 뜻으로 보였다.
마지막으로 인상적인 부분은 저 세상이 아닌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었다. 기독교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기독교는 현세 보다는 내세를 중시하는 종교이다. 그런데 내세보다는 현세를 중시하겠다는 선언은 지금처럼 기복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하겠다는 선언으로 보인다. 사실 카톨릭의 현실 참여와 개신교의 현실 참여를 보면 상당한 차이가 난다. 민주화의 성지가 명동 성당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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