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아의 세상사는 이야기https://offree.net/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 의견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말할 자유를 위해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볼테르의 삶.2023-03-07T19:12:43+09:00Textcube 1.7.8 : Con moto문화도시부평 민중가요 아카이브 시리즈 <#7 이주헌>(丹風)https://offree.net/entry/Protest-Song-Archive-72023-01-13T10:42:53+09:002023-01-12T15:59:36+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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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eldset class="ViewPostOfRelTag"><legend> 민중가요 아카이브 </leg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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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인천 민중가요를 이끌었던 아름다운 청년, 최경숙
문화도시부평과 함께하는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중가수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인터뷰 운영은 국내 최대 민중가요 아카이브 사이트 PLSong.com의 운영자 ‘단풍’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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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인천 민중가요를 이끌었던 아름다운 ...</span> <a href=/entry/Protest-Song-Archive-6 id="tagSearch" class="new" target="_blank">새창</a></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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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철폐 투쟁의 현장에서 영오, 이동언
문화도시부평과 함께하는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중가수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인터뷰 운영은 국내 최대 민중가요 아카이브 사이트 PLSong.com의 운영자 ‘단풍’이 참여했다.
5회는 ‘인천장애인차별철폐연대’...">
장애철폐 투쟁의 현장에서 영오, 이동언
문...</span> <a href=/entry/Protest-Song-Archive-5 id="tagSearch" class="new" target="_blank">새창</a></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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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기억하며 현재를 노래하는 노래벗, 손은화
문화도시부평과 함께하는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중가수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인터뷰 운영은 국내 최대 민중가요 아카이브 사이트 PLSong.com의 운영자 ‘단풍’이 참여했다.
4회는 ‘노래벗’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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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는 알아도 작곡가는 몰랐던 꿈찾기, 손호준
문화도시부평과 함께하는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중가요 가수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인터뷰 운영은 국내 최대 민중가요 아카이브 사이트 PLSong.com의 운영자 ‘단풍’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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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최초의 노래패 노래이야기, 하태준
문화도시부평과 함께하는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중가수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인터뷰 운영은 국내 최대 민중가요 아카이브 사이트 PLSong.com의 운영자 ‘단풍’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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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최초의 노래패 노래이야기, 하태준
문...</span> <a href=/entry/Protest-Song-Archive-2 id="tagSearch" class="new" target="_blank">새창</a></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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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투혼 불나비의 가수, 최도은
문화도시부평과 함께하는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중가수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인터뷰 운영은 국내 최대 민중가요 아카이브 사이트 PLSong.com의 운영자 ‘단풍’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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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투혼 불나비의 가수, 최도은
문화도...</span> <a href=/entry/Protest-Song-Archive-1 id="tagSearch" class="new" target="_blank">새창</a></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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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3>인천 최초 노동자 노래패 노둣다리, 이주헌</h3>
<p>문화도시부평과 함께하는 <민중가요 아카이브>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중가수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인터뷰 운영은 국내 최대 민중가요 아카이브 사이트 PLSong.com의 운영자 ‘단풍’이 참여했다.</p>
<p>7회는 ‘노둣다리’의 이주헌님이 참여해주셨다.</p>
<p>인천에서 처음 만들어진 노동자 노래패는 대우중공업 노동자 노래패 “노둣다리”이다. 1990년 결성된 노둣다리는 노동자 노래패의 불모지라고 불리던 인천에서 노동자 노래패의 맏형이었고, 1996년 인천지역 금속노동자노래패연합 ‘철의 노동자’ 결성과정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노둣다리의 결성할 때부터 함께 해온 현대두산인프라코어 노동자 이주헌 씨를 만나 노둣다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p>
<p><center id="boxsolid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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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p>
<p><span class="detailB">Q. 안녕하세요. 노둣다리라는 이름이 독특합니다. 어떤 이름인가요?</span><br>
노둣돌과 징검다리의 합성어로 노둣다리라고 합니다. 노둣돌은 제주도에서 통용되는 순우리말로 말을 탈 때 쓰는 디딤석을 말합니다. 노둣돌을 하나씩 연결해 징검다리를 만들죠, 노동해방과 조국통일을 위해 작으나마 밑거름이 되고자 하는 바램으로 노래패 이름을 노둣다리라고 정했어요.</p>
<p><span class="detailB">Q. 노래패는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나요?</span><br>
노둣다리는 1990년에 만들어졌어요. 회사에서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적이 있었는데, 노제에서 추모가를 불렀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제가 최도은 씨에게 연락해서 몇몇이 노래를 배워서 노제에서 노래를 불렀어요. 당시 대우중공업에는 문화패는 “이심이”라고 풍물패만 있었고, 노래팬 없었거든요. 그런 일들이 있으면서 노래패가 만들어졌음 좋겠다는 의견이 많아졌고, 노래에 관심이 있던 2명을 주축으로 의기투합이 되어 8명으로 결성하게 됐습니다.</p>
<p><span class="detailB">Q. 노래패는 주로 어떤 활동을 많이 했나요?</span><br>
전국 집회 문선대활동을 많이 했었요. 주말이면 거의 집회나 행사들로 일정이 채워져 있었어요. 특히, 메이데이하고 11월에 있는 전태일열사계승 전국노동자대회는 1박 2일로 참여를 했어요. 금속연맹 창립총회 공연도 했고, 학생운동이 활발하던 시절엔 전국의 대학에 공연도 많이 다녔어요.</p>
<p><span class="detailB">Q. 주말마다 집을 비우시면, 사모님과 관계가 어려우셨겠습니다. </span><br>
우리 마누라는 지금도 그런 이야길 해요. 당신은 내가 필요할 땐 항상 집에 없었다고... 주말에 아이가 아프거나 그럴 때도 나는 항상 집회장에 있었으니까. 내가 없으니까 큰동서가 병원에 데려다주기도 하고... 엄청 타박을 많이 받았어요.</p>
<p><span class="detailB">Q. 그런 어려움이 있는데도 노래패를 계속 하셨던 이유가 뭘까요?</span><br>
해야만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어요. 우리의 활동이 세상을 바꾸는데 뭔가 힘이 될 것이라는 그런 생각 때문이죠. 사실, 잔업도 하고 특근도 해야 월급이 많아지는 구조이기 때문에 고민이 많았죠. 그래도 세상에 대한 고민,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p>
<p><center id="boxsolid2">
<a href="https://offree.net/uploads/plsong/Protest-Song-Archive-7-2.jpg" rel="lightbox[Offree]" class='highslide' onclick="return hs.expand(this, { slideshowGroup: 'first-group' })"><img src="https://offree.net/images/uploads/plsong/Protest-Song-Archive-7-2.jpg"></a>
</center></p>
<p><span class="detailB">Q. 세상은 잘 안 바뀌는 것 같아요. </span><br>
세상은 여전히 똑같아요. 자본가들은 자기들 유리한대로 법을 바꿔가면서...</p>
<p><span class="detailB">Q. 선배님은 노동운동을 오랫동안 하셨나봅니다.</span><br>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84년이긴 했는데, 그땐 노동조합 활동이었지 노동운동이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저는 할당된 작업을 열심히 해서 빨리 마치는 스타일이었어요. 해야 할 일을 다 마쳤으니깐, 그러면 동료들하고 이야기하면서 노는거죠. 그런데, 관리자들은 그런게 싫었나봐요. 관리자가 작업장에 와보면 난 일을 마치고 동료들이랑 놀고 있는거죠. 그렇게 관리자들한테 찍혔어요. 그러다보니 관리자들이 이런저런 압박을 하는데, 회사에 반감이 생기는거죠. 자연스럽게 조합활동을 하게되더라구요.</p>
<p><span class="detailB">Q. 5공화국 시절 노동운동이면 어려우셨을텐데요. 위험하진 않았나요?</span><br>
전두환 정권시절에는 유인물을 뿌리다 걸리기만해도 다 해고됐었거든요. 1985년경에 회사에 유인물을 배포하다 걸렸어요. 더군다나 유인물을 중간에서 전달했거든요. 내가 중간책처럼 돼버렸어요. 그래서, 그때 정말 해고될 줄 알았는데 지금은 돌아가신 친구 작은아버지가 회사 임원으로 계셨어요. 그분 덕분에 해고되지는 않고 인천으로 쫓겨온 걸로 정리한거죠.</p>
<p><span class="detailB">Q. 원래 인천에 계셨던 것이 아니었어요?</span><br>
제가 철도차량사업소로 입사했었거든요. 지금은 회사이름이 로템으로 바뀐 곳입니다. 어쨌든 인천으로 쫓겨와 징계로 한 달 정직을 받았어요. 그런 다음엔 조합활동을 그만두고 조용히 있었는데, 소문이 났는지 나중엔 사람들이 찾아오고 해서 결국 노동조합활동을 같이 하게 되었죠.</p>
<p><span class="detailB">Q. 여러 활동들 가운데 노래패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나요?</span><br>
사실 제가 노래를 잘하는건 아니에요. 그냥 노래가 좋아해서 들어갔어요. 옛날엔 카세트 테잎으로 제작해서 노래들을 많이 들었잖아요? 그런 노래들을 듣다보니까 나도 노래를 불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노래에 대해선 잘 모르기도 하고 그래서 들어가게 된 거에요. 내가 노랠 잘 부르는 건 아니지만, 떼창(집단 노래)으로 하니까 또 노래가 괜찮습니다. 내가 못하는 부분은 옆 친구가 받쳐주기도 하고 그러니까... 그 덕에 노래패 활동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p>
<p><span class="detailB">Q. 활동하시던 때 이야기 좀 부탁드려요.</span><br>
1992년인가, 11월 전국노동자대회에서 공연하는데 금요일 저녁에 수원에 있는 성균관대학교에 모였어요. 모이자마자 노래 연습을 막 시키더라구요. 가사도 제대로 모르고 노래풍만 대충 아는 그런 노래들을 계속 연습하는거죠. 그렇게 밤새 노래연습하고 토요일에 서울로 향했어요. 서울 갈 땐 남자 여자 한 명씩 짝지어 줘요.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릴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한거죠. 검문에 걸리면 애인 사이라면서 애인끼리 서울에 놀러왔다고 적당히 둘러대라는 거죠. 그렇게 짝지어서 계속 북쪽으로 가는 전철을 타고 이동하는데, 그때 우린 서울 지리를 잘 몰랐거든요. 그래서 앞에서 이끄는대로 계속 가는데, 잘 모르긴 해도 정문으로 못 들어가고 후문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어딘지 모를 시장에서 뛰기 시작해서 한참을 뛰어가니까 갑자기 쇠파이프를 땅에 두드리는 소리가 막 나요. 사수대들이 딱 지키고 있더라구요.</p>
<p><span class="detailB">Q. 그렇게 전국노동자대회 전야제에 도착하신거군요. </span><br>
지금도 생각하니까 가슴이 쿵쿵 뛰면서 벅찬 감정이 생기네요. 그렇게 노래를 배우면서 무대위에 올라 노래를 하곤 했어요. 전야제는 보통 대학교에서 했는데, 보통 숙소로 학생식당 같은 곳을 썼죠. 11월이니까 날씨가 많이 추워서 박스를 깔고 잤어요. 그렇게 추웠어도 추운줄 몰랐죠. 지금 기억엔 그 곳에 고려대였어요.</p>
<p><span class="detailB">Q. 노동자대회 본대회 무대에도 올라가신거죠?(당시엔 노동자대회 전날에 전야제를 하고, 노동자대회 당일을 본대회라고 불렀다)</span><br>
네 본대회 무대도 올라갔어요. 그때 본대회에 모인 노동자가 5 만 명이었다고 들었어요. 무대에 올라서 노래를 하는데, 모여 있는 노동자가 정말 많았어요. 아, 이게 노동자구나. 나 혼자가 아니구나. 그런 생각이 들면서 엄청 벅차올랐죠.</p>
<p><span class="detailB">Q. 그렇게 열심히 활동하신 동력이 무엇이었나요?</span><br>
세상이 금방 바뀔 것 같았어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데, 사람들이 모이면 된다고들 했었고... 진짜 그땐 뭔가 바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많이 들었어요.</p>
<p><span class="detailB">Q. 노둣다리 말고 다른 활동도 많이 하셨다면서요.</span><br>
최도은 씨가 지도하던 노래패들이 많았는데, 그 노래패들을 모아서 연합을 만들어서 연합노래패 활동도 했었어요. 노동자대회 전야제에 가기 위해 짝지었던 여성 동지가 동일레나운 노래패였는데, 연합노래패 활동도 함께 했죠. 단체 문화선전활동을 하는데 기세가 대단했었어요. 그땐 모임이 있으면 웬지 가야하는 의무감 같은게 막 생겨서 참석을 많이 했었어요. 또 노학연대(노동자 학생 연대) 활동을 한다고 인천대, 인하대 학생들이랑 교류도 많이 했어요. 노둣다리 공연도 대학교에서 많이 했어요. 당시에는 공연할 장소를 구하기가 어려워서 학생회하고 연대하서 대학교에서 공연을 많이 했어요. 첫 공연은 인천대학교에서 했어요. 지금 있는 송도말고, 제물포에 있는 인천대학교죠. 이름은 기억이 안나는데, 언덕 위 맨 꼭대기에 있는 건물에서 공연을 했었어요. 그 뒤로는 인하대에서 주로 공연을 했어요. 대강당에서도 하고 소강당에서도 하고, 한 열 번 쯤 공연했던 것 같아요.</p>
<p><center id="boxsolid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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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p>
<p><span class="detailB">Q. 가족의 협조가 없으면 그렇게 길게 활동하기 힘들 것 같은데요?</span><br>
노래패 구성원끼리 한 번 이야기가 있었어요. 우리끼리만 계속 하다보면 결국 노래패가 박살날 수 있으니, 와이프들이 같이 할 수 있게 하자. 노둣다리 부녀회 ‘부름’이라는 모임으로 와이프들끼리 모임을 따고 만들게 됐습니다. 부름은 수련회에도 참가하면서 함께하다, 5회 정기공연에서는 출연자로 함께 했습니다. 처음엔 남편들을 돕기 위해 만들어졌다가 1999년에는 부녀회 노래패 ‘부름’으로 정식 노래패가 됐죠.</p>
<p><span class="detailB">Q. 노래패 활동을 포기하고 싶은 적은 없으신가요?</span><br>
노래패 활동을 포기하고 싶은 적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진짜 그만두고 싶었던 적이 있었어요. 1997년인가 관리직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어요. 그때 노동조합 위원장 선거에서 현장조직 중심으로 선거를 치러서 현장조직 출신이 위원장이 됐었어요. 그래서 저에게 노조 조직실장 제안이 들어왔는데, 회사가 그걸 알고 현장관리직을 제안했어요. 만약 회사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노동조합 활동과 노래패를 그만 두어야 하는 상황인거에요. 고민도 없이 바로 거절했습니다. 그때 나 말고 대신 관리직으로 간 사람이 퇴직때까지 몇 십년을 그 자리에 있었어요. 그때 갔었어야 했는데... 하하하</p>
<p><span class="detailB">Q. 가장 좋아하는 민중가요는 어떤 노래일까요?</span><br>
‘영원한 노동자’라는 노래를 가장 애창하고 있습니다. 문대현 씨가 만들었고, 노래를 찾는 사람들 음반에 실리진 않았지만, 공연에서 불렸던 노래다. 노동자의 영원함을 표현한 곡이라고 생각합니다.</p>
<p><center id="boxsolid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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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enter></p>
<p><span class="detailB">Q. 노둣다리가 1999년을 마지막으로 거의 해산된 것 같습니다. 해산된 이유가 있을까요?</span><br>
자연스럽게 해산됐다고 보는 것이 맞아요. 노둣다리는 노동조합의 문선대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 노래패라는 자발성을 기초로 하였기 때문에 회비를 모아 활동하는 등 활동에 부담이 있는 점도 있긴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신입회원이 들어오질 않았어요. 회사가 현장직 신입사원을 채용을 안 했으니까요.</p>
<p><span class="detailB">Q. 지금은 노래패와 관련해 어떤 활동들을 하고 계시나요?</span><br>
옛날에 함께 했던 동지들과 가끔 모임을 갖기도 하고, 매년 열리는 인천노동문화제에 참가하는 정도가 다 인 것 같아요. 아직도 이런 저런 활동에 애정을 갖고 있지만, 예전만큼 열정적이지 않은 것도 사실이긴 해요. 그래도, 노동문화에 많은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p>
<p>감사합니다.</p>
<div class="plsong">
<p>인터뷰, 사진, 정리 : 단풍<br />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센터</p>
<p>이 글은 부평구문화재단 블로그에도 올라갑니다.</p>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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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최초의 노래패 노래이야기, 하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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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투혼 불나비의 가수, 최도은
문화도시부평과 함께하는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중가수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인터뷰 운영은 국내 최대 민중가요 아카이브 사이트 PLSong.com의 운영자 ‘단풍’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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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3>21세기 인천 민중가요를 이끌었던 아름다운 청년, 최경숙</h3>
<p>문화도시부평과 함께하는 <민중가요 아카이브>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중가수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인터뷰 운영은 국내 최대 민중가요 아카이브 사이트 PLSong.com의 운영자 ‘단풍’이 참여했다.</p>
<p>6회는 ‘아름다운 청년’의 최경숙님이 참여해주셨다.</p>
<p>80년대가 지나고서 민중가요는 더 이상 불리지 않았다는 인식이 많았지만, 2000년에 결성되어 10년 동안 매 년 수백회의 공연을 소화했던 노래패가 있었다. 바로 인천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아름다운 청년>이다. <아름다운 청년>은 2000년 6.15공동선언으로부터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 이르기까지 남과 북의 정상들이 만나 해빙무드가 무르익고 통일에 대한 희망들이 가득찼던 시기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노래패이다. 그래서인지 <아름다운 청년>의 노래들은 강한 생명력으로 현재도 많이 불린다. 대표였던 최경숙 씨를 만나 <아름다운 청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p>
<p><center id="boxsolid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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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p>
<p><span class="detailB">Q. 아름다운 청년(아청)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합니다. </span><br>
A. 인천 시민문화센터 음악위원회에 휘파람이라는 직장인 노래패가 있었어요. 휘파람에는 대부분 대학생 때 노래패 활동을 했던, 소위 인천 지역 대학에서 노래 쫌 한다는 사람들이 다 모여 활동을 했어요. 휘파람이 동아리 형식이었지만, 노동현장이나 미군기지반환운동, 수돗물 불소화 운동 같은 지역 현안이 있을 때마다 적극적으로 활동했어요. 휘파람 구성원 가운데서도 전업으로 노래활동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저 같은 경우에는 소위 민중가요에 드문 피아노 전공자여서 전업으로 활동하는 전문노래패를 만들자하는 기대가 더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전업으로 활동하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기 때문에 프로젝트 음반 형식으로 시작했습니다. 음반을 만들기 위해 사람들이 모이는 형식을 취한거죠. 대부분의 곡을 제가 작사 작곡을 했고, 당시 인천지역에 있는 노래패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했습니다. 제 기억에는 가톨릭청년연대 노래패 사람들도 함께 했었고, 일반 시민 가운데서도 함께한 분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1집 당시에는 멤버가 정확하다고 할 수 없었어요. 가수로 참여한 사람만해도 10명이 넘었고 세션으로 참여한 사람부터 음반을 예약해 준 1,500여 시민까지 모두 함께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1999년에 음반을 준비해서 2000년 1월경에 음반이 나왔고 3월경에 첫 공연을 했어요. 그렇게 음반이 나오고 아청이라는 이름으로 공연을 다녔는데, 공연이란게 낮에도 있고 주말에도 있고 그렇잖아요? 공연을 다니다보니 음반을 녹음했던 분들과는 다르게 공연 멤버가 정해지게 됐어요. 대략 2000년 7월경에 그때쯤 노래패 구성원이 어느 정도 구성되어 전업활동을 시작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p>
<p><span class="detailB">Q. 1집 음반은 프로젝트 음반답게 다양한 주제로 다양한 음악을 이용한 음악들인 것 같습니다.</span><br>
A. 1집 음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시도를 한 음반이라고 볼 수 있어요. 아청 음반을 작업할 때 작곡가로서 출정가 같은 스타일의 노래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좀 했었습니다. 90년대 중반 이후 조국과청춘(서총련 노래단)의 5집과 6집 나오면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했고, 집회에서도 이미 당시 학생들은 처음처럼 같은 춤추는 음악을 좋아하던 때였어요. 다양한 음악의 노래를 만드는 것이 1집의 의도였기 때문에 랩이 들어가는 ‘우주인’이라는 노래도 있었고 락 발라드 형식의 ‘이 노래를 기억해요’라는 노래도 있는 등 정말 다양한 노래들을 담으려고 노력했어요.</p>
<p><center id="boxsolid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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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p>
<p><span class="detailB">Q. 1집으로 활동을 시작하시고 1년이 지난 2001년에 <유월의 약속>이라는 음반을 냈습니다. 특이한 점은 1집을 CD와 카세트 테잎 모두 발매했는데, 음반 <유월의 약속>은 카세트 테잎으로만 냈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span><br>
A.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이 있은지 일주일도 안돼서 ‘유월의 약속’이라는 곡을 썼는데, 이 노래가 보급곡처럼 널리 퍼졌어요. 사람들이 6.15선언에 대한 노래를 찾을 때 우리가 시의적절하게 곡을 낸 거죠. 당시엔 인터넷이 활발하던 시절이 아니니까 음원보다 악보가 먼저 퍼졌어요. 악보만 보고 노래를 부르다보니 다양한 버전의 ‘유월의 약속’이 생산된거죠. 아청이 공연을 다녔지만, 그보다 악보가 빨리 퍼져서 심지어 작자 미상으로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서 급하게 통일과 관련된 노래들을 담아 만든 음반이 <유월의 약속>입니다. 카세트 테잎만으로 낸 이유는 2000년 당시만해도 CD는 약간 귀하고, 카세트 테잎을 아직 많이 듣던 시절이기도 했고, 음반 예산도 많지 않기도 하고 해서 그냥 카세트 테잎만으로 작업을 한거죠. 다양한 음악을 담으려던 1집을 내고 전문노래패로 활동하다 보니까 6.15남북공동선언 이후 통일국면이어서 통일노래에 대한 수요가 많았어요. 1집엔 통일 노래가 한 곡밖에 없었거든요. 음반을 내기보다는 일단 통일노래를 먼저 만들어서 활동을 하고 음반 <유월의 약속>은 그 노래들을 모아낸 것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아요.</p>
<p><span class="detailB">Q. <유월의 약속>이라는 음반 안에 있는 ‘유월의 약속’이라는 곡이 인기가 굉장히 많았어요. 예전 피엘송 홈페이지 댓글을 보면, 이 노래를 너무 많이 불러서 선배가 금지곡으로 지정할 정도였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인기가 많았던 이유가 뭘까요?</span><br>
A. 잘 모르겠어요. 이 노래가 6.15남북공동선언 일주일 만에 아청활동 하던 친구가 가사를 쓰고, 제가 곡을 쓰고 악보를 그려서 내보냈는데, 나도 모르게 전국으로 퍼졌어요. 굳이 생각해보자면, 당시 6.15선언 이후 남북교류가 시작되면서 금강산 관광도 할 수 있었죠. 2004년에는 아리랑 축전에 참가하기도 하는 등 통일 분위기가 상승세가 있었던 것이 한 요인이라 할 수 있겠죠. 그리고, 노래의 형태나 가사의 내용이 쉬워서 대중적으로 함께 부르기 좋았던 것 때문인 것 같아요.</p>
<p><center id="boxsolid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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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enter></p>
<p><span class="detailB">Q. 아청의 세 번째 음반은 <당신과 함께라면 할 수 있어요>죠. 이 음반은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의해 중학생이었던 효순이 미선이가 압사했던 사건(효순이미선이사건)과 관련된 음반처럼 보입니다.</span><br>
A. 당시 효순이미선이사건도 있었고, 2000년에 창당된 민주노동당에 지역운동이 결합하면서 마을활동과 지역활동이 활발해지던 시기였어요. ‘당신과 함께라면 할 수 있어요’라는 말은 광의적으로 뭐든지 할 수 있다.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이 많았던 때의 음반이에요.</p>
<p><span class="detailB">Q. 효순이미선이사건에 관한 노래 이야기를 조금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span><br>
A. ‘꺽여진 두 송이 꽃’은 후배가 곡을 써서 저에게 가사를 부탁해서 만든 노래에요. 효순이미선이사건 관련한 투쟁이 한창일 때 노래를 만들어서 부르고 다녔어요.</p>
<p><span class="detailB">Q. 같은 음반에 실려 있는 노래 가운데 ‘평화를 원해’라는 노래는 진정성 있게 다가와 저도 굉장히 감동했던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어떻게 만들어진 노래인가요?</span><br>
A. 2003년에 일어난 이라크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노래로 만든 노래에요. 이 노래는 저에게 되게 의미 있는 노래인데, 인천평화창작가요제를 탄생시킨 노래에요. 그것도 필요성 때문에요.</p>
<p><span class="detailB">Q. 어떤 의미인거죠?</span><br>
A. 예전 피엘송 홈페이지에 올라간 우리 노래들을 누가 듣고 있는지 궁금해서 살펴보곤 했는데, 평화를 원해라는 노래의 조회수가 갑자기 늘어났어요. 응? 뭐지? 하고 살펴보니까 댓글도 엄청 달려 있는데, 초등학생들의 댓글이었어요. 학교 수업에서 이 노래를 들었는데 너무 좋았다 이런 내용들이었죠. 학교에서 평화교육을 할 때 이 노래를 피엘송에서 같이 들었던거고, 아이들이 궁금해서 또 피엘송에 들어와서 보고 그러다보니 조회수가 확 늘어난거죠. 그래서 ‘아니 평화노래가 그렇게 없나?’ 싶어서 찾아보니까 한국에 평화노래가 없는거에요. 그러다 평화바람이라는 합창단을 만들었는데, 합창단 이름에 맞게 평화노래를 하려고 해도 평화노래들이 너무 없는거죠. 그러면 가요제를 만들어서 상금을 걸면 많은 뮤지션이 평화노래를 쓰지 않을까? 이게 시작이었어요. 피엘송이 의미있는 지표를 준거에요.</p>
<p><center id="boxsolid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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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enter></p>
<p><span class="detailB">Q. 그런 일이 있었군요. 피엘송 운영자로서 너무 뿌듯합니다. 2005년에 발표한 <바로 당신이었죠> 음반에 대한 이야기도 부탁드릴게요.</span><br>
A. 아청의 마지막 음반입니다. 프로젝트 음반으로 많은 준비를 했던 1집과는 다르게, 2집과 3집은 아청이 활동하면서 불렀던 노래들을 다듬어진 노래들을 모아 발표한 것이었어요. 이전 음반들은 제가 작사, 작곡, 편곡을 하고 연주까지 아청 스스로 거의 대부분을 해냈다면, 이원경 선배님께 편곡을 맡기고 연주 세션을 섭외하여 공들여 작업한 음반이었습니다. 대중이 듣기 친숙한 음악이라는 아청의 음악적 색깔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서 만든 음반이에요. 아청은 인천을 기반으로 한 노래패였고, 공연의 3분의 1정도가 인천지역의 주민을 만나서 하는 공연들이었기 때문에, 투쟁이나 혁명 같은 단어들이 거의 없어요. 4집에 포함된 노래들 가운데 ‘아리랑’이라는 노래를 빼면, 좀 부드럽고 아름다운 가사들로 만들어졌어요. 통일이나 투쟁같은 이야기를 이전에는 직설적으로 표현했다면, 4집에서는 다른 표현들을 사용한거죠. 굳이 말하자면, 1집과 4집이 아청스러운 음반이고 2집과 3집은 현장 대응용 음반으로 생각해요.</p>
<p><span class="detailB">Q. 인천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셨지만, 전국적으로 인기가 있는 노래패였습니다. 활동 당시 경제적으로는 좀 어땠나요?</span><br>
A. 당시 공연리스트가 모두 남아있지는 않지만, 일정의 3분의 1정도가 인천이었고 전국적으로 공연을 많이 다녔습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그렇게 좋진 않았어요. 제 기억에는 2003년, 2004년이 가장 공연이 많았던 해였지만, 지방공연이라고 해도 100만원 이상 공연비를 받는 경우가 드물었거든요. 지방공연비로 100만원을 받는다 해도 교통비 등 경비를 제외하면 실제 수익은 거의 없었어요. 게다가 공연비를 못 받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당시엔 공연당일 현금으로 공연비를 받는 것이 관례였는데, 당일은커녕 미수금 독촉을 해도 끝내 못 받은 곳이 많았어요. 그래서 4~50만원 정도 월 활동비를 받곤 해서, 좀 고민이 많았어요. 그럼에도 좋아하는 음악으로 사람을 만나고 무대에 서는 즐거움이 있었기에 노래패 활동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함께 노래하면 세상이 바뀔 것 같은 그런 기분들이 있으니 공연을 다니는 것이 하나도 힘들지 않고 재밌게 다녔던 것 같습니다.</p>
<p><center id="boxsolid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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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class="detailB">Ⓒ보건의료노조</span>
</center></p>
<p><span class="detailB">Q. 아청의 활동은 언제까지 이뤄졌나요?</span><br>
A. 아청은 원래 인천시민문화예술센터(시민센터)에 속해 있던 노래패였습니다. 시민센터에는 아청 뿐만 아니라 미술패, 영상패 등 전문적으로 문화예술활동을 하는 사람이 15명 정도가 모여 있었습니다. 전국적으로 활발해지는 민중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새로운 예술단체인 ‘새시대예술연합’이 준비되고 있었는데, 아청도 새시대예술연합에 합류할 것인지에 대해 2004년부터 거의 2년 동안의 논의를 거쳐 서울로 활동근거지를 옮겨 2005년 새시대예술연합에 합류하였습니다. 아청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니지만, 소속단체가 시민센터에서 새시대예술연합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저는 시민센터에서 사무처장 역할을 병행하고 있었고, 문화바람(생활문화예술기획단체)의 사업이 확장되면서 합류하지 못했었죠. 당시 아청 구성원 가운데 저를 제외한 모든 인원이 서울로 옮겨갔다가, 다들 이런 저런 사정으로 아청 활동을 그만두게 되면서 인천의 아청은 2011년 이후 자연스럽게 해산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p>
<p><center id="boxsolid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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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p>
<p><span class="detailB">Q. 아청 출신의 가수도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span><br>
A. 먼저 솔로가수로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이수진이 있습니다. 2008년에 1집을 내고 2013년에 2집을 냈어요. 촛불광장에서나 투쟁현장에서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업으로 활동하는 곳은 아니지만, 전교조 인천 노래패 ‘파란’에서 활동했던 정영숙씨가 아청에 함께했었습니다. 정영숙씨는 앞서 말했던 ‘유월의 약속’을 작사하기도 했었구요. 현대자동차 판매지부 노래패 활동을 하는 이창선 형도 아청 1집에서 같이 활동했었습니다.</p>
<p><span class="detailB">Q. 아청 이후 인천지역에는 전문노래패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span><br>
A. 저는 민중가요의 형태가 달라졌다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투쟁하는 현장이 명확하게 존재했고 활동하는 음악과 가수가 확실히 구분되어 있었다면, 2000년대 후반부터는 시간이 지날수록 노래의 주제나 활동 측면에서 대중가요와 민중가요의 구분 자체가 모호해졌다고 생각해요.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생각해요.</p>
<p><span class="detailB">Q. 요즘엔 민중가요들을 요즘은 많이 부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span><br>
A. 이제는 민중가요가 정신만 살아있는 것 같아요. 민중가요라는 게 결국엔 노래를 생산하고 불렀던 어떤 거대란 공동체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었는데, 공동체 자체가 많이 해체된 것 같아요. 민중가요라는게 결국 공동체를 노래하거나 공동체가 지향했던 사회를 노래했던 거라면, 지금도 그런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뮤지션들이 많다고 봅니다. 노래를 만드는 사람의 언어가 달라진거죠. 과거에 아청 음반의 ‘유월의 약속’을 만들 때의 마음과 지금의 내가 음악을 만드는 마음은 하나도 다르지 않아요. 그래서 난 지금 만드는 노래들고 민중가요라고 생각하면 민중가요가 맞아요. 그렇지만 지금 만드는 노래들을 굳이 민중가료하고 명명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p>
<p>감사합니다.</p>
<div class="plsong">
<p>인터뷰, 사진, 정리 : 단풍<br />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센터</p>
<p>이 글은 부평구문화재단 블로그에도 올라갑니다.</p>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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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도시부평 민중가요 아카이브 시리즈 <#5 이동언>(丹風)https://offree.net/entry/Protest-Song-Archive-52023-01-13T10:39:53+09:002022-11-19T07:16:24+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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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eldset class="ViewPostOfRelTag"><legend> 민중가요 아카이브 </legend>
<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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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기억하며 현재를 노래하는 노래벗, 손은화
문화도시부평과 함께하는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중가수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인터뷰 운영은 국내 최대 민중가요 아카이브 사이트 PLSong.com의 운영자 ‘단풍’이 참여했다.
4회는 ‘노래벗’의 대표...">
과거를 기억하며 현재를 노래하는 노래벗, 손...</span> <a href=/entry/Protest-Song-Archive-4 id="tagSearch" class="new" target="_blank">새창</a></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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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는 알아도 작곡가는 몰랐던 꿈찾기, 손호준
문화도시부평과 함께하는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중가요 가수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인터뷰 운영은 국내 최대 민중가요 아카이브 사이트 PLSong.com의 운영자 ‘단풍’이 참여했다.
3회는 민중가요 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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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최초의 노래패 노래이야기, 하태준
문화도시부평과 함께하는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중가수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인터뷰 운영은 국내 최대 민중가요 아카이브 사이트 PLSong.com의 운영자 ‘단풍’이 참여했다.
2회는 '노래이야기'로 활동한 하...">
인천 최초의 노래패 노래이야기, 하태준
문...</span> <a href=/entry/Protest-Song-Archive-2 id="tagSearch" class="new" target="_blank">새창</a></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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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투혼 불나비의 가수, 최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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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는 ‘노래선언’으로 활동한 최도...">
혁명의 투혼 불나비의 가수, 최도은
문화도...</span> <a href=/entry/Protest-Song-Archive-1 id="tagSearch" class="new" target="_blank">새창</a></li>
</ul>
</fieldset>
<h3>장애철폐 투쟁의 현장에서 영오, 이동언</h3>
<p>문화도시부평과 함께하는 <민중가요 아카이브>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중가수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인터뷰 운영은 국내 최대 민중가요 아카이브 사이트 PLSong.com의 운영자 ‘단풍’이 참여했다.</p>
<p>5회는 ‘인천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노래패 대표 이동언님이 참여해주셨다.</p>
<p>전국장애인철폐연대는 지하철 시위로 뜨거운 2022년을 보내고 있다. 인천장애인차별철폐연대도 지하철 시위에 힘을 보태고 있다. 차별당하는 소수의 곁에서 함께하며, 힘을 더하려는 민중가요의 연구자 입장에서 인천장차연 노래패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연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천장차연 노래패 영오는 장애인 단체에서 일하는 직장인 노래패의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서 활동하는 전국 유일의 민중가요 노래패이다. 인천장차연 노래패 “영오”의 대표 이동언 씨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p>
<p><center id="boxsolid2">
<a href="https://offree.net/uploads/plsong/Protest-Song-Archive-5.jpg" rel="lightbox[Offree]" class='highslide' onclick="return hs.expand(this, { slideshowGroup: 'first-group' })"><img src="https://offree.net/images/uploads/plsong/Protest-Song-Archive-5.jpg"></a>
</center></p>
<p><span class="detailB">Q. 반갑습니다. 대표님 소개 간단하게 부탁드립니다.</span><br>
A. 반갑습니다. 인천장차연 노래패 영오 대표 이동언입니다. 인천 뇌병변 장애인 인권협회에 소속되어 있는 인천 장애인 자립생활센터에서 일하고 있고, 장애인들의 배움터인 바래미야학에서 교사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p>
<p><span class="detailB">Q. 장애인 관련 단체에서 일도 하시고, 교사로 봉사활동도 하고 계시는데요. 인천장차연도 장애인 단체인가요?</span><br>
A. 인천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줄여서 인천장차연이라고 합니다. 전국장차연은 장애인을 차별하고 배제하지 않는 세상,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함께 사회에서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세상,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장애인이 스스로 행동하여 만들어나가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고요. 인천장차연은 전국장차연과 함께하는 인천지역 장애인 단체들의 모임입니다.</p>
<p><span class="detailB">Q. 장애인 단체 노래패니까, 구성원들도 장애인 단체 소속인가요?</span><br>
A. 대체로 그렇습니다. 인천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 소속인 김솔 대표님과 저, 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양준호 소장님, 민들레 야학에서 활동했거나 하고 있는 양준서, 추주식, 이지민, 이태민 선생님이 함께하고 있습니다.</p>
<p><span class="detailB">Q. 영오는 어떻게 만들어진 건가요?</span><br>
A. 저희 영오가 만들어진 것은 2019년입니다. 처음부터 영오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것은 아니고 양준호 소장님과 양준서, 추주식 선생님까지 세 분이 양양추라는 이름으로 인천장차연 4.20 차별철폐 투쟁 당시부터 무대에 올라 노래를 하곤 했어요. 양양추의 2019년 GM대우의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에서 우연찮게 제가 같이 공연하면서 팀을 만들어 활동해보자는 고민을 하게 됐고, 영오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했어요.</p>
<p><span class="detailB">Q. 우연히 같이 공연도 하고, 우연찮게 참가하신 분이 대표를 하고 있네요? 처음엔 다섯 분이 시작한 것 같은데 지금은 인원이 좀 늘어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span><br>
A. 양준호 소장님과 양준서 선생님이 사실 제 사촌 형들입니다. 그리고, 추주식 선생님은 준서 형의 학교 후배고요. 그러다 보니 제가 자연스럽게 떠안게 되었달까요? 가끔 의견을 나누다 작은 갈등이 생기기도 하지만 서로 오랫동안 알고 지냈기 때문에 큰 어려움 없이 팀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준서 형이 연극배우입니다. 민들레 야학에서도 연극 수업도 하고요. 연극 쪽 후배인 추주식 선생님과 이태님 선생님이 연극도 하시고 노래도 하시던 분들이라 자연스럽게 합류했습니다. 이지민 선생님은 투쟁 현장에서 함께 활동하는 동지로 만났는데 팀에 여성 파트도 필요했고 함께 활동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같이 노래하게 되었습니다.</p>
<p><span class="detailB">Q. 노래패 이름이 영오인데요. 특별한 뜻이 담겨 있나요?</span><br>
A. 김솔 소장님까지 다섯 명이던 시절에 이름을 정했는데, 구성원의 영어 이름에 전부 알파벳 O가 들어가거든요. 그래서 그냥 O가 들어간 다섯 명, 그래서 영오라고 정했었어요. 뭐 특별한 뜻은 없었던 거죠. 요즘은 ‘영원히 오늘을 기억하자’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p>
<p><span class="detailB">Q. 결성 이후 어떤 활동들을 하셨는지요? 공연 섭외는 좀 있나요?</span><br>
A. 저희가 정식으로 결성한 것이 2019년이었어요. 그리고 아시다시피 2020년부터 코로나-19로 인해 활동을 거의 하지 못했습니다. 저희 시작이 GM대우 비정규직 투쟁 집회에서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코로나-19로 활동이 어려웠지만, 그 속에서도 인천장차연 집회를 중심으로 활동을 해왔습니다. 인천장차연 집회에서 공연순서가 오면 자연스럽게 저희가 주로 노래를 합니다. 그 집회들은 항상 저희가 같이 다시는 곳이기도 하고요. 인천장차연 집회에서 노래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른 지역에서 열리는 집회에도 불러주시더라고요. 작년까지는 경기도나 서울에서 열리는 집회에도 초대받아 가곤 했는데, 올해는 안 불러주시네요. 인천에서는 올해 부평에서 열린 기후정의행동 집회에 초대받아 노래했습니다. 아무래도 저희가 직업으로 노래를 하는 팀도 아니고, 코로나-19로 인한 영향도 있다 보니 알려지지 못한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알음알음 섭외되는 곳만 다니고 있습니다.</p>
<p><span class="detailB">Q. 연습은 어떻게 하시는지 궁금합니다.</span><br>
A. 다들 직업이 따로 있기도 하고, 먼 곳에 살기도 하셔서 연습 시간을 맞추기가 많이 힘듭니다. 최대한 모여서 연습을 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어요. 정기적으로 모여서 연습을 하자고 이야기하지만, 현실이 쉽진 않네요. 그래도 일단 공연 섭외가 들어오면 사전에 모여서 연습을 꼭 하고 갑니다. 저희가 인천장차연 집회를 채워보자고 시작한 것은 맞지만, 원체 다들 노래를 좋아하니까요.</p>
<p><span class="detailB">Q. 영오는 주로 어떤 노래들을 부르나요?</span><br>
A. 주로 뮤지컬 노래를 많이 부릅니다. 뮤지컬 노래들이 원체 웅장하기도 하고 처음 듣는 분들도 호응이 좋아요. 뮤지컬 노래를 그대로 부르는 곡들도 있지만, 개사를 많이 합니다. 뮤지컬 영웅의 ‘그날을 기약하며’의 개사곡을 메인으로 부릅니다. 조국을 위한 투쟁을 결심하는 이 노래를 장애인을 차별하는 세상에 저항하는 우리와 잘 맞는 노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영웅의 ‘오늘의 이 함성이’라는 노래를 ‘우리의 이 함성이’로 개사해 부르고 있고, 레미제라블의 ‘내일로’도 우리에게 맞는 가사로 개사해 부르고 있습니다. 내일로는 사실 조금 합이 잘 안 맞기도 하고 원곡이 많은 사람이 투입되는 노래여서 적은 인원으로 노래하기에는 좀 부족한 면도 있지만, 그래도 열심히 부르고 있습니다. 또 뮤지컬 렌트의 시즌 오브 러브라는 노래도 하고요. 민중가요로 알려진 곡 가운데서 새물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렇게 주로 다섯 곡을 저의 영오의 레퍼토리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번 똑같은 노래를 하기 좀 뭐할 때, 우리함께되어를 부르고 있습니다. 새물의 경우에는 아는 분들도 많고 집회에서 다 같이 노래를 부르기 좋기 때문에 같이 하고 있습니다.</p>
<p><span class="detailB">Q. 뮤지컬을 부른다는 점이 독특합니다. 개사는 주로 어떻게 하시나요?</span><br>
A. ‘우리의 이 함성이’는 ‘투쟁을 같이하자’라는 의미가 좀 많이 담겨 있는 것 같고, ‘내일로’나 ‘그날을 기약하며’는 ‘이제 같이하자’는 느낌을 담았습니다. 시즌 오브 러브는 개사를 거의 하지 않았지만, 이 노래는 이미 그 자체로 모두를 아우르는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p>
<p><span class="detailB">Q. 레퍼토리 다섯 곡 가운데, 세 곡이 투쟁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네요?</span><br>
A. 그러게요. 사실 저 같은 경우에는 이 활동을 하기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뭐랄까 대국적인 그런 것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내 주변 사람들이 행복하고 잘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그게 참 힘든 일이더라고요. 제가 장애인 자립생활센터에서 일을 하다 보니까, 그런 마음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사회적인 문제들이 많아서 투쟁하지 않으면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전에 활동 보조 일을 알바로 했었는데, 그때 부양의무제가 폐지를 약속하겠다는 신문 기사에 그분이 너무 좋아하고 오열을 하시는 것에요. 그때 약간 마음이 좀 울렸달까요? 장애인 당사자들에게는 투쟁이 목숨, 삶과 직결되는 부분이구나 하는 생각이 그때부터 강하게 들었던 것 같아요. 내 주변의 사람들이 행복하고 잘 되기 위해서는 결국 투쟁을 안 할 수 없다는 그런 생각이요.</p>
<p><span class="detailB">Q. 투쟁하자는 노래를 주로 하시면서 흔히 말하는 민중가요는 선택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요?</span><br>
A. 특별히 민중가요가 싫어서 안 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생각 자체를 거의 안 했던 것 같아요. 처음 시작을 뮤지컬 곡으로 시작했는데 호응이 괜찮았고, 또 개사곡이 더 힘이 있어 보이는 느낌이고 하다 보니까 계속 뮤지컬 곡을 찾게 되는 것 같아요.</p>
<p><span class="detailB">Q. 대표님은 이 일을 하시기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원래 노래를 전공하신 건 아닌 거죠?</span><br>
A. 대학을 1학년 1학기에 그만두고 경찰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었습니다. 경찰을 준비했던 이유 중 하나가 세상에 억울한 사람이 없게 하고 싶었던 바람이었거든요. 어려서부터 장애인들을 만나고 함께할 기회가 많이 있었기 때문에 장애인의 처지에 대한 이해가 좀 더 와닿았던 것 같아요. 노래 전공자는 전혀 아니에요. 저는 그냥 노래를 좋아하고 부르는 것을 좋아할 뿐이고요. 다른 멤버들은 노래를 꾸준히 배우기도 하고 TV나 연극무대 등 다양한 경험이 있고, 무엇보다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실력자들입니다.</p>
<p><span class="detailB">Q. 뮤지컬 곡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거면 반주는 어떻게 하고 있나요? </span><br>
A. 주로 만들어져 있는 반주음악(MR)을 사용합니다. 연극 쪽에 계신 분들이 많다 보니 MR을 구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p>
<p><span class="detailB">Q. 활동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span><br>
A. 저희가 현재 7명인데 다 모이는 때가 거의 없습니다. 공연할 때마다 공연 인원이 바뀝니다. 매번 바뀌다 보니 연습을 해도 합이 잘 안 맞는 경우가 좀 있어요. 그리고, 저희가 섭외받는 집회들이 규모가 좀 작다 보니까 마이크가 부족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면 마이크 하나를 두 명 사이에 두고 노래하는 경우가 있는데, 나중에 확인해보니까 노래가 아예 나오지 않는 거예요. 그때 정말 망한 기분이었어요.</p>
<p><span class="detailB">Q. 영오는 출연료를 받고 활동하고 있나요?</span><br>
A. 그건 그때그때 달라요. 처음엔 출연료를 받으면 야학 같은 곳에 전액 후원을 하곤 했었는데, 최근에는 저희끼리 밥 한 끼 정도 먹고 차비 정도를 제하고 인천 장차연에 후원하고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인천장차연 노래패니까, 인천장차연 집회에서는 출연료를 받고 있지는 않고, 타 지역은 차비도 들고 하니까 조금…. 뭐 그 정도입니다.</p>
<p><span class="detailB">Q. 앞으로 어떻게 활동하실 계획이신가요?</span><br>
A. 구체적인 계획을 고민하고 있진 않습니다. 그래도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바램은 가지고 있습니다. 올해 처음으로 참가한 기후정의 집회 같은 경우, 저희는 그런 집회가 처음이었거든요. 함께 이야기하고 참여하면서 깨닫는 부분이 많았어요. 인천뿐만 아니라 다양한 곳에서 활동하고 싶습니다. 인천 퀴어 축제에서도 섭외가 몇 번 왔었지만, 코로나-19 사정이나 저희 사정 때문에 참가하지 못했어요. 그리고 우리 노래를 만들어 불러보자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작곡하는 것을 좋아하는 분이 계셔서 창작곡도 준비하고 있는 셈이죠.</p>
<div class="plsong">
<p>인터뷰, 사진, 정리 : 단풍<br />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센터</p>
<p>이 글은 부평구문화재단 블로그에도 올라갑니다.</p>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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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의 모든 것 1. 국산? 자네 이름은 '라벨 갈이'라네!(도아)https://offree.net/entry/Aliexpreess-Why-Buying2022-11-06T09:46:36+09:002022-10-30T10:02:58+09:00<p><div id="metaDesc" markdown="1">
<h2>알리에서 구입하는 이유</h2>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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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 src="https://offree.net/images/uploads/Aliexpreess-Why-Buying-02.jpg" border="0" align="left" />원래 "알리익스프레스 배송, 모든 걸 까발려 주마!"라는 조금 도발적인 제목으로 올리려고 했던 글이다. 그런데 2019년부터 계속 글을 추가하다 보니 달라진 부분도 많고 글도 길어져서 결국 글을 쪼개 올리기로 했다. 첫 글은 "왜 알리에서 구입해야 할까?"라는 의문을 풀기위한 글이다. 작은 위험만 부담하면 알리에서 구입하는게 훨씬 쌀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국산으로 알고 구입하는 브랜드를 반의 반 값에 구입하는 것도 가능하다.</p>
</div>
</p>
<div id="TOC">
<!-- TOC -->
<h3 id="series">목차</h3>
<p>링크 앞에 별표가 있는 글은 아직 작성하지 않은 글이다. 글을 작성하면서 별표를 없앨 예정이다.</p>
<ol>
<li>국산? 자네 이름은 '라벨 갈이'라네!
<ul>
<li><a href="https://offree.net/entry/Aliexpreess-Why-Buying#shinil">10년 넘게 버틴 신일 선풍기</a></li>
<li><a href="#name">르젠 vs 한경희생활건강</a></li>
<li><a href="#nes">남은 이야기, 오방난로</a></li>
<li><a href="#series">연재 예정</a></li>
<li><a href="#footnote">각주</a></li>
</ul></li>
<li>*<a href="https://offree.net/links/Aliexpress-Delivery-System" title="넌 뭐야? 정말 다양한 알리 배송업체!">넌 뭐야? 정말 다양한 알리 배송업체!</a></li>
<li>*<a href="https://offree.net/links/Aliexpress-Delivery-What" title="알리 배송업체, 넌 또 뭐야?">알리 배송업체, 넌 또 뭐야?</a></li>
<li>*<a href="https://offree.net/links/AliExpress-Standard-Shipping" title="알리 표준 배송, 빠르면 3일?">알리 표준 배송, 빠르면 3일?</a></li>
<li>*<a href="https://offree.net/links/Aliexpress-Post-System" title="국제 우편, 우체국을 확인해라">국제 우편, 우체국을 확인해라!</a></li>
<li>*<a href="https://offree.net/links/Aliexpress-J-Net" title="J-Net], 오기는 온다!">J-Net, 오기는 온다!</a></li>
<li>*<a href="https://offree.net/links/Aliexpress-CJ-Logistics" title="CJ Logistics, 답답하게 온다!">CJ Logistics, 답답하게 온다!</a></li>
<li>*<a href="https://offree.net/links/Aliexpress-YIQI-Express" title="YIQI Express, 의외로 빠르다!">YIQI Express, 의외로 빠르다!</a></li>
<li>*<a href="https://offree.net/links/Aliexpress-Buying" title="무엇을 샀을까? 그리고 구입 기준은?">무엇을 샀을까? 그리고 구입 기준은?</a></li>
<li>*<a href="https://offree.net/links/Aliexpress-Refund" title="환불, 의외로 쉽다!">환불, 의외로 쉽다!</a></li>
<li>*<a href="https://offree.net/links/Aliexpress-11-11-Festival" title="알리 광군제, 과연 쌀까?">알리 광군제, 과연 쌀까?</a></li>
<li>*<a href="https://offree.net/links/Aliexpress-NO-Continental-Mistake" title="대륙의 실수? NO. 진짜 실수한 제품이다!">대륙의 실수? NO. 진짜 실수한 제품이다!</a></li>
<li>*<a href="https://offree.net/links/Aliexpress-Cent-Deal" title="어떻게 0.01불에 120개나 구입했지?">어떻게 0.01불에 120개나 구입했지?</a></li>
<li>*<a href="https://offree.net/links/Aliexpress-China-is-China" title="China는 차이나! 2">China는 차이나! 2</a></li>
</ol>
</div>
<h3 id="shinil">10년 넘게 버틴 신일 선풍기</h3>
<p>2018년 일이다. 사무실에서 사용하던 <em>선풍기</em>가 고장났다. <a href="https://offree.net/entry/Online-vs-Offline-Cost" target="_blank"><i class="icon-link-2"></i></a><a href="/plugin/print/?id=989&type=in" onclick="return hs.htmlExpand(this, { objectType: 'iframe', slideshowGroup: 'third-group'} )" title="오프라인과 온라인의 가격차">신일 선풍기로 10년 넘게 여름을 지켜주던 녀석</a><sup id="fnref:신일"><a href="#fn:신일" rel="footnote" title="링크의 모델과 같은 모델은 아니다. 비슷한 시기에 구입한 모델로 벽걸이형이다.">[1]</a></sup>인데 갑자기 모터가 돌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리스(Grease) 문제인가 싶어서 그리스를 보충했다. 그러나 증상은 마찬가지였다. 스타터 캐패시터(Starter Capacitor) 문제인가 싶어서 캐패시터도 교체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보드 문제로 보고 <a href="https://www.shinil.co.kr/ko/customer/locator_list.asp" title="서비스 센터">신일 AS 센터</a><a href='https://www.shinil.co.kr/ko/customer/locator_list.asp' target='_blank'><i class="icon-link-ext"></i></a><sup id="fnref:AS"><a href="#fn:AS" rel="footnote" title="메일을 보내도 답이 없고 전화를 걸면 지역 업체 번호만 안내한다. 몇번을 시도한 끝에 간신히 지역 업체와 연락이 닿았지만 부품은 구할 수 없었다.">[2]</a></sup>에 연락했지만 "부속이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 부속만 있다면 한 10년은 더 쓸 수 있을 것 같은 선풍기였지만 어쩔 수 없이 버렸다.</p>
<div id="boxsolid2">
<p><a href="https://offree.net/uploads/Online-vs-Offline-Cost.jpg" rel="lightbox[Offree]" class='highslide' onclick="return hs.expand(this, { slideshowGroup: 'first-group' })"><img src="https://offree.net/images/uploads/Online-vs-Offline-Cost.jpg" align="left"></a><span class="detailB">구입한 SIF-14RANM</span></p>
<p>당시 구입한 제품 중 하나다. 이 제품은 목이 부러져서 벽걸이 선풍기 보다 먼저 버렸다. 역시 AS를 위해 고객센터에 연락해 봤지만 부품을 구할 수 없었다.</p>
</div>
<p>그리고 선풍기를 사기위해 <a href="https://offree.net/links/auction" title="옥션">옥션</a>과 같은 열린 시장을 뒤졌다. 뒤지다 보니 국내에서 판매되는 제품 대부분이 중국산이었다. 신일처럼 나름 지명도 높은 선풍기도 <em><abbr title="Original Equipment Manufacturer(주문자 상표 부착). 예, 아이폰. 주문자 설계로 생산, 주문한 업체 상표를 부착해서 생산하는 방식이다. 애플이 설계, 부품 공급까지 책임지기 때문에 생산 업체는 조립만 담당한다.">OEM</abbr></em>(Original Equipment Manufacturer, 원생산자) 모델과 <em><abbr title="Original Development Manufacturing(생산자 개발 방식). 예, 구글 레퍼런스폰. 생산자가 개발/생산을 책임지고 주문자 상표를 부착하는 방식이다. 구글이 안드로이드에 대한 기술을 제공하고 생산자가가 설계/생산하며 상표는 구글의 넥서스 상표를 붙였다. HTC의 넥서스원, LG의 넥서스5X, 화웨이의 넥서스6P 등이 있다. 샤오미 A1은 이 규칙에서 살짝 벗어났다.">ODM</abbr></em>(Original Development Manufacturing, 원생산자 개발 제조 방식) 모델이 함께 팔리고 있었다. 결국 브랜드는 무시하고 기능이 마음에 드는 선풍기를 구입하기로 결정했다.</p>
<p><em>BLDC</em> 모터(Brushless Direct Current Motor)가 전력 소모도 적고 소음도 적기 때문에 BLDC 모델을 구입하기로 하고 열린 시장을 검색해 봤다. 이렇게 해서 찾은 제품이 <a href="https://offree.net/links/dc520" title="35cm 초절전 벽걸이형 DC선풍기 에코팬 LZEF-DC520/ 르젠">르젠 LZEF-DC520</a>이다. 조금 더 저렴하게 파는 곳이 있을까 싶어 가격 비교를 해봤다. 르젠 선풍기와 생김새, 기능, 성능은 똑 같지만 브랜드만 다른 선풍기가 있었다. 바로 <a href="https://offree.net/links/hkhfan" title="[한경희생활과학/HEDF-SW7700/SP] 벽걸이 선풍기 / BLDC모터 / 초절전">한경희 생활과학의 HEDF-SW7700</a>였다.</p>
<h3 id="name">르젠 vs 한경희생활건강</h3>
<p>듣보잡 브랜드인 <em><a href="https://offree.net/links/dc520" title="35cm 초절전 벽걸이형 DC선풍기 에코팬 LZEF-DC520/ 르젠">르젠</a></em>과 스팀 청소기로 나름 이름을 얻은 <em><a href="https://offree.net/links/hkhfan" title="[한경희생활과학/HEDF-SW7700/SP] 벽걸이 선풍기 / BLDC모터 / 초절전">한경희</a></em> 선풍기가 똑 같은 게 이상해서 <a href="https://offree.net/links/dc520" title="35cm 초절전 벽걸이형 DC선풍기 에코팬 LZEF-DC520/ 르젠">르젠</a>과 <a href="https://offree.net/links/hkhfan" title="[한경희생활과학/HEDF-SW7700/SP] 벽걸이 선풍기 / BLDC모터 / 초절전">한경희</a> 제품을 더 찾아봤다. 그러다 보게된 상품평. "<em>르젠 선풍기를 구입했는데 제품에 동봉된 리모컨은 한경희 리모컨</em>"<sup id="fnref:삭제"><a href="#fn:삭제" rel="footnote" title="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HEDF-SW7700를 팔고 있는 인터넷 사이트는 없었다. 내가 확인한 상품평은 옥션의 현대Hmall이었는데 역시 제품이 사라지고 없었다.">[3]</a></sup>이라는 글이었다. "<em>같은 공장에서 생산되기 때문에 발생한 일</em>"이라는 답변이 붙어있었다. 같은 공장에서 생산된다고 해도 생산 라인이 다르면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런 일이 발생한 이유는 같은 라인에서 상표만 바꿔 달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한다.</p>
<p><center id="boxsolid2">
<a href="https://offree.net/uploads/Aliexpreess-Why-Buying-01.jpg" rel="lightbox[Offree]" class='highslide' onclick="return hs.expand(this, { slideshowGroup: 'first-group' })"><img src="https://offree.net/images/uploads/Aliexpreess-Why-Buying-01.jpg"></a></p>
<p>조금 골때리는 상황이다. 가격은 만원 정도 차이나는데 브랜드만 다르고 나머진 완전히 똑 같다. 얼마나 똑 같으면 제조자가 구분하지 못할까? 다만 이 제품에 대한 소문이 났는지 한경희생활건강에서는 이 제품을 단종시켰고 르젠은 외관을 살짝 달리해서 팔고 있다.
</center></p>
<p><em>가격, 브랜드만 다른, 똑 같은 제품</em>.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국내에서 <abbr title="Original Equipment Manufacturer(주문자 상표 부착). 예, 아이폰. 주문자 설계로 생산, 주문한 업체 상표를 부착해서 생산하는 방식이다. 애플이 설계, 부품 공급까지 책임지기 때문에 생산 업체는 조립만 담당한다.">OEM</abbr>으로 판매되는 제품 상당수는 <abbr title="Original Development Manufacturing(생산자 개발 방식). 예, 구글 레퍼런스폰. 생산자가 개발/생산을 책임지고 주문자 상표를 부착하는 방식이다. 구글이 안드로이드에 대한 기술을 제공하고 생산자가가 설계/생산하며 상표는 구글의 넥서스 상표를 붙였다. HTC의 넥서스원, LG의 넥서스5X, 화웨이의 넥서스6P 등이 있다. 샤오미 A1은 이 규칙에서 살짝 벗어났다.">ODM</abbr>이기 때문이다. <a href="https://offree.net/links/dc520" title="35cm 초절전 벽걸이형 DC선풍기 에코팬 LZEF-DC520/ 르젠">르젠</a>과 <a href="https://offree.net/links/hkhfan" title="[한경희생활과학/HEDF-SW7700/SP] 벽걸이 선풍기 / BLDC모터 / 초절전">한경희</a> 모두 같은 제품에 상표만 다르게 붙여 판매한다. 바로 <abbr title="Original Development Manufacturing(생산자 개발 방식). 예, 구글 레퍼런스폰. 생산자가 개발/생산을 책임지고 주문자 상표를 부착하는 방식이다. 구글이 안드로이드에 대한 기술을 제공하고 생산자가가 설계/생산하며 상표는 구글의 넥서스 상표를 붙였다. HTC의 넥서스원, LG의 넥서스5X, 화웨이의 넥서스6P 등이 있다. 샤오미 A1은 이 규칙에서 살짝 벗어났다.">ODM</abbr>이다. <abbr title="Original Development Manufacturing(생산자 개발 방식). 예, 구글 레퍼런스폰. 생산자가 개발/생산을 책임지고 주문자 상표를 부착하는 방식이다. 구글이 안드로이드에 대한 기술을 제공하고 생산자가가 설계/생산하며 상표는 구글의 넥서스 상표를 붙였다. HTC의 넥서스원, LG의 넥서스5X, 화웨이의 넥서스6P 등이 있다. 샤오미 A1은 이 규칙에서 살짝 벗어났다.">ODM</abbr>이면 샤오미 A1처럼 제조사 브랜드와 모델을 붙여 특정 회사에만 남품해야 한다. 그런데 르젠이나 한경희는 구매자가 원하면 원하는 대로 상표를 붙여 판매하는 제품도 많다. <abbr title="Original Development Manufacturing(생산자 개발 방식). 예, 구글 레퍼런스폰. 생산자가 개발/생산을 책임지고 주문자 상표를 부착하는 방식이다. 구글이 안드로이드에 대한 기술을 제공하고 생산자가가 설계/생산하며 상표는 구글의 넥서스 상표를 붙였다. HTC의 넥서스원, LG의 넥서스5X, 화웨이의 넥서스6P 등이 있다. 샤오미 A1은 이 규칙에서 살짝 벗어났다.">ODM</abbr>(또는 <abbr title="Original Equipment Manufacturer(주문자 상표 부착). 예, 아이폰. 주문자 설계로 생산, 주문한 업체 상표를 부착해서 생산하는 방식이다. 애플이 설계, 부품 공급까지 책임지기 때문에 생산 업체는 조립만 담당한다.">OEM</abbr>)이라고 하지만 <strong>라벨 갈이</strong>로 읽어야 하는 제품들이다.</p>
<p>예전에 조사한 <em>오방난로</em>는 무려 12개 모델, 8개사에서 판매하고 있었다. 기능은 같고 색상 또는 모양만 약간 다른 제품이다. AS를 빼면 똑 같다. <abbr title="Original Development Manufacturing(생산자 개발 방식). 예, 구글 레퍼런스폰. 생산자가 개발/생산을 책임지고 주문자 상표를 부착하는 방식이다. 구글이 안드로이드에 대한 기술을 제공하고 생산자가가 설계/생산하며 상표는 구글의 넥서스 상표를 붙였다. HTC의 넥서스원, LG의 넥서스5X, 화웨이의 넥서스6P 등이 있다. 샤오미 A1은 이 규칙에서 살짝 벗어났다.">ODM</abbr>에는 브랜드 값이 포함된다. 따라서 가격은 순중국산에 비해 비싸다. 유통업체 브랜드에 따라 브랜드 값도 달라진다. <a href="https://offree.net/links/dc520" title="35cm 초절전 벽걸이형 DC선풍기 에코팬 LZEF-DC520/ 르젠">르젠</a>과 <a href="https://offree.net/links/hkhfan" title="[한경희생활과학/HEDF-SW7700/SP] 벽걸이 선풍기 / BLDC모터 / 초절전">한경희</a>를 비교하면 한경희가 만원 정도 더 비싸다. 이름표만 바꿨는데 인건비를 만원 더 받는 셈이다. 이름표만 바꿔도 인건비를 만원 더 받을 수 있다면 옷까지 바꿔입으면 인건비는 얼마나 더 받을 수 있을까?</p>
<p>중국에서 직접 구매한 제품과 국내 브랜드 제품 차이는 "<em>1년 AS밖에 없는 셈</em>"이다. 그래서 몇년 전부터 필요한 물품 중 일부를 <a href="https://offree.net/links/ali" title="Online Shopping for Popular Electronics, Fashion, Home & Garden, Toys & Sports, Automobiles and More products - AliExpress">알리</a>를 통해 직구하고 있다. 순중국산은 QC(Quality Control)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a href="https://offree.net/entry/Made-in-China" target="_blank"><i class="icon-link-2"></i></a><a href="/plugin/print/?id=795&type=in" onclick="return hs.htmlExpand(this, { objectType: 'iframe', slideshowGroup: 'third-group'} )" title="메이드인 차이나는 뭐가 차이가 나도 차이가 난다.">10불 이상 제품</a>은 꽤 고민하고 구입하는 편이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할인할 때만 구입한다. 그리고 사소한 문제라도 발견되면 그 즉시 환불받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환불에 관한 건 다른 글로 다룰까 한다. 아무튼 2016년부터 지금까지 <a href="https://offree.net/links/ali" title="Online Shopping for Popular Electronics, Fashion, Home & Garden, Toys & Sports, Automobiles and More products - AliExpress">알리</a>에서 구입한 제품은 건수로는 500여건, 갯수로는 7~800개가 넘는다. 이제 이런 경험을 "알리의 모든 것"이라는 시리즈로 공유해 볼까 한다.</p>
<p><center id="boxsolid2">
<a href="https://offree.net/uploads/Aliexpreess-Why-Buying-02.jpg" rel="lightbox[Offree]" class='highslide' onclick="return hs.expand(this, { slideshowGroup: 'first-group' })"><img src="https://offree.net/images/uploads/Aliexpreess-Why-Buying-02.jpg"></a></p>
<p>[출처]: <a href="https://m.segye.com/view/20190523506320">2년간 짝퉁 아이폰 만들어 애플 속인 대륙의 '연금술사'…결국 감옥행 전망</a><a href='https://m.segye.com/view/20190523506320' target='_blank'><i class="icon-link-ext"></i></a><br />
중국인 남성이 2년여에 걸처 가짜 아이폰을 만들어 정품 새폰으로 교환 받았다고 한다. 중국이니까 가능한 일인 것 같다. 알리도 비슷하다. 정품으로 알고 사도 짝퉁이 오는 때도 있고 짝퉁으로 알고 샀는데 정품이 오는 때도 있다. 똑 같아 보이는 제품이지만 품질은 천지차며 짝퉁의 짝퉁의 짝퉁의 짝퉁까지 올라오는 사이트가 알리다.
</center></p>
<h3 id="nes">남은 이야기, 오방난로</h3>
<p><em>라벨 갈이</em>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려면 겨울철 인기 상품인 오방난로를 보면 된다. 안전번호가 <a href="http://safetykorea.kr/search/searchPop?certNum=SU07844-18003A&menu=search">SU07844-18003A</a><a href='http://safetykorea.kr/search/searchPop?certNum=SU07844-18003A&menu=search' target='_blank'><i class="icon-link-ext"></i></a>인 오방난로는 파생 모델이 무려 12개나 된다. 이 12개의 파생모델을 파는 업체도 8개나 된다. 이노크이든의 <a href="https://offree.net/links/ih-1854kq">IH-1854KQ</a>, 홍진테크의 <a href="https://offree.net/links/in-hh5">IN-HH5</a>, 제이닉스의 <a href="https://offree.net/links/jy-5hq">JY-5HQ</a>, 케이페이지의 <a href="https://offree.net/links/kp-1853kq">KP-1853KQ</a>, 사파이어의 SF-5H, <a href="https://offree.net/links/sf-h55">SF-H55</a>, 선영코리아의 <a href="https://offree.net/links/sy-500">SY-500</a>, 유니맥스의 <a href="https://offree.net/links/umh-1851kq">UMH-1851KQ</a>, <a href="https://offree.net/links/umh-1857kq">UMH-1857KQ</a>, <a href="https://offree.net/links/umh-1859kq">UMH-1859KQ</a>, <a href="https://offree.net/links/umh-2518kq">UMH-2518KQ</a>, 니코의 <a href="https://offree.net/links/wh-2222">WH-2222</a>가 여기에 해당된다. 만약 이 제품들이 <abbr title="Original Equipment Manufacturer(주문자 상표 부착). 예, 아이폰. 주문자 설계로 생산, 주문한 업체 상표를 부착해서 생산하는 방식이다. 애플이 설계, 부품 공급까지 책임지기 때문에 생산 업체는 조립만 담당한다.">OEM</abbr>이라면 파생모델을 이렇게 많은 회사에서 판매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애플이 <abbr title="Original Equipment Manufacturer(주문자 상표 부착). 예, 아이폰. 주문자 설계로 생산, 주문한 업체 상표를 부착해서 생산하는 방식이다. 애플이 설계, 부품 공급까지 책임지기 때문에 생산 업체는 조립만 담당한다.">OEM</abbr>으로 생산한 아이폰 파생모델을 삼성과 LG가 아갤폰, 아지폰로 팔 수 있을까?</p>
<p>요즘 판매되는 국산은 대부분 <abbr title="Original Development Manufacturing(생산자 개발 방식). 예, 구글 레퍼런스폰. 생산자가 개발/생산을 책임지고 주문자 상표를 부착하는 방식이다. 구글이 안드로이드에 대한 기술을 제공하고 생산자가가 설계/생산하며 상표는 구글의 넥서스 상표를 붙였다. HTC의 넥서스원, LG의 넥서스5X, 화웨이의 넥서스6P 등이 있다. 샤오미 A1은 이 규칙에서 살짝 벗어났다.">ODM</abbr>도 <abbr title="Original Equipment Manufacturer(주문자 상표 부착). 예, 아이폰. 주문자 설계로 생산, 주문한 업체 상표를 부착해서 생산하는 방식이다. 애플이 설계, 부품 공급까지 책임지기 때문에 생산 업체는 조립만 담당한다.">OEM</abbr>도 아닌 중국산 라벨 갈이다. 따라서 이런 제품을 구입할 땐 하나만 생각하면 된다. AS가 잘 되는지만 점검하면 된다. AS 능력이 있는지, 고객센터가 친절한지, 보증 기간이 지난 제품의 AS 비용이 타당한지와 같은 점만 확인해 보면 된다. 참고로 AS 능력이 없는 회사는 보증 기간 내 수리를 요청하면 교환을 해준다<sup id="fnref:교환"><a href="#fn:교환" rel="footnote" title="최근 두 제품을 AS 받았다. 하나는 선터치의 가스 버너이고 다른 하나는 바이마르의 전기 밥솥이다. 선터치 버너는 AS된 제품을 받았고 바이마르 밥솥은 교환을 받았다.">[4]</a></su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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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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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 id="fn:신일">링크의 모델과 같은 모델은 아니다. 비슷한 시기에 구입한 모델로 벽걸이형이다. <a href="#fnref:신일" rev="footnote">↩</a></li>
<li id="fn:AS">메일을 보내도 답이 없고 전화를 걸면 지역 업체 번호만 안내한다. 몇번을 시도한 끝에 간신히 지역 업체와 연락이 닿았지만 부품은 구할 수 없었다. <a href="#fnref:AS" rev="footnote">↩</a></li>
<li id="fn:삭제">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HEDF-SW7700를 팔고 있는 인터넷 사이트는 없었다. 내가 확인한 상품평은 <a href="https://offree.net/links/auction" title="옥션">옥션</a>의 <a href="https://offree.net/links/hmall" title="현대Hmall">현대Hmall</a>이었는데 역시 제품이 사라지고 없었다. <a href="#fnref:삭제" rev="footnote">↩</a></li>
<li id="fn:교환">최근 두 제품을 AS 받았다. 하나는 선터치의 가스 버너이고 다른 하나는 바이마르의 전기 밥솥이다. 선터치 버너는 AS된 제품을 받았고 바이마르 밥솥은 교환을 받았다. <a href="#fnref:교환" rev="footnote">↩</a></li>
</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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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가수 황현을 기억하며...(丹風)https://offree.net/entry/Remember-HwangHyun-Labor-Singer2023-01-12T15:59:46+09:002022-10-22T11:02:07+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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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이름이 많이 알려지진 않았던 노동가수 황현.</p>
<p>황현이라는 이름을 우리가 많이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엔, 그녀가 자신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p>
<p>전주에서 태어난 황현은 숙명여대 노래패 한가람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서울지역 대학노래패 협의회(서대노협)에서 활동하다가...
1992년 대통령선거 민중후보 백기완 선거운동본부(백선본) 문선대 활동했고, 1994년 환경에 대해 노래하는 초록지대 활동을 하다 1994년 결혼과 출산으로 활동을 중단했었다.</p>
<p>그리고, 2012년 다름아름으로 활동을 재개하고, 2013년 결성된 일과노래 활동을 지속하다가 2018년 희귀암 판정을 받고 투병하다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p>
<p><center id="boxsolid2">
<a href="https://offree.net/uploads/plsong/Remember-HwangHyun-Labor-Singer.jpg" rel="lightbox[Offree]" class='highslide' onclick="return hs.expand(this, { slideshowGroup: 'first-group' })"><img src="https://offree.net/images/uploads/plsong/Remember-HwangHyun-Labor-Singer.jpg"></a><br />
<신유아 제공>
</center></p>
<p>너무나도 간결하게 정리되어버린 약력인 이유는, 그는 늘 소수자들의 곁에 서 있었기 때문에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p>
<p>그의 주요 활동무대는 장애인, 비정규직들의 곁에서 함께 해왔고, 소위 장기투쟁사업장에는 늘 그가 함께 했다.</p>
<p>'다름이 아름다운 세상'이라는 뜻을 가진 "다름아름" 활동을 통해 소외된 이들의 곁을 지켰던 그는 2021년 10월 2일 세상을 떠났다.</p>
<p>그리고, 지난 10월 1일 비정규직 노동자 쉼터 '꿀잠'에서 그를 기억하는 모임이 열렸고, 그 기록이 여기에 있다.</p>
<p><center id="boxsolid2"></p>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zbMn2FO7Xl8"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
<p></center></p>
<p>노동가수 황현은 본인의 이름보다 민중가요 작곡가 김호철의 부인으로 많이 기억되었다.
당시 백선본 문선대에서 활동했던 어떤 이에 의하면 1992년 백선본 문선대를 이끌고 있던 김호철은 백선본 문선대에서 활동하던 서대노협의 황현에게 첫 눈에 반했다고 한다. 어떤 이에겐 그렇게 고집스럽던 김호철 선생님이 그에게만은 다정다감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황현의 음악인생에 김호철은 평생 함께하는 삶이었다.</p>
<p>황현의 이력 가운데, 특이한 것은 강변가요제에 출전했던 것.</p>
<p>당시만 해도 대학에서 노래패 활동을 하다가 강변가요제나 대학가요제를 통해 대중가수로 성공하려던 사람들이 많았었기에 황현의 강변가요제 출전 이력도 마찬가지로 오해할 수도 있겠으나... 가사를 보며 짐작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 노래는 사회주의에 대한 노래라고 한다.</p>
<p>1991년 소비에트연방의 붕괴가 사회주의운동 실패로 받아들여졌던 당시, 많은 사람들은 그 절망감에 운동을 떠났다. <a href="https://www.hani.co.kr/arti/society/labor/1062425.html" title="김문수 “문재인은 김일성주의자”…결국 국감장서 쫓겨나">신영복 선생님을 존경한다는 이유로 김일성주의자라는 소릴 국회에서 떠들었던 김문수</a><a href='https://www.hani.co.kr/arti/society/labor/1062425.html' target='_blank'><i class="icon-link-ext"></i></a>도 그때 떠났던 시절이다.</p>
<p>김문수가 누구인가? 노동운동을 하면서 구로동맹파업을 주도했다가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받고, 또 서울지역노동운동연합(서노련)을 결성해 심상정 국회의원과 함께 노동운동을 주도하고, 1986년 인천5.3항쟁을 주도해 또다시 감옥을 갔던, 그야말로 당시 노동운동계의 거목이었다.</p>
<p>그런 거목조차 "혁명의 시대는 갔다"며 민주자유당에 입당하던 시절이었다. 물론 <a href="http://www.goba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46" title="“사람이 어떻게 변하니?…노동운동계 전설이었던 김문수의 타락”">그 거목은 주변의 동지들에게는 '호랑이를 잡을 호랑이굴로 간다'고 말했다</a><a href='http://www.goba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46' target='_blank'><i class="icon-link-ext"></i></a>고 했다지만...</p>
<p>그런 시절에, 사회주의를 의미하는 노래-모르고 보면 전혀 알 수 없을 것 같지만-를 들고 강변가요제에 출전해서, 덜컥 본선 진출까지... 인터넷을 다 뒤져도 당시 영상은 구할 수가 없었다. MBC에 연락해 영상 구입이라도 해야하나 보다.</p>
<p><center id="boxsolid2">
그림같은 사랑(1993)<br>
글.곡 김호철/노래 황현<br>
<br>
오늘밤 이렇게 아무런 기억조차 할 수 없는<br>
나의 가슴속에 서러운 눈물이 앞을 가리우고 있는데<br>
너는 그림처럼 그 모습 그대로 서 있는지<br>
모른척 하지마, 어차피 나의 마음 모두 너의 작은 가슴속에 스미어<br>
더 이상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다는걸 너는 알잖아<br>
그림 같은 사랑<br>
사랑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는 나라 한 밤의 꿈속에 저 하늘 저편에<br>
나의 수줍은 비밀의 나라 사랑 더 이상 그릴 수도 없는 나라<br>
보랏빛 세상에 초록빛 노을에 그림 같은 사랑<br>
<br></p>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qQ4E1xZQi9c"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
<p></center></p>
<p>강변가요제 본선 진출에 그친 황현은 다시 1994년 초록지대를 결성하고 환경노래를 불렀다. 초록지대는 황현, 박은영, 박란희로 이루어진 여성트리오였다. 우리는 최근에야 기후위기를 이야기하며 환경운동이 활발해지고 있지만, 초록지대는 거의 30년전에 이미 이 문제를 고민하고 활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이대로면 인류가 멸망할 수 밖에 없다는 이 노래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로 인해 골치가 아픈 지금 나왔다고 해도 시의적절한 노래로 보인다.</p>
<p><center id="boxsolid2">
핵 (1994)<br>
글.곡 김호철/노래 초록지대<br>
<br>
아 아 핵, 아아 핵..<br>
아마 조상님의 실수로 만들어졌다고 생각을 하지<br>
손 하나 까딱하면 버섯구름 솟아올라 온 세상은 싹 하 ~<br>
하늘 높은 곳에 조물주가 울고 땅위에선 불타는 수 만년 일류의 역사<br>
수 천만년 전에 사라진 저 티라노사우르스 공룡의 화석처럼 우리도<br>
호모사피엔스 화석되어 먼훗날 이 땅위에 또 다른 인류가 산다면<br>
땅속에 묻혀버린 인간들의 화석을 보며..<br>
어쩌다가 인간들은 멸종했을까? 하늘에 별똥별이 떨어졌을까?<br>
바닷물이 넘쳐났나 땅바닥이 갈라졌나<br>
이렇게나 많고 많은 흑인 백인 황인종이 <br>
어쩌다가 한꺼번에 멸종했을까?<br>
어쩌다가 한꺼번에 멸종했을까?<br>
<br>
핵은 정말 훌륭한 에너지라고 누가 장담을 하고 있나<br>
히로시마 나가사끼 드리마일 체르노빌 그 다음은 어디<br>
내일의 태양도 아이의 웃음도 번개처럼 사라질<br>
지구의 회색빛 운명 어쩌다 인류가 이 못난 핵이란걸 만들었나<br>
세계에서 제일 땅이 넓다는 그 큰 러시아 조차도<br>
동해바다 맑은 물속에 핵 쓰레기 몰래 버리는 <br>
도대체 이세상은 어디까지 흘러가는지..<br>
핵 쓰레기 동해바다 떨어지더니<br>
용왕님도 방사능에 오염되셨어<br>
에너지가 모자라면 아껴쓰고 나눠쓰지<br>
이 무서운 핵에너지 꼭 써야만해?<br>
핵발전소 원자폭탄 한 방이면..아<br>
핵은 정말 지구별엔 쓸모가 없어<br>
<br></p>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QE32m93Ncv4"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
<p></center></p>
<p>결혼과 육아로 인한 휴식기를 지나, 또다른 민중가수였던 박은영과 다름아름을 결성하고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다름아름의 "천천히 즐겁게 함께"가 황현이 부른 노래들의 첫 번째 자리는 차지한 것은 이 노래가 황현의 삶과 닮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름아름에서 함께 활동했던 박은영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황현은 에너지를 주는 사람에 속했다. 투쟁현장에서 황현을 본 사람들은 ‘엄청나게’ 밝은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을거라고 했다. 황현 특유의 맑은 목소리는 다소 우울한 현장에 균열을 내고, 그 사이로 다시금 희망을 싹틔우는 존재였"다고 말했다.</p>
<p>천천히 즐겁게 함께 가다보면 언젠가 그림속 존재하던 그 나라가 오리라 믿었던 것은 아닐까?</p>
<p><center id="boxsolid2">
천천히 즐겁게 함께 (2012)<br>
글,곡,편:김호철 / 노래:다름아름<br>
<br>
앞만 쳐다보고 너무 서둘러서 왔나봐 <br>
지쳐진 사람 혹시나 없는지 살펴보고<br>
잠깐 쉬었다 가 또랑 냇가에 발 담그며 <br>
말없던 친구 함께 불러 얘기도 들어보자<br>
천천히 즐겁게 함께 힘들고 지칠수록 그렇게 <br>
세상이 우리를 거세게 떠밀어도 우린 절대 밀려나지마<br>
천천히 즐겁게 함께 마음이 급할수록 그렇게 <br>
새벽의 태양은 빨갛게 뜬다 천천히 즐겁게 함께<br>
<br>
* 천천히 즐겁게 함께 힘들고 지칠수록 그렇게 <br>
세상이 우리를 거세게 떠밀어도 우린 절대 밀려나지마<br>
천천히 즐겁게 함께 마음이 급할수록 그렇게 <br>
새벽의 태양은 빨갛게 뜬다 천천히 즐겁게 함께<br>
<br></p>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SbNKzuyroMU"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
<p></center></p>
<p>현이누나는 나에게도 참 좋은 사람이었다.
효창동 한 귀퉁이에서 작은 안경원을 열고 있던 시절, 자주 놀러와 수다를 떨고 가기도 했고... 무엇보다 조금은 서먹했던 호철이형과의 사이가 좋아졌던 것이 현이누나 때문이었다. 나에게 호철이형은 굉장히 고집스럽고, 엄격한데다, 무섭기까지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다가가기 어려웠는데, 현이누나 덕분에 호철이형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p>
<p>현이누나가 아픈 내내 찾아가 보질 못했던 미안함이 남아 있다. 항암중인 누나에게 혹시나 못된 병균이라도 옮길까봐...</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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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도시부평 민중가요 아카이브 시리즈 <#4 손은화>(丹風)https://offree.net/entry/Protest-Song-Archive-42023-01-13T10:40:48+09:002022-10-06T11:39:45+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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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eldset class="ViewPostOfRelTag"><legend> 민중가요 아카이브 </legend>
<ul>
<li><a href=/plugin/print/?id=3663&type=in id="tagSearch" onclick="return hs.htmlExpand(this, { objectType: 'iframe', slideshowGroup: 'fourth-group'} )" title="">문화도시부평 민중가요 아카이브 시리즈 <#3 손호준></a> <span title="
노래는 알아도 작곡가는 몰랐던 꿈찾기, 손호준
문화도시부평과 함께하는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중가요 가수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인터뷰 운영은 국내 최대 민중가요 아카이브 사이트 PLSong.com의 운영자 ‘단풍’이 참여했다.
3회는 민중가요 밴...">
노래는 알아도 작곡가는 몰랐던 꿈찾기, 손호...</span> <a href=/entry/Protest-Song-Archive-3 id="tagSearch" class="new" target="_blank">새창</a></li>
<li><a href=/plugin/print/?id=3662&type=in id="tagSearch" onclick="return hs.htmlExpand(this, { objectType: 'iframe', slideshowGroup: 'fourth-group'} )" title="">문화도시부평 민중가요 아카이브 시리즈 <#2 하태준></a> <span title="
인천 최초의 노래패 노래이야기, 하태준
문화도시부평과 함께하는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중가수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인터뷰 운영은 국내 최대 민중가요 아카이브 사이트 PLSong.com의 운영자 ‘단풍’이 참여했다.
2회는 '노래이야기'로 활동한 하...">
인천 최초의 노래패 노래이야기, 하태준
문...</span> <a href=/entry/Protest-Song-Archive-2 id="tagSearch" class="new" target="_blank">새창</a></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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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투혼 불나비의 가수, 최도은
문화도시부평과 함께하는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중가수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인터뷰 운영은 국내 최대 민중가요 아카이브 사이트 PLSong.com의 운영자 ‘단풍’이 참여했다.
1회는 ‘노래선언’으로 활동한 최도...">
혁명의 투혼 불나비의 가수, 최도은
문화도...</span> <a href=/entry/Protest-Song-Archive-1 id="tagSearch" class="new" target="_blank">새창</a></li>
</ul>
</fieldset>
<h3>과거를 기억하며 현재를 노래하는 노래벗, 손은화</h3>
<p>문화도시부평과 함께하는 <민중가요 아카이브>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중가수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인터뷰 운영은 국내 최대 민중가요 아카이브 사이트 PLSong.com의 운영자 ‘단풍’이 참여했다.</p>
<p>4회는 ‘노래벗’의 대표 손은화님이 참여해주셨다.</p>
<p>현재 알려진 민중가요 노래패 가운데 화제성이 높은 ‘노래벗’의 대표 손은화를 만나보았다. ‘노래벗’은 민중가요계에서 오랫동안 활동해 왔던 선배 가수들이 모여 만든 노래패로 창단한지 5년 정도 되었으나,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노래패이다. 매년 광주민주화운동 기념행사 가운데 하나인 ‘상설음악회 오월의 노래’ 무대를 중심으로 여러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노래벗’은 2021년 ‘1991년 열사투쟁 30주년 기념 온라인 콘서트: 노래는 영혼을 위로한다’로 민중가요계에서 화제를 낳은 바 있다.</p>
<p><center id="boxsolid2">
<a href="https://offree.net/uploads/plsong/Protest-Song-Archive-4-01.jpg" rel="lightbox[Offree]" class='highslide' onclick="return hs.expand(this, { slideshowGroup: 'first-group' })"><img src="https://offree.net/images/uploads/plsong/Protest-Song-Archive-4-01.jpg"></a>
</center></p>
<p><span class="detailB">Q.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노래패라고 여기저기 소문이 많이 났습니다. 본인 소개 먼저 부탁드립니다. </span><br>
A. 그대의 ‘노래벗’ 대표 손은화입니다. 반갑습니다. 만들어진 지 5년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노래패네요. 다른 노래패가 생겨서 가장 최근 노래패라는 딱지를 뗐으면 좋겠네요.</p>
<p><span class="detailB">Q. 대표님은 인천에서 오랫동안 살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원래 인천 출신은 아니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인천에 오셨나요?</span><br>
A. 2005년 4월부터 인천에서 살기 시작했으니까, 거의 20년째 살고 있습니다. 원래 부산에서 청년운동, 노동운동을 하고 있다가, 2004년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이 결성되고 처음으로 전국총파업을 진행할 때 서울에 올라왔어요. 그때 공무원노조에서 일하면서 서울에 임시 거처에 있다가 인천으로 완전히 옮기면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서구에 있었는데 부평 삼산동으로 이사 온 것이 대략 10년쯤 된 것 같아요.</p>
<p><center id="boxsolid2">
<a href="https://offree.net/uploads/plsong/Protest-Song-Archive-4-02.jpg" rel="lightbox[Offree]" class='highslide' onclick="return hs.expand(this, { slideshowGroup: 'first-group' })"><img src="https://offree.net/images/uploads/plsong/Protest-Song-Archive-4-02.jpg"></a>
</center></p>
<p><span class="detailB">Q. 대표님의 음악에 관한 개인적인 역사를 좀 알고 싶습니다. </span><br>
A. 처음 음악을 접한 것은 열 살 때, 그러니까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 합창단 활동을 한 것이었어요. 첼로도 배웠는데 그게 열세 살 때였습니다. 당시로서는 재능이 조금 있었던 것 같아요. 학교 대표로 도 대회에서 입상하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예술고 진학을 준비했는데, 집안 사정이 어려워서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고등학교 때가 제 인생에서 유일하게 음악과 멀어졌던 때인 것 같아요. 대학에 입학한 뒤 대학가요제에 나가고 싶어서 통기타 동아리 앞을 매일 서성이는데, 그 동아리가 한 달 동안 문을 열지 않았어요. 통기타 동아리 바로 옆이 농촌문제를 연구하는 써클(농동아리)이었는데 기타 치면서 민중가요를 하루종일 노래를 부르던 동아리였어요. 그때 우리 학교는 노래패가 없었고, 농동아리가 유일하게 민중가요를 부르는 동아리였어요. 들어가고 싶은 통기타 동아리는 문을 안 열지, 옆에 있는 동아리는 처음 들어봤지만 어쨌든 매일 노래를 부르잖아요.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 자체가 너무 좋았거든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대학가요제는 포기했어요.(웃음)</p>
<p><span class="detailB">Q. 민중가요 때문에 대학가요제를 포기했다고요?</span><br>
A. 민중가요 때문은 아니고, 학생운동을 하게 되면서 접었습니다. 제가 1990년에 대학에 입학했는데, 그때가 학생운동이 한창이고 임수경이 방북한 다음 해라 대학가가 많이 시끄럽기도 했고 1991년은 강경대 열사로 시작된 열사정국이었습니다. 또 한창 농산물 수입과 관련해서 우루과이라운드 투쟁이 한창이었는데, 농동아리다보니 아무래도 더 많은 관심을 갖고 활동을 하게 되었죠. 학교 내에서 등록금 투쟁을 비롯한 여러 투쟁들에 관여하게 되었어요. 그러다보니 전국 대학교들에 있는 농동아리 관련 책임자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p>
<p><span class="detailB">Q. 학생운동을 열심히 하시다 대학가요제만이 아니라 음악 자체를 못하시게 된 건가요?</span><br>
A. 아니오. 그렇진 않아요.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했던 것 때문에 악보만 보고 노래를 부를 수 있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다른 노래패하는 친구들보다 노래도 더 많이 알고 있고 그러다보니 교류가 많았죠. 나중에 학교에 노래패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학생운동을 좀 오래, 그러니까 9년 정도 해서 사회에 진출을 좀 늦게 한 편인데요. 본격적으로 문예활동을 시작한 것은 사회에 나와 청년운동을 하면서부터입니다. 부산지역 청년운동에서 문화관련 활동을 하면서 여러 활동을 했는데, 그중에 하나가 부산지역 청년 노래 모임을 만든 것이었어요. 이게 나중에 ‘사람들’이라는 노래패로 발전했죠. 그거 좀 더 발전하다 보니까 노래패가 여러 개 만들어졌고, 노동운동 쪽에서도 노래패가 만들어지고 그랬습니다. 당시에 부산은 문화의 불모지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여러 문화 활동들을 만든 것은 지금까지도 자부심으로 남아있습니다. 노동운동을 시작할 때까지 계속 청년운동에서 문화 활동을 했습니다.</p>
<p><span class="detailB">Q. 공무원노조가 생기면서 노동을 시작하시게 된 건가요? 공무원 노래패 활동도 함께 하신건가요?</span><br>
A. 2003년 공무원노조 부산본부에서 시작해 2004년 총파업 때문에 서울로 상경했다가 계속 노동운동에 있게 되었습니다. 공무원노조에서도 문화 활동 담당자로 일했습니다만, 제가 직접 노래패로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은 안됐어요, 노동조합에서 실무자로 일하면서 직접 문화활동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노동조합이 여는 집회나 행사, 문화제 같은 것들을 기획하고 실무를 담당해야 했습니다. 물론 공무원 노래패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나, 공연하는 무대나 하는 것에 관련이 있고 지원도 하지만 제가 직접 노래를 부른다거나 하진 않았어요. 술자리에서 농담으로 15년 동안 노래 한 자락 부르지 못했다고 이야기하죠.</p>
<p><span class="detailB">Q. 그렇게 오랫동안 노래를 부르지 않다가 ‘노래벗’을 만들었습니다. 그 이유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span><br>
A. 한 10년 전부터 건강이 무척 안 좋아졌어요. 건강 때문에 3년 정도 생계유지조차 어려운 상황에서 삶이란 무엇인가? 내 삶은 무엇인가? 라는 문제를 깊이 고민하게 되면서 생각의 전환이 되는 계기가 됐어요. 그때, ‘내가 제일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 ‘내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노래를 다시 시작해야겠다.’였습니다. 마침, 저 말고도 오랫동안 노래활동을 쉬고 있던 몇몇을 만나게 됐고, 뭘 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뭔가 만들면 재밌겠다는 막연한 생각정도였어요. 그러다 우리끼리 제주도 한 번 놀러가자고 의기투합이 돼서 2018년 2월초에 저랑 여명이(신여명, 본명 정영훈)형, 똑(본명 박명희) 세 명이 2박 3일 일정으로 제주로 여행을 갔는데,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폭설이 내렸어요. 사려니숲 주차장에서 3시간을 폭설에 갖혀 있다 겨우 숙소로 돌아왔는데 그 고생을 했는데도 서로 얼굴만 봐도 좋았어요.(웃음) 술 한잔 하면서 여명이 형이 곡을 쓰고, 저랑 똑이랑 같이 가사를 붙이다 보니 30분 만에 곡이 완성 됐죠. 그 노래가 우리 첫 노래인 “니가 참 좋다”에요. 그런 제주여행을 마치고 나서 아무래도 그냥은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3월경에 노래패로 만들어보자고 연락을 했더니 한 명도 빠짐없이 1초 만에 ‘그럽시다’ 해서 만들게 됐어요. 처음엔 여명이형이랑 똑이, 그리고 김목사(본명 김창현)까지 네 명이서 결성하게 되었죠. 3월에 결성하고 5월에 광주 ‘오월의 노래’에서 첫 공연을 했어요. 그러다 지금은 김목사가 나가고 이근철 선배가 들어와 구성원이 됐습니다.</p>
<p><center id="boxsolid2"></p>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jEIsAWV4gjg"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
<p></center></p>
<p><span class="detailB">Q. 결성과정이 드라마틱하네요. 구성원 소개도 간단하게 부탁드립니다. </span><br>
A. 여명이형은 지금은 서울에서 가극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희망새가 부산에서 활동하던 시절 가수면서 작곡자였습니다. 민중가요계 대선배인 박종화 선배의 음반 프로듀서로도 활동했었습니다. ‘노래벗’의 음악감독으로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똑이는 박종화 선배의 노래 가운데 유명한 “파랑새”를 1991년부터 불렀던 가수입니다. “파랑새”는 여러 가수가 불렀는데, 지금 박종화 선배가 최근에 만드는 여러 음반에는 모두 똑이의 목소리로 들어가 있습니다. 이근철 선배는 박종화 선배 노래 가운데, “갈 길은 간다”라는 노래를 불렀던 분이기도 하고요. 저는 부산지역 청년회에서 문화 담당을 하면서 부신지역 청년 노래패를 만들기도 하다가. 노동운동을 하면서부터 노래보다는 문화기획자로 활동을 꾸준히 해왔어요. 그리고, 지금은 나갔지만 김창현은 부산경남지역총학생회연합 노래단 ‘좋은 친구’ 가수 출신이구요. 저 빼고 여명이형, 똑이, 이근철 선배는 모두 조선대학교 노래패 함성 출신이기도 하고, 통일노래한마당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근철 선배는 1988년 통일노래한마당에서 “통일의 나라로 가자”라는 노래로 대상을 받은 분이고, 똑이와 여명이형은 3회 통일노래한마당에서 “다시 살아 만나리 통일조국”으로 백두상을 받았는데 이 곡을 여명이 형이 작곡했어요. 그리고 “남총련 찬가” 작곡가이기도 하지요. 우리 쪽에선 소위 박종화 사단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데, 제가 박종화 사단을 모두 빼온 거라고 할 수 있어요. (웃음)</p>
<p><center id="boxsolid2">
<a href="https://offree.net/uploads/plsong/Protest-Song-Archive-4-03.jpg" rel="lightbox[Offree]" class='highslide' onclick="return hs.expand(this, { slideshowGroup: 'first-group' })"><img src="https://offree.net/images/uploads/plsong/Protest-Song-Archive-4-03.jpg"></a>
</center></p>
<p><span class="detailB">Q. 다들 대단한 분들이 모이신 것 같습니다. ‘노래벗’은 어떻게 활동을 하고 있나요?</span><br>
A. ‘노래벗’ 구성원 모두 직장인이기 때문에 노래공연 자체가 많진 않습니다. 공연섭외를 요청하실 경우 최소 한 달 전에는 연락을 주셔야 합니다. 저희는 정해두고 있는 고정 공연이 하나 있는데요. 매년 5월 광주에서 열리는 ‘상설음악회 오월의 노래’는 고정된 일정으로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노래벗’은 광주의 정신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팀 같다고... 뭐 그건 당연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노래벗’이 만들어지고 첫 공연이 ‘오월의 노래’이기도 했고요. 매년 초에 활동 계획을 세울 때, ‘상설음악회 오월의 노래’를 가장 먼저 정하고 2월부터 공연준비에 들어갑니다. 또, 공연의 성격이나 구성원의 사정에 따라 공연을 ‘노래벗’의 이름으로 하기도 하고, 구성원 개인 가수로 공연하기도 해요. 공연의 성격과 내용에 따라 단체 공연보다 개인 가수 공연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되면 그렇게 진행하기도 합니다. 개인 가수 공연일 때엔 ‘노래벗’의 이름이 아닌 개인 가수 이름의 공연이죠. 하지만, 개인 가수 이름의 공연도 ‘노래벗’의 활동이라고 단원들은 생각합니다. 개인공연의 선곡 또한 대표인 저의 판단을 믿고 따라주고 있습니다. 참 고맙죠.</p>
<p><span class="detailB">Q. ‘노래벗’의 활동 가운데 가장 화제가 된 것이 “노래는 영혼을 위로한다”는 유튜브 공연인 것 같습니다. 1991년 열사투쟁 30주년 추모공연이라고 하던데요. 설명을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span><br>
A. ‘올해가 1991년 열사투쟁 30주년인데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하고 제가 화두를 던졌어요. 1991년 열사정국이라 불렸던 상황을 온 몸으로 겪은 사람들이라서 저의 말이 아니었어도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1991년 당시 박승희 열사 노제가 금남로에서 진행되었는데 추모곡을 여명이형이 만들고 똑이가 노래를 했습니다. 제목이 “너의 가슴에 불을 품고”입니다. 이런 깊은 인연이 있어요.
저희가 매년 5월에 열리는 ‘오월의 노래’ 공연이 끝나면 공연을 몇 주 쉬는데, 2021년엔 제주 삼달다방으로 갔죠. 그때 요즘 휴대폰도 화질이 좋으니까 노래 몇 곡 찍어서 유튜브에 올리면 어떨까 싶었던 거죠. 그 자리에서 선곡을 하고 음향 놓고 휴대폰으로 찍기 시작했죠. 영상 일하는 90학번 동기가 편집을 맡고 추가 촬영을 하기도 해서 35분짜리 영상을 완성해서 올리게 됐어요.</p>
<p><center id="boxsolid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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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enter></p>
<p><span class="detailB">Q. 노래 목록을 보니 못 보던 노래가 있어요. “30년이 흐른 뒤”라는 노래입니다. 창작곡인가요?</span><br>
A. 그 노래는 우리 창작곡이 맞아요. 우리가 모두 30년 지기들이니까, 이번에 녹음을 하면서 30년 전 그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면서 감정이 북받쳐 올랐어요. 제가 제일 많이 울기도 했어요. 영상에는 30년 전 우리 모습들을 사진으로 넣었죠. 유튜브에 올린 영상을 보고 고맙다는 인사를 많이 받았어요. 다들 우리 또래들이다 보니 감성들이 비슷하다 보니 많이들 공감해 줬던 것 같아요.</p>
<p><center id="boxsolid2">
<a href="https://offree.net/uploads/plsong/Protest-Song-Archive-4-04.jpg" rel="lightbox[Offree]" class='highslide' onclick="return hs.expand(this, { slideshowGroup: 'first-group' })"><img src="https://offree.net/images/uploads/plsong/Protest-Song-Archive-4-04.jpg"></a>
</center></p>
<p><span class="detailB">Q. 좀 화제를 돌려 보겠습니다. 대표님이 인천에서 오랫동안 살아오셨는데, ‘노래벗’의 인천활동이 좀 적은 건 아닙니까?</span><br>
A. 모두 직장을 가지고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활동하는 횟수 자체가 좀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최소한 한 달 전에는 연락을 줘야 가수들 개인 일정을 조율해서 공연을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구성 초기에는 잘 알려지지 않기도 한 것은 맞지만, 인천에서 활동이 적은 것이 아니라 코로나가 결정적이었어요. 민주노총 인천본부 집회 등 공연을 인천에서 여러 차례 준비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계속 취소됐습니다. 그러다 코로나로 인한 제한이 풀린 2022년 6월 4일 인천에서 열린 통일행사에서 오랜만의 공연을 했어요. 하지만, ‘노래벗’이 아닌 개인 가수의 공연으로 진행했습니다. 공연의 성격상 개인 가수 공연이 적합하다고 판단했거든요. 앞에서 말했다시피 단원들은 당연히 ‘노래벗’의 활동이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엔 개인 가수라고 생각할 수 있어서 ‘노래벗’의 활동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저희가 아직 앨범이 없어서인지 모르는 분들도 많습니다. 아무래도 앨범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좀 있으니까요. 인천에서 시민사회단체 행사 등에 많이 참여하고 있는데 만나보면 다들 ‘노래벗’을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p>
<p><span class="detailB">Q.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활동계획이 있으시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span><br>
A. 저희가 2년 전에 3개 도시 콘서트를 추진하다 코로나로 무산된 적이 있습니다. 올해부터 다시 차근차근 준비해 내년엔 전국콘서트를 준비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노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음반도 내년에는 내려고 합니다. 앞으로 열심히 활동하는 ‘노래벗’ 잘 부탁드립니다.</p>
<div class="plsong">
<p>인터뷰, 사진, 정리 : 단풍<br />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센터</p>
<p>이 글은 부평구문화재단 블로그에도 올라갑니다.</p>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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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도시부평 민중가요 아카이브 시리즈 <#3 손호준>(丹風)https://offree.net/entry/Protest-Song-Archive-32023-01-13T10:41:17+09:002022-08-08T07:11:45+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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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eldset class="ViewPostOfRelTag"><legend> 민중가요 아카이브 </legend>
<ul>
<li><a href=/plugin/print/?id=3669&type=in id="tagSearch" onclick="return hs.htmlExpand(this, { objectType: 'iframe', slideshowGroup: 'fourth-group'} )" title="">문화도시부평 민중가요 아카이브 시리즈 <#7 이주헌></a> <span title="
인천 최초 노동자 노래패 노둣다리, 이주헌
문화도시부평과 함께하는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중가수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인터뷰 운영은 국내 최대 민중가요 아카이브 사이트 PLSong.com의 운영자 ‘단풍’이 참여했다.
7회는 ‘노둣다리’의 이주헌님...">
인천 최초 노동자 노래패 노둣다리, 이주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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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a href=/plugin/print/?id=3668&type=in id="tagSearch" onclick="return hs.htmlExpand(this, { objectType: 'iframe', slideshowGroup: 'fourth-group'} )" title="">문화도시부평 민중가요 아카이브 시리즈 <#6 최경숙></a> <span title="
21세기 인천 민중가요를 이끌었던 아름다운 청년, 최경숙
문화도시부평과 함께하는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중가수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인터뷰 운영은 국내 최대 민중가요 아카이브 사이트 PLSong.com의 운영자 ‘단풍’이 참여했다.
6회는 ‘아름다...">
21세기 인천 민중가요를 이끌었던 아름다운 ...</span> <a href=/entry/Protest-Song-Archive-6 id="tagSearch" class="new" target="_blank">새창</a></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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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철폐 투쟁의 현장에서 영오, 이동언
문화도시부평과 함께하는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중가수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인터뷰 운영은 국내 최대 민중가요 아카이브 사이트 PLSong.com의 운영자 ‘단풍’이 참여했다.
5회는 ‘인천장애인차별철폐연대’...">
장애철폐 투쟁의 현장에서 영오, 이동언
문...</span> <a href=/entry/Protest-Song-Archive-5 id="tagSearch" class="new" target="_blank">새창</a></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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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기억하며 현재를 노래하는 노래벗, 손은화
문화도시부평과 함께하는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중가수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인터뷰 운영은 국내 최대 민중가요 아카이브 사이트 PLSong.com의 운영자 ‘단풍’이 참여했다.
4회는 ‘노래벗’의 대표...">
과거를 기억하며 현재를 노래하는 노래벗, 손...</span> <a href=/entry/Protest-Song-Archive-4 id="tagSearch" class="new" target="_blank">새창</a></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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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최초의 노래패 노래이야기, 하태준
문화도시부평과 함께하는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중가수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인터뷰 운영은 국내 최대 민중가요 아카이브 사이트 PLSong.com의 운영자 ‘단풍’이 참여했다.
2회는 '노래이야기'로 활동한 하...">
인천 최초의 노래패 노래이야기, 하태준
문...</span> <a href=/entry/Protest-Song-Archive-2 id="tagSearch" class="new" target="_blank">새창</a></li>
</ul>
</fieldset>
<h3>노래는 알아도 작곡가는 몰랐던 꿈찾기, 손호준</h3>
<p>문화도시부평과 함께하는 <민중가요 아카이브>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중가요 가수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인터뷰 운영은 국내 최대 민중가요 아카이브 사이트 PLSong.com의 운영자 ‘단풍’이 참여했다.</p>
<p>3회는 민중가요 밴드 <바람> 출신 손호준님이 참여해주셨다.</p>
<p>“노래는 태어난 순간 세상에 나가 자유로워야한다”고 생각했기에, 지금까지 얼굴 없는 가수로 남아있는 손호준을 인터뷰했다. 희미하게 지워져 버린 어릴 적 소중했던 꿈을 찾아 떠나자는 손호준은 인천에서 태어나 인하대 노래패 <출정>에서 민중가요 활동을 시작했다. 밴드 <바람>을 거쳐 지금은 <마장피>로 활동하면서 지금도 인천에서 살아가고 있는 민중가요 뮤지션이다. 대학 노래패 활동에서부터 전태일을 노래하던 밴드 <바람>, 그리고 세월호를 노래하는 <마장피>에 이르기까지 그의 음악적 행보는 민중가요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가 1996년 만든 대표곡 ‘꿈찾기’는 대학생 노래패들 사이에서 최근까지 불리고 있다.</p>
<p><center id="boxsolid2">
<a href="https://offree.net/uploads/plsong/Protest-Song-Archive-3-01.jpg" rel="lightbox[Offree]" class='highslide' onclick="return hs.expand(this, { slideshowGroup: 'first-group' })"><img src="https://offree.net/images/uploads/plsong/Protest-Song-Archive-3-01.jpg"></a>
</center>
<span class="detailB">Q. “꿈찾기”가 만들어진 이야기부터 부탁드립니다.</span></p>
<p>A. 제대가 8개월쯤 남은 군악대 병장 시절이었는데, ‘앞으로 뭘 해야 되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꿈들, 어렸을 때 꿈들, 그리고 지금부터의 꿈들 말이죠. 그러다보니 또 그 꿈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고민하다 만들어진 노래죠. 그래서 알려진 것처럼 신나는 노래는 아니었어. 느리고 듣다보면 조금 슬퍼지기도 하는 그런 노래였어요.
군 입대 전부터 학교 중앙노래패 출정에서 활동했는데, 평소 후배나 친구들에게 우리 생각을 표현하는 노래들을 만들고 불러야 한다고 말하곤 했었어요. 1997년 노래패 정기공연 준비과정에서 우리의 생각과 고민을 표현하는 창작곡으로 공연하자고 제안하면서 군에서 만들어뒀던 “꿈찾기”를 내놓게 됐어요. 정기공연 분위기에 맞춰 좀 신나게 편곡도 했고요. 그때 공연을 보러 온 서울지역대학생노래패협의회(서대노협) 친구들의 제안으로 서대노협 창작곡 발표회에서도 불렀고, 서대노협 음반인 서울하늘 3집에도 실렸고요. 2002년 전교조 서울지부 노래패 ‘해맑은 웃음을 위하여’ 선생님들이 다시 불러줘서 또 음반에 실리게 되었고요.</p>
<p><center id="boxsolid2"></p>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LtX8tyWFPmU"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
<p></center></p>
<p><span class="detailB">Q. 인하대 중앙노래패 출신이시군요. 노래패 활동으로 음악을 시작하시게 된 건가요?</span></p>
<p>A. 아니에요. 어렸을 때 옆집 사는 누나가 가르쳐주곤 했어요. 그 누나 어머님이 제가 피아노 좀 치는 것 같다고 저희 집에 말해서 피아노학원을 다니기도 했고요. 그땐 피아노학원 다니는 게 싫었거든요. 피아노학원 가방이 분홍색이어서 남자애들이 놀리기도 했고, 짬뽕이나 발야구 같이 놀고 싶은데, 학원에 가야하니까... 중학교 때 기타를 독학으로 배우기도 했는데, 고등학교 1학년 중퇴하고 검정고시 준비하면서 집에 있는 피아노로 작곡도 좀 해보고 그러면서 음악에 대해 알아가게 된 것 같아요. 그러는 와중에 인하대학교에 1994년에 입학하게 된 거죠. 출정(인하대 중앙노래패)은 어떤 목적의식이 있어서 들어간 건 아니었어요. 인하대 3학년이던 저희 형이 제 의지랑 상관없이 노래패로 보냈어요. 민중가요를 하는 동아리인지도 몰랐어요. 그치만, 제 성향하고 비슷하긴 했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도 노찾사 노래를 좋아하긴 했거든요. 그렇게 노래패 활동을 하게 된거에요.</p>
<p><center id="boxsolid2">
<a href="https://offree.net/uploads/plsong/Protest-Song-Archive-3-02.jpg" rel="lightbox[Offree]" class='highslide' onclick="return hs.expand(this, { slideshowGroup: 'first-group' })"><img src="https://offree.net/images/uploads/plsong/Protest-Song-Archive-3-02.jpg"></a>
</center></p>
<p><span class="detailB">Q. 원래 인천 출신이신거죠?</span></p>
<p>A. 네. 맞아요. 태어나서 지금까지 계속 인천에서 살았어요. 남인천우체국 근처에서 태어났고, 대학 때 부평으로 이사했죠. 산곡동 현대아파트에 살면서 밴드 바람을 하다가 음악을 접고, 직장생활하다 결혼도 하면서 그렇게 살고 있어요. 지금은 중구 영종도에 살고 있고요.</p>
<p><span class="detailB">Q. 밴드 바람에 대해서도 말씀 부탁드려요.</span></p>
<p>A. 서대노협 창작곡 발표회 뒤풀이에서 서울대 메아리 출신 김병오 선배가 함께 활동하자고 제안을 했어요. 김병오 선배의 제안을 받아들여 전교조 서울지부 교사 노래패 ‘해맑은 웃음을 위하여’ 공연 세션으로 시작했어요. 김병오 선배의 제안으로 베이스는 김병오 선배, 기타는 김현석 씨, 드럼엔 김영직 씨, 그리고 건반을 제가 맡아서 밴드 바람을 결성하게 됐어요. 밴드 바람의 음악은 우리 생각을 표현하는 그런 작업이었어요. 사회적 의식보다 개인적 고민들을 풀어내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조금 모호한 색깔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긴 했어요. 하지만 의미를 알고 나면 좀 달라지죠. 예를 들면, 1집 엔딩 곡으로 있는 “오 나의 젊은 사람아”의 경우,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그냥 사랑 노래로 들리지만, 의미를 전해주면 아, 전태일 열사에 대한 노래구나 하는 거죠. 정확하게 누군가를 대변하면서 우리의 색깔을 드러냈으면 오히려 대중들한테도 이 사람들이 이런 노래를 부르는 거였구나 그랬을 텐데, 그 색깔을 보여주는 건 무대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p>
<p><center id="boxsolid2">
오 나의 젊은 사람아</p>
<div style="text-align: right">작사 김병오<br>
작곡 김현석</div>
<div style="text-align: center">세상은 슬픈거라고 그렇게 믿던 나에게 <br>
세상의 아름다움을 사랑을 보여준 그대 <br>
그대여 나의 꿈이여 내일로 트인 하늘 위 <br>
고요한 별빛의 노래 내 마음속에 흐르고 <br>
때론 비바람도 불겠지 그 길 위에도 <br>
아마 눈물도 흐를거야 언덕에 서면 <br>
하지만 기억해야지 그대가 전해준 노래 <br>
그대 일생을 모두 불태워 세상에 뿌렸던 <br>
밝은 진실과 참된 용기와 슬픈 사랑과 <br>
그대 가슴에 담겨져 있던 꿈 모두 이제는 내 가슴속에<br>
우린 잊지 않으리 잠시 떠난 그대를 우린 잊지 않으리 잠시 떠난 너 <br>
오 나의 젊은 사람아 내일로 트인 하늘 위 <br>
아침이 밝아올 때 더욱더 투명한<br></div>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WHujMS_DC6Y"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
<p></center></p>
<p><span class="detailB">Q. 그럼 밴드 바람 시절의 음악은 어떤 거죠?</span></p>
<p>A. 그냥 우리는 우리가 하고 싶은걸 그냥 음악으로 표현할 뿐이었어요. 밴드 바람이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걸 더 많이 시도했다면 밴드가 잘되고, 그런걸 떠나서 음악적 색깔이 사람들에게 밴드 바람의 노래는 이런 노래야 하고 알 수 있게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시도를 잘 안했던 것 같아요. 밴드 바람을 시작하면서 음악적으로 큰 꿈을 가지고 계획적으로 시작한 것도 아니었고, 우연치 않은 기회에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의 연장선과 딱 맞물리면서 한 번 해보자 이런 식이었던 거죠. 전 그냥 사람들이 노래를 들을 때, 의미를 알고 아, 이런 거였구나 하는 것이 어필하는 측면에서는 더 좋았던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이선희의 “그리운 나라”라는 노래를 보면 ‘진달래꽃 유채꽃 한 아름을 가슴에 품어보면 언제나 꿈을 꾸네’라고 시작해요. 이게 노래를 만든 송시현 씨의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진달래꽃과 유채꽃이 엄청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이건 북한을 상징하는 거다. 유채꽃은 한라산. 저는 그런 느낌을 받았는데 사람마다 다를 순 있겠죠. 현실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보다 그냥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잘 표현해 놓으면 된다. 굳이 우리가 ‘이렇게 돼야 돼’라고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던 거죠. 은유적으로 좀 많이 표현하고 싶었어요.</p>
<p><span class="detailB">Q. 그러다 밴드 바람 활동을 중단하면서 음악도 중단하신 거죠?</span></p>
<p>A. 밴드 바람 활동을 정리한 것이 2005년 7월이었어요. 결혼도 하고 했으니까 생활을 위해 직장을 다녀야 해서 활동을 중단한 거죠. 하지만, 개인적으로 곡은 계속 썼어요. 생활하면서도 멜로디가 떠오를 때도 있고 그랬거든요. 예를 들면 세월호 사건 같은 경우, 그냥 사건을 딱 접하는 순간 먹먹해졌거든요. 저거 어떻게 해야지 이런 생각이 들고, 실시간 중계를 보면서 가슴이 너무 아팠어요. 이대로는 출근을 못하겠다 싶어서 피아노 뚜껑을 열고 모티브를 좀 만들어서 노래를 만들었어요. 그 노래가 “나를 잊지 말아요”에요. 아주 퀄리티 있진 않지만, 조금씩 만들어 놓았던 나만의 음악세계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유튜브에 올렸어요. 그냥 사람들이 들었을 때 위로가 되면 더 좋고, 힘이 되면 더 좋은 그런 것들이죠.</p>
<p><center id="boxsolid2"></p>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i_XWCOdloV0"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
<p></center></p>
<p><span class="detailB">Q. 직장을 그만 두셨다고 들었어요. </span></p>
<p>A. 많이 아팠어요. 4년 전 어느 날 잠에서 일어나려는데 몸이 새우처럼 휘면서 경련이 일어나고,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엄청난 고통이 왔어요. 병원에 가보니 모든 수치가 정상인데 당만 너무 높대요. 아마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는 것 같으니 쉬어야 한대요. 내 몸이 아프다는 신호를 보내는 거였죠. 이걸 무시하면 돌연사할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내가 써놨던 것들을 언젠가 좀 정리를 해줘야지 했는데, 이러다 정리도 못하고 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음악들은 제가 지금까지 해왔던 음악과 전혀 다른 색깔이나 정신세계에 대한 것들이 많아요.</p>
<p><center id="boxsolid2">
<a href="https://offree.net/uploads/plsong/Protest-Song-Archive-3-03.jpg" rel="lightbox[Offree]" class='highslide' onclick="return hs.expand(this, { slideshowGroup: 'first-group' })"><img src="https://offree.net/images/uploads/plsong/Protest-Song-Archive-3-03.jpg"></a>
</center></p>
<p><span class="detailB">Q. 최근에는 ‘마장피’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시고 계신 거죠? ‘마장피’가 무슨 뜻인가요?</span></p>
<p>A. 그냥 ‘마장’과 ‘피플’의 합성어에요. 마장은 말들이 모여 있는 곳, 경마장 할 때 그 마장이에요. 예전에 멜로디는 계속 나오는데 가사가 잘 안 나와서 술을 한 잔 하는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왜 옛날 사람들이나 시인들은 호가 있는 걸까? 이름이 달라지면 내가 좀 달라질 수 있을까? 웨인이 배트맨으로 사는 것처럼 다른 이름으로 살아가볼까 할 때 생각났던 게 ‘마장’이었어요. 인디언 부족에서 쫓겨났던 한 남자 주인공이 나중에 돌아와서 히어로가 되는 그런 영화를 어렸을 때 본 적이 있어요. 주인공이 타고 온 검정색 말이 백마하고 사랑에 빠지는 것 같은 그런 장면이 있었어요. 그 모습이 너무 인상 깊었는지, 다른 이름을 생각했을 때 ‘마장’이라는 말이 딱 떠오르더라고요. 저렇게 순수하게 열정적이고 아름다우면 좋겠다. 그런 마음으로 ‘마장 손호준’으로 했어요. 그러다 말들이 저한테 보여줬던 그 모습처럼 사람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싶어서 피플과 합성해서 ‘마장피’로 정한 거죠.</p>
<p><span class="detailB">Q. 최근에도 파업 현장이나 투쟁 현장에서 공연을 하시기도 해요. 앞으로 어떤 활동들을 해 나가실 계획인가요?</span></p>
<p>A. 제 노래가 힘이 될 수 있다면, 그런 자리에서 내가 노래를 부르는 것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말은 잘 못하지만 그래도 그게 힘이 된다면 그런 것이 연대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활동 자체만으로 제가 규정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밴드 바람 속의 제 음악이 있고, 일상생활에서 하는 제 음악이 또 있고 그런 거죠. 유튜브를 시작하고 나서부터 오히려 저를 알게 됐다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전까지 보여주는 것만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제가 파업현장에서 노래한다고 하면 그냥 저 친구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구나 이 정도면 좋은데, 또 어떤 사람들은 저건 빨갱이야 할 거. 뭐 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면 그런 거구, 저는 그냥 함께한다는 것에 만족해요. 아마 직업이었다면 만족 못했을 수도 있고요.</p>
<div class="plsong">
<p>인터뷰, 사진, 정리 : 단풍<br />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센터</p>
<p><a href="https://m.blog.naver.com/bupyeong_art/222837629440">https://m.blog.naver.com/bupyeong_art/222837629440</a><a href='https://m.blog.naver.com/bupyeong_art/222837629440' target='_blank'><i class="icon-link-ext"></i></a></p>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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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도시부평 민중가요 아카이브 시리즈 <#2 하태준>(丹風)https://offree.net/entry/Protest-Song-Archive-22023-01-13T10:41:46+09:002022-07-02T19:06:32+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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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eldset class="ViewPostOfRelTag"><legend> 민중가요 아카이브 </legend>
<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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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최초 노동자 노래패 노둣다리, 이주헌
문화도시부평과 함께하는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중가수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인터뷰 운영은 국내 최대 민중가요 아카이브 사이트 PLSong.com의 운영자 ‘단풍’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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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최초 노동자 노래패 노둣다리, 이주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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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인천 민중가요를 이끌었던 아름다운 청년, 최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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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철폐 투쟁의 현장에서 영오, 이동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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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기억하며 현재를 노래하는 노래벗, 손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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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는 알아도 작곡가는 몰랐던 꿈찾기, 손호준
문화도시부평과 함께하는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중가요 가수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인터뷰 운영은 국내 최대 민중가요 아카이브 사이트 PLSong.com의 운영자 ‘단풍’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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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l>
</fieldset>
<h3>인천 최초의 노래패 노래이야기, 하태준</h3>
<p>문화도시부평과 함께하는 <민중가요 아카이브>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중가수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인터뷰 운영은 국내 최대 민중가요 아카이브 사이트 PLSong.com의 운영자 ‘단풍’이 참여했다.</p>
<p>2회는 '노래이야기'로 활동한 하태준님이 참여해주셨다.</p>
<p><span class="detailB">Q. 대학 시절에도 노래패 활동을 하셨던건가요?</span></p>
<p>A. 음악은 옛날부터 좋아했어요. 기타도 좀 쳤구요. 선배 형이 노래패를 만들려고 준비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 형이 노래패를 같이 만들자, 그래서 시작을 한 게 88년도에요. 인천대에 노래패가 만들어졌고, 인문대에도 노래패가 없길래 89년 90년 즈음에 인문대 노래패를 만들었어요.
인천대 노래패는 처음에 이름을 ‘아침이슬’이라고 했는데, 이름이 운동성이 좀 약한 것 같다 그래서 중간에 이름을 '함성'으로 바꿨어요.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박은영이라는 가수가 있는데, 그 친구가 우리 노래패 출신이에요. 함성은 지금도 인천대에 남아 있어요. 지금은 민중가요를 부르는 것 같지는 않아요. 인문대 노래패는 해체됐어요. 캠퍼스를 송도로 옮기면서 동아리방이 없어졌어요. 동아리방이 없고 그러니까 지지부진하다 없어졌다는 이야길 들었죠.</p>
<p><center id="boxsolid2">
<a href="https://offree.net/uploads/plsong/Protest-Song-Archive-2-01.jpg" rel="lightbox[Offree]" class='highslide' onclick="return hs.expand(this, { slideshowGroup: 'first-group' })"><img src="https://offree.net/images/uploads/plsong/Protest-Song-Archive-2-01.jpg"></a>
</center></p>
<p><span class="detailB">Q. 노래이야기를 어떻게 만들게 되신건가요?</span></p>
<p>A. 대학을 졸업할 즈음은 노동 현장에 대한 투신을 권유하는 분위기였는데, 저는 창작활동을 하고 싶었어요. 제 생각에 노동운동은 대학 졸업한 뒤 감성적으로 공장에 취직하고 해서 하는게 아니라, 미싱을 배우든 용접을 배우든 배워서 뼈를 묻을 각오로 해야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저는 시를 좋아하고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창작을 하고 싶은 사람에게 노동운동을 하라고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해요.
내가 부문 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계급 운동을 하는 사람을 도와주고 옆에서 보조해줄 순 있지만, 섣불리 노동을 운동을 한다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저는 창작활동을 하고 싶었고, 잘하는게 그거니까 창작활동으로, 전문노래패 활동으로 기여하고 싶었던거죠. 그래서 노래하는 후배들과 1년 정도 열심히 준비해서 95년 가을쯤 음반을 냈어요. 인천대 노래패 후배들만 있었던건 아니에요. 성신여대나 다른 학교들고 있었고, 당시 인천에 있던 학생조직 중에 인천사랑학우회라고 있었는데, 그쪽 출신도 있었고요. 그래서 사실 인천에서 노래 쫌 한다는 학생들이 다 모였었죠.</p>
<p><center id="boxsolid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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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p>
<p><span class="detailB">Q. 노래이야기가 인부총련(인천부천지구대학총학생회연합) 노래패라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건 아니었나 봅니다. 학생노래패가 아니면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을텐데요.</span></p>
<p>A. 네. 사회인 노래패, 그러니까 전문 노래패였어요. 저는 원칙이 자력생생이거든요. 간혹 소위 운동권들 가운데 스스로 노동하지 않고 활동비를 받아서 대단한 일 한답시고 으스대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는 기본적으로 노동을 해서 돈을 벌고, 그러면서 활동을 해야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노래이야기도 그런 고민이 있었죠. 월급 받는 가수를 만들고 싶었고, 공연장과 연습실이 있는 공간을 만들고 지역에서 활동하는 그런 꿈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노래활동만으로는 한계가 있었어요. 그래서 앰프를 대여해보자하는 생각이 들었죠.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앰프와 조명을 다루기도 했고, 당시 학교 행사들이 커지다 보니까 학생회 자체 장비로는 감당이 어려워 수요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음향사업을 해보자 이랬어요. 노래패 노래이야기의 경제사업단처럼 음향사업을 시작했죠. 음향사업이 생각보다 잘 됐어요. 초기 자본금 200만원으로 시작해서 매출액이 2억 가까이 났으니까요. 제가 나름 당시 대학생들 사이에서 유명해서 영업이 잘된 편이었거든요. 하하하. </p>
<p><span class="detailB">Q. 대학생들 사이에서 유명하셨다구요?</span></p>
<p>A. 제가 원래 국문학과였잖아요? 북한 소설 중에 ‘꽃파는 처녀’라고 있어요. 이 소설을 보고 너무너무 슬프고 감동을 좀 받았어요. 그래서 이거를 노래극으로 좀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89년 즈음에 노래극으로 창작을 했어요. 북한 노래는 잘 모르니까 아는 노래들로 노래를 배치하고 무용도 좀 만들고 그리고탈패들하고 함께해서 만들었는데, 학생들이 굉장히 좋아했어요. 노래를 잘한 학생들이 굉장히 많기도 했고, 꽃파는 처녀가 워낙 슬픈 소설이기도 했고요. 그래서인지 여학생들은 공연을 보고 많이 울었죠. 울었다는 건 감동을 많이 받았다는 거겠죠? 그러다보니 초청을 좀 다니고 조금 유명해졌고, 전대협 문화부 회의도 다니고 하다 보니 여기저기 인맥들이 많이 생겼죠.</p>
<p><span class="detailB">Q. 노래이야기를 인천에서 시작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span></p>
<p>A. 저는 원칙이나 기준이 단순한 사람이에요. 당시 서울엔 문화활동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인천에는 사람도 없고 전문적으로 노래하겠다는 사람도 없는데 나라도 좀 남아서 해야되지 않나?'하는 생각이었어요. 인천에서 좀 역할을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거죠. 뭐 인천에 있지만 전국으로 공연다니는데는 큰 문제가 없기도 했구요.</p>
<p><span class="detailB">Q. 인천에서 활동도 많이 하셨겠어요.</span></p>
<p>A. 인천 지역에 무슨 행사가 있다고 하면 거의 다닌 것 같아요. 부평에 있는 미군기지 관련 싸울때도 많이 갔어요. 너무 많이 가서 일일이 기억을 못하겠네요. 전국활동도 많이 하면서 인천에서도 많이 활동했죠.</p>
<p><span class="detailB">Q. 노래이야기의 노래는 당시 유행했던 민중가요들이랑 좀 달랐어요.</span></p>
<p>A. 많이 달랐을거에요. 작곡가들이 멜로디를 가져오면 제가 가사를 붙이는 방식으로 노래를 만들었죠. 그때 작곡가들에게 마음 가는대로 만들라고 했었어요. 우리한테 작곡가가 두 명이 있었는데, 모두 클래식을 전공했거든요. 그러다보니 민중가요풍의 가사를 붙이기가 굉장히 난해했어요. 그래도 결과물들이 좋아서 어떤 즐거움이 있었어요. 서로 합이 잘 맞아서 노래를 만드는 일이 즐거웠어요. 당시에 민중가요 작곡가들은 전공을 했다기보다는 개인적 역량에 근거했다고 봤고 그래서 좋은 노래도 많았지만, 음악적 완성도나 뭐 이런 거로는 우리가 좀 충분하다 그런 자신감이 있었어요. 그래서 어떤 면에서 단점이기도 한데, 우리 노래가 좀 따라 부르기 어려운 면도 있죠.</p>
<p><center id="boxsolid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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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p>
<p><span class="detailB">Q. 노래이야기의 대표곡이라면 단연 ‘투쟁은 끝났다 말하지 말라’입니다. 특히, “내 조국은 아직도 식민지 우리가 할 일은 미국놈 몰아내는 것” 이 부분이 인상적입니다.</span></p>
<p>A. 당시, 그러니까 1995년 즈음엔 정권과 유화분위기가 좀 있었어요. 아무것도 된 게 없었는데 갑자기 통일운동도 안하고 국가보안법 철폐투쟁도 안하고 그랬어요.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미국에 종속되어 있는 그런 상황이 하나도 바뀌지 않았는데, 갑자기 싸움은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당시에 제가 활동하던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하고도 거리를 두는 것 같았구요. '왜 사람들이 투쟁 투쟁이 끝났다고 말하지?' 하는 생각이 들고 해서, '니들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라' 뭐 이런 식의 생각을 드러낸거죠.</p>
<p>'우리나라가 이제 선진국인데 왜 미국 식민지라고 해?'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거에요. 그런데 제가 보기엔 아직도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서 거의 반식민지 상태라고 봐요. 사실 저 노래를 만든지 25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현실이 슬플 뿐이죠. 한국이 발전하기 위해서라도 중국, 북한과 가깝게 지내야 한다고 봐요. 그런데 얼마전 한미안보협의회의에서 대만을 언급하면서 중국쪽 반발을 불러 일으켰잖아요? 과연 이게 한국에게 이익이 되느냐라고 봤을 때 아니라고 봐요.</p>
<p>이러니 미국에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종속적이라는거죠. 단어들이 약간 과격하긴 한데, 노래를 만들땐 머리에 콱 박힐만한 단어를 써야 하거든요. 그때 작곡가들은 그 부분보다 “죽지도 말아라 투쟁을 끝내기 않고서는” 이 부분이 더 좋아했어요. 되게 과격한데 괜찮은 것 같다고, 약간 머리가 쭈뼛 섰다고 그러더라고요.</p>
<p><center id="boxsolid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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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enter></p>
<p><span class="detailB">Q. 통일운동을 주로 노래하는 줄 알았는데, 음반을 보면 노동에 관련된 노래들, ‘우리 노동자’라든지 ‘잔업을 마치고 난 밤에’ 같은 노래들 말입니다. 노동에 대한 노래들을 만드신 이유가 있나요?</span></p>
<p>A. 대단한 생각을 가졌던 건 아니고요. 노동운동과 통일운동이 서로 다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노동운동이 전체 남한 운동의 큰 축 가운데 하나잖아요. 그래서 노동자의 정서를 이해하고 그 사람들을 위한 노래도 만들어야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노래들 가운데 ‘우리 노동자’는 약간 관념적인 노래인데, ‘잔업을 마치고 난 밤에’ 같은 경우에는 실제 노동하는 사람들이나 잔업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그 정서에 다가가려고 많이 노력한 작품이에요. 하지만, 내가 직접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물론 잠깐의 경험은 있지만 노동을 통해 생활을 영위하는 그런 경험은 없기 때문에 무척 조심스러웠어요. 이런 저런 책들을 바탕으로 해서 공감하려고 노력해서 만든 노래였어요.</p>
<p><center id="boxsolid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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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enter></p>
<p><center id="boxsolid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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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enter></p>
<p><span class="detailB">Q. 노래이야기 이후에는 어떻게 살고 계시나요?</span></p>
<p>A. 제가 국문과 출신이어서 25년정도 학원강사를 했어요. 거기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구요. 수업 준비를 엄청 열심히 해서 나름 유명한 강사가 됐습니다. 한 달에 몇 천만원씩 벌었어요. 그러다가 사실 제가 노래보다 대본을 잘쓰거든요. 그래서 영화공부를 하기위해 한예종에 진학하려고 했는데, 집의 반대와 건강이 안 좋아져서 포기했어요. 신장이 망가져서 신장이식을 했습니다. 앞으로는 글을 써볼까 해요. 그때는 노래로 이야기했으면 이제는 소설이나 시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원래 전공이 문학이니까 문학으로 이야기해보자라는 생각이에요.</p>
<div class="plsong">
<p>인터뷰, 사진, 정리 : 단풍<br />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사업팀</p>
<p><a href="https://m.blog.naver.com/bupyeong_art/222612811738">https://m.blog.naver.com/bupyeong_art/222612811738</a><a href='https://m.blog.naver.com/bupyeong_art/222612811738' target='_blank'><i class="icon-link-ext"></i></a></p>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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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도시부평 민중가요 아카이브 시리즈 <#1 최도은>(丹風)https://offree.net/entry/Protest-Song-Archive-12023-01-13T10:43:33+09:002022-06-18T14:45:26+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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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eldset class="ViewPostOfRelTag"><legend> 민중가요 아카이브 </legend>
<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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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최초 노동자 노래패 노둣다리, 이주헌
문화도시부평과 함께하는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중가수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인터뷰 운영은 국내 최대 민중가요 아카이브 사이트 PLSong.com의 운영자 ‘단풍’이 참여했다.
7회는 ‘노둣다리’의 이주헌님...">
인천 최초 노동자 노래패 노둣다리, 이주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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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인천 민중가요를 이끌었던 아름다운 청년, 최경숙
문화도시부평과 함께하는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중가수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인터뷰 운영은 국내 최대 민중가요 아카이브 사이트 PLSong.com의 운영자 ‘단풍’이 참여했다.
6회는 ‘아름다...">
21세기 인천 민중가요를 이끌었던 아름다운 ...</span> <a href=/entry/Protest-Song-Archive-6 id="tagSearch" class="new" target="_blank">새창</a></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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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철폐 투쟁의 현장에서 영오, 이동언
문화도시부평과 함께하는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중가수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인터뷰 운영은 국내 최대 민중가요 아카이브 사이트 PLSong.com의 운영자 ‘단풍’이 참여했다.
5회는 ‘인천장애인차별철폐연대’...">
장애철폐 투쟁의 현장에서 영오, 이동언
문...</span> <a href=/entry/Protest-Song-Archive-5 id="tagSearch" class="new" target="_blank">새창</a></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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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기억하며 현재를 노래하는 노래벗, 손은화
문화도시부평과 함께하는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중가수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인터뷰 운영은 국내 최대 민중가요 아카이브 사이트 PLSong.com의 운영자 ‘단풍’이 참여했다.
4회는 ‘노래벗’의 대표...">
과거를 기억하며 현재를 노래하는 노래벗, 손...</span> <a href=/entry/Protest-Song-Archive-4 id="tagSearch" class="new" target="_blank">새창</a></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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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는 알아도 작곡가는 몰랐던 꿈찾기, 손호준
문화도시부평과 함께하는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중가요 가수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인터뷰 운영은 국내 최대 민중가요 아카이브 사이트 PLSong.com의 운영자 ‘단풍’이 참여했다.
3회는 민중가요 밴...">
노래는 알아도 작곡가는 몰랐던 꿈찾기, 손호...</span> <a href=/entry/Protest-Song-Archive-3 id="tagSearch" class="new" target="_blank">새창</a></li>
</ul>
</fieldset>
<h3>혁명의 투혼 불나비의 가수, 최도은</h3>
<p>문화도시부평과 함께하는 <민중가요 아카이브>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중가수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인터뷰 운영은 국내 최대 민중가요 아카이브 사이트 PLSong.com의 운영자 ‘단풍’이 참여했다.</p>
<p>1회는 ‘노래선언’으로 활동한 최도은님이 참여해주셨다.</p>
<p><span class="detailB">Q. 인천과의 인연에 대해 말씀 부탁드려요.</span><br />
A. 나기는 전북 옥구에서 나서 한 살이 되기 전에 서울 은평구쪽에서 살았어요. 인천에 처음 내려온 것이 1988년이에요. 대학을 졸업하고 노동자들에게 노래를 지도하러 왔다가 8년쯤 살았어요. 백운 일대에 벌집이라고, 화장실 하나에 방이 8~10개씩 있는 그런 곳에 살기도 했고, 산곡동 한양아파트 뒤편 군부대가 하나 있었는데, 그 군부대 옆으로 쭉 올라가면 노랑다리라는 곳에 살기도 했어요. 노랑다리는 전기가 늘 나가가지고, 난방을 하지 못하니까 전기장판을 깔고 자다가 전기가 나가면, 산곡동에 ‘청산골’이라고 봉제노동자들이 만든 공간까지 밤마다 걸어가서 자기도 하고 그랬어요.</p>
<p><center id="boxsolid2">
<a href="https://offree.net/uploads/plsong/Protest-Song-Archive-1-01.png" rel="lightbox[Offree]" class='highslide' onclick="return hs.expand(this, { slideshowGroup: 'first-group' })"><img src="https://offree.net/images/uploads/plsong/Protest-Song-Archive-1-01.png"></a>
</center></p>
<p><span class="detailB">Q. 특별히 인천이었던 이유가 있나요?</span><br />
A. 인천에는 민중교회운동이 활발했는데, 민중교회에서 공부하고 토론하면서 이 사회에서 노동자가 정당한 대접을 받으려면 투쟁을 조직해야 한다는 그런 각성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아마 다들 1987년에 일어난 6월항쟁은 잘 알거에요. 인천에서는 이미 1985년에 대우자동차에서 민주화투쟁이 있었고 1986년엔 5.3항쟁이 일어났죠. 5.3항쟁은 많은 사람들이 시위에 참가해서 전두환 정권의 간담이 서늘하게 만든 투쟁이라고들 해요. 이런게 87년 6월항쟁이 지나고 87년 7월부터 9월까지 일어난 노동자 대투쟁에서 인천이 굉장히 그 중심적인 역할을 해요. 인천은 그렇게 노동자투쟁이 굉장히 활발한 지역이었어요.</p>
<p><span class="detailB">Q. 인천이 노동자투쟁이 활발해서 내려오신거라구요?</span><br />
A. 그 당시에 부평에서 제일 투쟁을 많이 하는 코스모스전자나 명성전자 농성장에 가서 노래 공연도 하고, 사실 공연이라기보다 가서 노래도 가르쳐 주고 율동이랑 구호도 가르쳐주고 그랬어요. 노조를 만드니까 회사가 문을 닫고 가버려요. 그러면 노동자들은 농성장을 만들었어요. 거기 다니던 대부분의 여성 노동자들이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졸업장 때문에 거길 떠나지를 못하는 거에요. 고등학교를 졸업해서 사무직으로 전환하고 싶어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회사를 떠날 수가 없는 거죠.</p>
<p>당시 현장 노동자들은 노래를 많이 몰랐기 때문에 '임을 위한 행진곡'부터 ‘불길도 헤치고 물속을 헤엄치고’, '모두들 여기 모였구나' 같은 노래들을 가르쳐 줬어요. 거기에서 그 친구들하고 같이 살고 같이 고민을 얘기하고 그러고 살았죠. 어차피 나도 살 곳도 없고 하니까 거기서 먹고 자고 하면서 살 수 있었어요.</p>
<p><span class="detailB">Q. 대학시절부터 소위 운동권이셨나봐요.</span><br />
A. 원래 운동권은 아니었어요. 음대생이다보니까 사실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냥 노래 부르고 집, 노래 부르고 집.. 이런식으로 살았기 때문에 사회에 대한 이해를 전혀하지 못했죠. 제가 84학번인데 입학 무렵 학교에서 시위가 자주 있었어요. 시위라고 해봐야 한 3~40명이 모여서 구호를 외치고 임을 위한 행진곡 한곡을 다 부르기도 전에 잡혀가는데, 아스팔트 위로 끌러가는 그 광경이 너무 잔인하고 그래서 그냥 피하고 싶었어요. 주로 학교 시계탑 근처에서 시위를 했는데, 우리 음대가 바로 그 시계탑에서 거리로 30미터쯤 되다 보니, 그 시위 광경을 수업하다가 다 보였어요. 그러다 2학년 때 과대표가 됐고, 3학년 때는 부학회장이 됐어요. 1986년 학생회 모임에서 이제 그런 공부를 해야 된다고 해서 한 첫 번째 세미나가 광주항쟁 관련된 인쇄물을 보고 하는 세미나였는데 너무 문화적인 충격이었어요. 그런 일이 있었다니...</p>
<p>그러다, 1987년 1월 14일, 탁 하고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는 그 박종철이 죽은 거에요. 나를 더 힘들게 했던 건, 나는 남영역 플랫폼에서 집에 간다고 들떠 있을 때, 그 플랫폼 맞은편 검정색 벽돌 건물에서는 내 나이 또래, 같은 학년인 학생이 잡혀가서 고문을 당해서 죽었다는 거였어요. 아무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을 끌고 가서 죽일 수도 있고, 아무 죄 없는 어린 소녀들, 어린 청년들에게 총구를 겨누는 세상이었다는 걸 알게 되니까, 내가 막 독립운동을 해야 될 것 같고. 그런 마음으로 열심히 막 뛰어다닌 거죠. 그러다보니 졸업하고서도 당연히 뭘 할게 아니라 당연히 그냥 이런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 뭐 흔히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가서 내가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겨서, 그래서 졸업하고 인천에 가서 정말 열심히 살았어요.</p>
<p><center id="boxsolid2">
<a href="https://offree.net/uploads/plsong/Protest-Song-Archive-1-02.jpg" rel="lightbox[Offree]" class='highslide' onclick="return hs.expand(this, { slideshowGroup: 'first-group' })"><img src="https://offree.net/images/uploads/plsong/Protest-Song-Archive-1-02.jpg"></a>
</center>
<span class="detailB">Q. 음대생이셨군요? 그러시면 학교를 다니시면서 노래패 활동도 하셨겠어요.</span><br />
A. 전혀 아니에요. 중학교부터 성악가를 목표로 공부를 했어요. 고등학교도 일반학교지만 음악공부를 하는 학교로 갔고, 숙대 성악과에 들어간거죠. 말 그대로 성악과 출신이어서 노래를 잘했으니까 그냥 졸업을 했는데, 그 당시에 인천에서 노동쟁의가 많이 일어났고 그래서 거기에서 그냥 노래운동을 해야겠다라고 생각한거에요.</p>
<p><span class="detailB">Q. 노래선언 활동에 대해서도 간단히 소개부탁드려요.</span><br />
A. 노래선언은 1991년 5월에 만들었어요. 인하대 노래패 출정이랑 인천대 노래패, 숭실대 노래패 학생들이랑 모여서 1990년부터 준비를 했어요. 처음에 만들 땐 사무실이 없고, 노랑다리 우리집에서 먹고 자고 같이 이야기하면서 만들었어요. 사무실은 나중에 주안에 얻었어요. 인천에서 투쟁하는 공장이면 다 찾아다니면서 강의하고 노래 부르고 교육하고 그런 활동을 주로 했어요.</p>
<p><span class="detailB">Q. 인천에서 활동하실 때 노동자와 함께 활동했던 것들도 좀 이야기해주세요.</span><br />
A. 투쟁이 활발했던 소규모 사업장에 다니던 노래를 좋아하던 친구들이 있는데, 자기 사업장에서는 노래를 못하니까 인천지역 노동자 노래패를 만들었어요. 그게 89년부터 하나로 굴러가는 모임이 있는데, 이 사람들도 결국 먹고 살아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노래가 좋아서 노동자노래패까지 왔지만 먹고 살기 위해서 말도 안하고 사라지곤 했어요. 모임에 안 나타나면 그냥 사라지는 거에요.</p>
<p>그 당시에 전화가 있어요, 삐삐가 있어요. 약속 날짜를 잡으면 빠지지 않고 오는 거죠. 나이가 많아야 스물 세넷 정도 되는 친구들이 그냥 모이면 밤을 새고 안 가는거죠. 농성장에 가서 밤새거나 하면서요. 대기업들은 회사가 없어지지 않으니까 노래패들이 계속 남지만 소규모 사업장 노동자들은 아무리 내가 노래가 좋고 노동자들의 연대에 가서 활동하는게 너무 좋아도 ‘내가 뭐 먹고 살지?’하는 순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사라지는거에요. 지금 어디에서 뭘하고 사는지는 모르지만, 주체적으로 살아봤던 그런 경험들이 있어서 다들 잘살고 있을거라고 생각해요.</p>
<p><span class="detailB">Q. 부평엔 GM도 있는데, 그곳 이야기도 들려주세요.</span><br />
A. GM은 그전에 대우자동차였죠. 대우자동차나 대우중공업, 대우전자. 그러고보니 다 대우네 하하하. 이렇게 큰 회사에는 노래패가 만들어지면 나 같은 전문적인 사람이 가서 노래하는 법도 가르키고 노래도 전달해주고 또 학습도 했어요.</p>
<p>두산으로 넘어간 대우중공업 노래패는 활동을 하는 것 같진 않아요. 가끔 지역 노래패 연대모임에 나오곤 했었는데, 요즘엔 거의 안 보이는 것 같아요. 대우자동차는 자체적으로 노래패를 하지만 지역 노래패 활동도 열심히 해요. 최근 국민건강보험공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할 때 원주까지 가서 공연도 하고요. 암튼 다들 열심히 사는 것 같아요.</p>
<p><span class="detailB">Q. 부평은 선배님에게 굉장히 큰 의미가 있는 곳이겠습니다.</span><br />
A. 부평에서 살았던 시간은 내 인생에서 정말 불꽃같이 타올랐던 시간이었고, 벽을 깨는 시간이었요. 인식을 깨고...어떤 사람들에 대해서 존중하게 되는 계기, 그래서 지금까지도 민중 가수 생활을 할 수 있는 힘이 되는 그런 곳이었던 것 같아요.</p>
<p><span class="detailB">Q.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span><br />
A. 음대 친구들이 저한테 “너는 어떻게 그 시커먼 사람들한테 가서 노래할 마음이 나니?” 라고 물어요. 90년대 초중반까지 공장 노동자들은 사회적으로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하다 보니 밖에서 봤을 때, 노동자는 항상 피로하고 기계의 기름, 먼지에 쌓여 있는 더러운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거든요. 만나기 전에는 저 사람들은 이렇게 하층이야 이렇게 접근하지만 가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아요. 노동자들은 정말 열심히 살아요. 아빠찬스 엄마찬스 없이 열일곱 살부터 공장에 다니면서 자기가 돈을 벌어서 자기가 생활을 영위하는... 또 누가 어려운 일이 있으면 기꺼이 돕는 노동자들이 참 많아요. 그런 노동자들하고 만나서 해방감을 얻었다고나 할까요.</p>
<p>그런 경험이 있어서 거리에서 남루한 사람을 만나도 아무런 두려움이 없어요. 그냥 저 사람이 지금 당장 돈이 없어서 목욕하지 못하고 씻지 못해서 저렇게 더러운 거지 내가 피할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죠. 부평에서 만난 노동자들과의 경험이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편견을 깨게 했고, 누구를 만나도 다른 사람을 존중해주고 싶고 존중해줘야 된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이 존중받지 못하는 것은 이 시스템이 잘못됐기 때문인 거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구요.</p>
<p><center id="boxsolid2">
<a href="https://offree.net/uploads/plsong/Protest-Song-Archive-1-03.jpg" rel="lightbox[Offree]" class='highslide' onclick="return hs.expand(this, { slideshowGroup: 'first-group' })"><img src="https://offree.net/images/uploads/plsong/Protest-Song-Archive-1-03.jpg"></a>
</center></p>
<p><span class="detailB">Q. 이제 노래이야기를 할 수 있겠네요. 최도은 하면 불나비, 불나비 하면 최도은. 대표곡이 불나비로 알려져 있어요. 불나비에 대한 이야기도 좀 부탁드려요.</span><br />
A. 솔직히 불나비만 부르라고 하니까 다른 걸 부를 기회가 없어요. 하하하. 불나비는 지금도 누가 만들었는지 아직도 몰라요. 그런데 나는 어쨌든 불나비가 되게 좋았어요. 내 친구 이은정이라고.. 친구가 1986년에 이걸 부르는데, 그때 꽂혔어요. 걔는 어떻게 불렀냐면 ‘친구야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계속 ‘가자’를 지가 하고 싶을 때까지 계속 불러요. 요즘으로 치면 랩인데 나도 걔처럼 막 이렇게 불렀죠. 그러다가 이제 인천에 갔는데 많은 노래를 불러도 불나비를 부를 때 반응이 제일 좋았어요. 인천에서부터 불나비를 부를 때는 ‘친구야 가자 가자’로 두 번으로 정리해 불렀어요. 맨날 진짜 집회에서 늘 불나비를 불렀어요.</p>
<p>불나비 노래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전태일 열사가 돌아가신 평화시장에서 9살부터 일한 노동자였던 영미언니라고 있어요. 영미언니 말로는 평화시장 다닐 때 불렀다고 그러시더라고요. 근데 나한테 언니가 그러는 거에요. 불나비 가사에서 ‘하얀 꽃들을 수레에 싣고’ 부분의 하얀 꽃이 뭔 줄 아냐고. 나는 뭐 국화 백합 뭐 이렇게 대답했더니, 그 당시에 여공들이 수레 가득 옷감을 싣고 가다 보면, 평화시장 그 좁은 통로를 지나갈 때 옷감이 꽃처럼 보여서 자기들은 그렇게 불렀다라고 하더라구요.</p>
<p>불나비를 부를 때 반응이 제일 좋아요. 그러니까, 불나비를 안 부를 수가 없죠. 그게 고음을 지르는 그거에서 해방감을 좀 보시는 것 같아요. 96년인가 97년인가, 여의도에 10만 명 정도가 모여 있는데 불나비를 부르면 막 다 춤을 추면서 그걸 함께 불렀어요.</p>
<p><center id="boxsolid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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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enter></p>
<p><span class="detailB">Q. 불나비 말고 선배님이 자주 부르시는 노래가 있나요?</span><br />
A. 혁명의 투혼이라는 노래가 있어요.
혁명의 투혼은 1990년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선거에 나온 팀에서 선거운동가로 만든 노래에요. 노래를 들었는데 뭔가 딱 와 닿더라구요. 그 노래를 2천년에 “도은아 추운데 노래나 하자”라고 콘서트 할 때 불렀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십 년째 부르고 있어요. 가사가 좋아요. ‘일어서라 그대여 투쟁하라 그대여 혁명의 투혼으로 세계를 번혁하라’ 이 불평등의 세상에 딱 맞는 노래인 것 같아요. 노래라는 게 만든 사람은 그런 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는데, 그 노래가 가슴에 와 닿으면 가수가 선택해서 부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p>
<p><center id="boxsolid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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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enter></p>
<p><span class="detailB">Q. 앞으로도 인천에서 계속 활동할 계획이 있나요?</span><br />
A. GM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농성하고 그럴 때도, 2019년에 합의한 콜트악기 투쟁에도 가서 노래를 부르고 그렇게 꾸준히 활동을 해왔어요. 티비에도 나오지 않고 신문에도 실리지 않으니까 알려지지 않지만 노동자들이 투쟁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고 있어요.</p>
<p>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거에요.</p>
<div class="plsong">
<p>인터뷰, 사진, 정리 : 단풍<br />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사업팀</p>
<p><a href="https://m.blog.naver.com/bupyeong_art/222601833076">https://m.blog.naver.com/bupyeong_art/222601833076</a><a href='https://m.blog.naver.com/bupyeong_art/222601833076' target='_blank'><i class="icon-link-ext"></i></a></p>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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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아님의 블로그에 합류하게 된 丹風입니다.(丹風)https://offree.net/entry/Danpung-Join-Blog2022-06-16T16:20:27+09:002022-06-16T16:04:12+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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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안녕하세요.</p>
<p>도아님의 블로그에 합류하게 된 丹風입니다.</p>
<p>블로그의 한 켠을 내어주신 도아님께 감사드립니다.</p>
<p>제가 앞으로 하게 될 이야기는 대략 아래와 같습니다.</p>
<ul>
<li><p>민중가요 이야기</p>
<p>개인적으로 민중가요 관련 사이트(http://plsong.com)를 20여년 운영해 왔습니다. 비록 지금은 악보를 공유하는 정도에 머물고 있지만요. 민중가요를 주제로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있기도 합니다. 저에게 민중가요는 삶이자, 사랑이었습니다. 따라서, 민중가요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올려드릴 수 있을것 같습니다.</p></li>
<li><p>튀르키예 이야기</p>
<p>2005년부터 튀르키예를 들락날락 하곤 했습니다. 튀르키예는 굉장히 독특한 나라입니다.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한국에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튀르키예 사람들은 한국을 형제의 나라로 여깁니다. 고구려와 결혼을 통한 혈맹이었던 튀르크(돌궐)의 후손이기에, 한국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이전부터 튀르키예 사람들은 한국인을 형제로 여깁니다. 그런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1950년 한국전쟁에도 1만 5천명이나 되는 병력을 파병할 수 있었습니다.
튀르키예가 있는 아나톨리아 반도는 고대 4대 문명 가운데 하나인 아나톨리아 문명(유프라테스-티그리스강 문명)이 있었던 곳입니다. 그래서인지 고대 유적지가 정말 많은 나라입니다. 1만 2천년전 고대 신전의 유적(괴베클리 테페)과 트로이 목마로 유명한 트로이 유적, 구약성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활동했던 하란 등 무수한 유적들이 많습니다. 괴베클리 테페나 하란, 넴룻 산, 하산 케이프 같은 곳은 아직 한국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곳입니다. 장차 이 곳을 함께 여행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싶은 꿈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튀르키예에 관한 이야기들을 종종 올리려고 합니다.</p></li>
<li><p>안경 이야기</p>
<p>서른 즈음이 되었을 때,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싶은 욕심에 공부를 시작해 안경사가 되었는데요. 어쩌다 보니 박사학위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안경 상품을 소개하는 블로그나 SNS들은 많습니다. 저는 조금 더 근본적인 부분을 이야기해보고 싶어서 '눈건강 연구소'라는 비영리단체를 만들었는데요, 사실 코로나-19 덕분에 개점 휴업입니다. 그 곳에서 해보고 싶었던 일들을 이 곳 도아님의 블로그를 통해 조금씩 이야기 해보려 합니다.</p></li>
</ul>
<p>도아님의 명성이 기대어 수고를 덜으려는 얄팍한 생각을 이해부탁 드리며...</p>
<p>丹風 Drea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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